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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부|교회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가 Q1. 교회는 왜 헌금을 걷는가? Q2.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더 탐욕스러워 보이는가? Q3. 종교는 애초에 지배를 위한 발명품인가? Q4. 종교야말로 전쟁과 폭력의 가장 큰 원인이 아닌가? Q5. 일반 교회가 사이비와 다른 점이 뭔가? Q6. 교회에는 왜 이렇게 종파가 많은가? Q7. 교회는 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가? Q8. 결국 종교는 정신 승리 아닌가? 2부|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왜 그런가 Q9. 왜 교회에는 유독 이상한 사람들이 많은가? Q10. 어린아이를 교회에 데려가는 건 세뇌가 아닌가? Q11. 교회에 다니지 않고 혼자서 신을 믿을 수는 없는가? Q12. 일요일마다 모여서 대체 뭘 하는가? Q13. 교인들은 왜 그렇게 감정적인가? Q14. 기도해도 안 이루어지던데 왜 하는가? Q15. 하나님을 만난다는 게 무슨 말인가? Q16. 사람이 해놓고 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가? Q17. 기독교를 믿으면 뭐가 좋은가? 3부|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건가 Q18. 신을 믿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가? Q19.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있는가? Q20. 과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지 않은가? Q21. 기독교는 현대 과학을 부정하는가? Q22. 예수가 실존 인물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Q23. 신의 말씀이라는 성경에 왜 오류가 있는가? Q24. 21세기에 기적이라니, 말이 되는가? Q25. 기독교인들은 왜 예수가 부활했다고 믿는가? Q26. 모든 종교는 결국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Q27. 모든 종교를 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하나를 고르는가? 4부|신이 있다면 세상은 왜 이 모양인가 Q28. 왜 기독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말하는가? Q29. 사랑의 신이라면서 어떻게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가? Q30. 범죄자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Q31. 예수를 몰랐던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는가? Q32. 구약의 학살 명령은 신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Q33.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고통과 악이 있는가? Q34. 왜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가? Q35. 그래서 이 모든 게 무교인 나와 무슨 상관인가? 에필로그 주 |
오성민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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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를 마음속 일순위 자리에 둘 것을 가르칩니다. 만약 마음속의 왕좌에 돈이 아니라 예수를 앉힐 수만 있다면, 그가 나를 대신해 탐욕과 싸워 준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게임으로 비유해 보자면, 기독교는 우리에게 스스로의 실력으로 ‘챌린저’(최고 등급)를 찍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설적인 프로 게이머인 ‘페이커’에게 내 계정의 패스워드를 넘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페이커가 대신 게임을 뛰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패스워드를 넘길 수 있을까요?
--- p.33 정신 승리라는 말에는 허구를 사실처럼 여긴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결국 현실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삶을 성실히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이러한 시각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정신 승리라는 말의 정의를 조금 넓혀서 생각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 단어를 ‘진실이라는 완벽한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진실이라고 믿는 일’이라는 뜻으로 바꾸어 본다면 어떨까요? 이 정도로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기독교는 분명 정신 승리 중 하나에 해당합니다. 신의 존재나 기독교의 진실성을 완벽히 입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정 수준까지 이성적인 근거를 대 볼 수는 있겠지만, 결국 모든 신앙인은 믿음으로 도약해야만 하는 벼랑 끝 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만약 이를 정신 승리라 불러야 한다면, 기독교를 믿는 일은 정신 승리가 맞습니다. --- p.67~68 그러나 이 모든 분석을 인정하면서도 신앙인은 여전히 “하나님이 들어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서로 층위가 다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주방에 있는 냄비에서 물이 팔팔 끓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왜 물이 끓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온도가 끓는점인 100도에 도달했기 때문이야”라고 설명할 수도 있고, “내가 라면 먹고 싶어서 물을 올려놓았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법칙에 대한 설명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적인 의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둘 중 무엇이 더 좋은 대답일까요? 둘 다 좋은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의도를 담은 설명이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오히려 과학적 설명을 곁들이면 어색해집니다. --- p.122~123 예수가 이 땅에서 보여준 모습은 우리에게 고통받는 이웃에게 시선을 돌리고,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도록 격려합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에만 집중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순간마다 하늘을 바라보면 신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그는 이미 고통의 낮은 현장에 내려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 또한 그 고통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돕고 그들의 아픔을 나누면서 함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자리에 함께 있을 예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p.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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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이것을 먼저 물어야 했다. 비그리스도인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중요한가? 그 질문을 정직하게 곱씹다 보니 어떤 아이러니를 발견했다. 그 모순은 불신자의 것이 아니었다. 교회에서 받은 누군가의 상처를 불신이라는 단어로 포섭하는 순간 마주하는 우리의 모순이었다. 『교회 밖에서 묻는 질문들』은 이런 물음들을 진지하게 여기는 데에서 출발한다. 교회 중심적인 언어로 섣부르게 대답하기보다는 질문의 이유와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나아가 신앙의 언어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닿기 위해 일상적인 비유와 개인적인 경험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때로는 질문의 무게 앞에 멈춰 서기도 한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와 보자. 교회 밖의 질문은 우리에게 중요한가? 책은 대답한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며 사랑은 실존적인 질문의 무게를 외면할 수 없다고.
- 김호현 (대중음악평론가, 한국힙합어워즈 선정위원, 유튜브 채널 ‘교회는 안 다니는데 궁금은 하네요’ 호스트) 내 신앙의 연대기를 거꾸로 넘기다 보면, 그 첫 장마다 ‘다마스커스 TV’의 오성민 대표가 있다. 믿기 전의 내게도 이 책의 목차를 닮은 질문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어느새 완고함으로 굳어 신앙 앞의 문턱이 되었고, 그때는 그 문턱이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 문턱을 지나게 한 것은 날 선 논증이 아니었다. 팟캐스트 마이크 너머로 오성민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언가가 가랑비처럼 내렸다. 나는 옷이 젖는 줄도 몰랐다. 그는 내 완고함을 억지로 깨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것이 제풀에 풀릴 만큼 오래, 넉넉하게 곁에 있어 주었을 뿐이다. 이제 는 그 문턱이 어디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 비의 이름을 알았다. 관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힘없는 너그러움이 아니었다. 논쟁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대신 조제를 했다. 약사답게 그는 용량을 알았다. 쓴 약을 한번에 들이붓지 않고, 내가 삼킬 수 있는 만큼씩만 오래 건넸다. 그리고 그 약은 끝내 들었다. 이기지 않고 이끄는 사람을 나는 그에게서 처음 보았다. 그 비는 나에게만 내린 것이 아니었다. 십 년 넘게, 그는 수많은 비신자 앞 늘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렸다. 그것은 단순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맡기신 달란트였고, 그를 통해 내게 닿은 은사였다. - 유읽남 (유튜브 채널 ‘유튜브 읽어주는 남자’ 운영자) 교회 밖에서 날아오는 질문들은 외면해도 된다. 도망쳐도 된다. 아니면 질문을 던지는 이를 탓하며 내 신앙의 굳건함만 증명하려 애써도 된다. 문제는 그러다 어느 날, 믿지 않는 친구가 던진 예리한 질문 앞에 말문이 막히거나 믿음이 근본부터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어설프게 설득하려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질문들은 기독교에 궁금증을 품은 무교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의문이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역시 한 번쯤 떠올려 보았을 물음이다. 다만 대화가 평행선을 달릴까 두려워 서로 외면해 왔을 뿐이다. 오성민 대표는 용기를 내어 이 모든 질문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가 정직한 씨름 끝에 맺은 이 결실은 질문하는 무교인에게는 강요 없는 다정한 안내를, 대답하고 싶은 신앙인에게는 한층 더 성숙해지는 기쁨을 선물할 것이다. - 차성진 (유튜브 채널 ‘엠마오 연구소’ 운영자, 모두교회 담임목사) 이 책은 교회가 환영하지 않던 질문 서른다섯 가지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낸다. 저자는 반론에서 옳은 부분을 먼저 인정하고, 증거와 논리로 답을 세운 뒤, 교리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에 다다른다.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의 엄밀함에 C. S. 루이스의 다정한 필치를 더했고, 논증이 닿지 못하는 자리는 그렇다고 정직하게 고백한다. 기독교에 질문을 품은 무교인, 의심 때문에 교회를 떠난 사람, 친구의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혔던 신자, 어려운 질문을 강단에서 에둘러 온 설교자에게 꼭 필요한 책이다. 나는 마지막 부류로서, 내 설교가 교회 밖에서 어떻게 들리는지를 이 책에서 비로소 들었다. 먼저 읽으라. 그리고 지금 떠오르는 바로 그 사람에게도 한 권 건네 주기를 바란다. - 김관성 (낮은담교회 담임목사) ‘다마스커스 TV’의 오랜 애청자로서 내가 저자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생각을 생각하는’ 능력이다. 그는 비신자들의 생각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그만큼이나 신자들의 생각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전제들을 들춰내고, 그 전제들에 정직하게 질문하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준비를 갖추게 해준다. 프롤로그에서 저자가 밝혔듯 “기독교인 독자가 이 책의 모든 주장에 온전히 공감하는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지 모른다. 나 역시 저자의 모든 견해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밖 친구에게 선물할 책을 고른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꼽을 것이다. 이는 ‘생각을 생각하게 하는’ 저자의 잣대가 저자 자신에게도 공정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객관적으로 직시할 줄 알고, 그럼에도 ‘입증되지는 않지만 믿는다’고 말하는 영역이 무엇인지를 밝힐 용기를 지녔다. 그렇다면 비기독교인들에게 선물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는 바를 선명히 밝히고, 의견 차이를 인정하며, 상대방의 생각까지 객관적으로 짚어 주는 것, 이보다 더 탁월한 소통이 어디 있겠는가. - 이정규 (시광교회 담임목사) 고맙고 고맙다. 10년 넘게 기독교 신앙 자체에 대해 수천 명의 비기독교인들과 나눈 토론과 대화를 한 권의 책으로 읽을 수 있다니. 생생하다. 질문을 던졌던 사람들의 호기심, 진정성, 애절함이 느껴진다. 저자 또한 그만큼 철저하고 치밀하다. 동시에 솔직하고 겸손하다. 왜 이렇게 치열하게 토론하고 진솔하게 대화했을까. 무엇보다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이것이 저자가 설명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모든 장이 탁월하지만, 특히 ‘기독교를 믿으면 뭐가 좋은가?’에 울리는 복음의 메아리에 가슴이 벅찼고,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고통과 악이 있는가?’를 읽으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이 가장 멀다지만, 이 책은 그 길을 성공적으로 걸었다. 뿌듯하다. 이제 더 이상 유명 외국 변증가의 책을 뒤적거릴 필요가 없다. 목회자가 아닌 저자가 생생한 현장 경험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설명한 이 책은 한국 기독교가 얼마나 성숙했는지를 보여준다. 왜 예수가 기쁜 소식인지 교회 밖 언어로 풀어 주어 다시금 고맙다. 당신의 비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라. 그들도 고마워하고 기뻐할 것이다. - 전성민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유튜브 채널 ‘민춘살롱’ 운영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