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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부석사 관음상의 눈물
약탈당한 고려문화재와 대마도 왜구 이야기
김경임
도서출판 곰시 201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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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제1부 고려의 미소 - 서산 부석사 관음보살상 돌아오다
1. 사라진 관음보살 나타나다
대마도에서의 하루
불상의 귀환
일본의 고민 - 왜구의 약탈, 외교 문제로 비화
불상의 출현 - 금지된 과거의 문을 두드리다
2. 서산 부석사에서 관음보살 탄생하다
출생의 기록 - 복장물(腹藏物) 속의 결연문(結緣文)
고려 말, 불상이 조성된 시대의 모습
불상을 조성한 서산과 서산 사람들
3. 불상은 어떻게 대마도로 건너갔는가?
조선 초 억불숭유하에서 불교의 수난
불상의 기증이나 교역이 가능했을까?
서산의 불상이 대마도에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는?
부석사 불상의 약탈 증거
4. 약탈과 도난이 얽힌 문화재로서 국제적 사례
멕시코와 프랑스, 고문서 도난사건을 원만히 처리
전세계를 놀라게 한 모나리자 도난사건
스웨덴의 약탈문화재 전시
제2부 대마도 이야기
1. 대마도 - 한반도의 끝, 일본열도의 시작
대마도 개황
대마도 지도
한반도의 전진기지 대마도
고대 문헌에 나타난 대마도의 모습
오래된 대마도 - 신화, 전설, 신앙…
2. 돌아오지 않는 다리
대마도, 일본의 변방으로
한일 관계의 분수령 - 고려와 몽고군의 일본 침공
대마 수령의 교체 - 가야 계통에서 규슈 출신으로
3. 왜구의 시대
왜구는 누구인가?
고려와 조선을 침구한 왜구의 정체
왜구의 실체에 관한 논쟁
4. 대마도에 호시절이 도래하다
새로운 출발 - 세종의 대마도 정벌
대마도의 경상도 귀순에 관한 논의
처음 찾아온 호시절 - 교역의 시대
조선과 대마도의 관계, 새로운 국면으로 - 삼포왜란
5.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임진왜란 - 대마도, 왜군의 선봉에 서다
국교회복 - 대마도, 대조선 업무를 가역(家役)으로 받다
조선통신사 시대 - 250년의 평화
조일 관계의 최전선 초량왜관의 시대
격동기 일본에서 대마도의 생존전략
메이지 유신과 제국주의 하에서 대마도의 역할
항일의병들의 유배지
마지막 인연 - 조선의 마지막 왕녀와 대마도주 후손의 결혼 그리고 이혼
에필로그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연수했으며, 미국 오하이오 주립 애크론 법대에서 수학했다. 1978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1978년부터 2007년까지 외교관으로 도쿄, 뉴욕, 파리(유네스코), 뉴델리, 브뤼셀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주 튀니지 대사를 역임했다.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며 문화재 반환 문제에 관한 국제적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중원대학교 교수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문화 전문 외교관으로서 문화외교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대학에서 연수했으며, 미국 오하이오 주립 애크론 법대에서 수학했다. 1978년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외무고시에 합격한 뒤, 1978년부터 2007년까지 외교관으로 도쿄, 뉴욕, 파리(유네스코), 뉴델리, 브뤼셀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으며, 주 튀니지 대사를 역임했다. 외교통상부 문화외교국장을 역임하며 문화재 반환 문제에 관한 국제적 시각을 갖게 되었으며, 프랑스와의 외규장각 도서 반환 협상 당시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중원대학교 교수다.

저서로는 우리나라의 몇 안 되는 문화 전문 외교관으로서 문화외교 분야에서 쌓은 경험과 연구를 토대로 약탈 문화재에 관해 집필한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 있다. 그 외 저서로는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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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5년 09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347쪽 | 633g | 153*224*22mm
ISBN13
9788996741787

책 속으로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 1월 말부터 한국인 절도단에 의한 대마도 불상절도사건이 한일 양국의 언론에 일제히 보도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도난 문화재인 만큼 즉각 반환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한국 정부도 외교채널을 통해 반환을 검토하는 모양새였다. 바로 이때 국내 여론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압수된 불상 중 적어도 관세음보살좌상만큼은 반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330년 서산 부석사에 봉안된 이 불상은 왜구(倭寇)에 의한 약탈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 pp.22-23

수백 년 전 약탈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문화재가 절도범들에 의해 원소유국으로 되돌아온 사건이라는 점에서 대마도 불상 절도사건은 국제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희귀한 사건이다. 도난과 약탈(입증이 되었다면)이라는 두 가지 범죄가 얽힌 이 불상의 처리를 위해서 오늘날 참고할 수 있는 국제법의 규정이나 국제관행은 찾기 힘든 형편이다. 1970년 성립된 ‘유네스코 불법문화재 반환협약’은 1970년 이후에 도난이나 불법에 의해 반입된 문화재는 반환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협약에는 한국과 일본이 가입하고 있는 만큼 부석사 불상이 단순한 도난 문화재라면 한국은 유네스코 협약에 따라 불상을 반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석사 불상이 약탈문화재라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오늘날 그리스, 터키, 이집트와 같은 나라들은 과거 수백 년 전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을 위해 꾸준히 투쟁을 벌이고 있고, 이 같은 약탈문화재 반환운동은 문화재 관련 학자들을 중심으로 국제사회의 호응을 이끌어 내며, 점차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 pp.26-27

“한국인으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은 듣지 못할지언정… ‘약탈’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분노를 넘어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조선에 교역을 하러 건너간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벌어지는 불교탄압의 와중에 불상의 몰수나 파괴의 참상을 보다 못해 불타는 절에서 불상을 구출해 낸 것을 약탈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실례가 아닌가? 불상이 대마도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마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지켜 온 불상을 훔쳐가서 생떼를 쓰며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상식이 통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을 재인식했다. 도둑질한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사건과 다를 바 없다.” 대마도 간논지(觀音寺) 전 주지 다나카 세쓰코(田中節孝) 씨가 대전지법의 불상 이전금지 가처분 판결을 내린 직후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 p.26

왜구는 오로지 약탈, 살상, 방화, 납치를 자행했던 집단인 만큼 왜구가 활동했던 당시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 정부에도 용납될 수 없었던 불법적인 존재였다. 더구나 전시 약탈이 국제범죄로 확고히 정착된 오늘날, 역사적으로 수백 년간 집요하게 인접국을 침략하고 노략질했던 왜구는 평화스럽고 선진적인 이미지를 뒤집어쓴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부담스럽고 곤란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아떨어졌는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일본인 학자들의 ‘왜구 재해석’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왜구에 관한 자료 공백은 학자들의 역사 재해석을 용이하게 해 주었다. --- p.192

왜구의 정체를 논할 때 또 하나의 논란 점은 왜구의 활동내용이다. 왜구의 핵심은 약탈이며, 약탈의 과정에서 방화와 살인이 뒤따른다. 약탈의 대상은 미곡과 물건, 사람 등 돈이 되는 모든 것이다. 이러한 약탈물은 자체에서 소비되거나, 매각되었고, 특히 약탈물 중 훼손이 심해서 매각되지 못한 불상이나 불구는 신사나 사찰에 기증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같이 약탈물의 매각이나 기증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왜구가 상행위나 기증행위도 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 p.199

1419년 6월 6일 3군도체찰사 이종무(李從茂)는 병선 227척과 1만7,285인의 군사와 함께 65일간의 식량을 준비하여 거제도를 출발하여 아소만으로 향했다. 이것이 세종의 대마도 정벌, 즉 기해동정(己亥東征)이다. 아소만을 한 바퀴 돌며 수색한 조선군은 아소만 동쪽의 고부네코시(小船越) 등지에서 왜구 100여 명을 참수하고 2,000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으며, 150여 명의 명나라 포로와 조선인을 찾아내는 전과를 올렸다. --- p.207

1592년 4월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대마군대는 출병 제1진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편성되어 선두를 맡게 되었다. 5,000명 규모의 대마군대는 각 포구의 씨족집단을 단위로 동원되었는데, 최대다수는 소씨(宗氏)였고, 다음이 아히루(阿比留) 일족이었다 한다. 대마병사는 출병한 모든 일본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선두에서 일본군대를 부산과 서울까지 인도했고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동원된 통역만 60명이었다 하는데, 모두 왜관 출신이었음은 물론이다. 300여 년 전 몽고군의 일본정벌을 반대했지만, 몽고의 강압으로 전쟁에 끌려들어가 침략군의 선두에 서야 했던 고려군의 처지와 비슷할 것이다. --- pp.246-247

폐번치현 이후 16대이자 최후의 대마번주 소 요시아키라(宗義達)는 1862년 16세에 번주가 된 지 10년 만에 대마번의 해체를 당한 비운의 도주였다. 그는 막말 유신기의 10년간의 결정적 시기에 배후세력인 막부
와 조선을 배신하면서 존왕양이파에 가담했지만, 결국은 유일한 자산인 왜관과 대마도 번사를 모두 잃고, 종국에는 600년 역사의 영주국 대마도가 청산되는 시기를 이끌었던 망국의 영주이기도 했다. 그는 1884년 화족령(華族令)에 의해 백작의 지위를 얻고 이후 도쿄에 거주하다 1902년 사망했다. --- p.297

대마번 폐지 후 대마도의 가치는 오직 제국주의 일본을 위한 요새로서의 역할에 두어졌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대마도의 요새화(要塞化)가 추진되었다. 1886년 이즈하라에 육군경비대가 설치된 데 이어 아소만 다케시키(竹敷)에는 해군 방비대가 설치되어 아소만 일대에 10여 개의 포대가 구축되었고, 1899년 게치(鷄知)에 대마요새 포병대대가 설치되어 해안 일대의 능선에 수개의 보루가 구축되어 섬 전체가 요새화되었다. 러·일전쟁을 앞둔 1900년에는 대마도 동서를 관통하는 만세키(萬關)인공 운하가 완공되어 러·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 pp.298-299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의병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 합병을 서두르던 일본 제국주의는 항일의병으로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홍주의병의 중심인물, 이른바 ‘홍주 9의사’와 항일의병의 거두 면암 최익현을 대마도에 유배했다.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항일의병들을 조선 민중과 효과적으로 차단시키기 위해 한일 양국 사이의 외딴섬 대마도가 선택된 것이다. --- p.302

조선과 대마도의 숙명적이고 끈질긴 관계는 조선의 마지막 왕녀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1989)와 대마도주 소씨의 후계자 소 다케유키(宗武志)의 비극적인 결혼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망국의 왕실에 태어나
강요된 일본유학과 정신병 그리고 대마도주 후손과 결혼, 이어서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독립 직후 이혼, 나아가 그들 사이의 유일한 혈육인 딸(정혜)의 실종은 조선과 대마도의 파란만장했던 관계와 불행한 결별을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듯하다.

--- p.309

출판사 리뷰

수백 년만에 홀연히 나타난 관음상, 서산 부석사에 봉안될 수 있을까?

필자는 2013년 1월 대마도에서 일어난 부석사 관음불상 도난사건이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을 때, 불상의 사진을 대하면서 지극히 자비스런 고려 관음불상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화상을 입은 몸으로 수백 년만에 홀연히 우리 앞에 나타난 이 불상은 그가 걸었던 기구한 행로를 암시하며 우리의 잊혀진 아픈 과거를 드러내는 듯했다는 것이다.
결가부좌하여 앉은키 50.5cm의 단아한 모습으로 보일락 말락 은은한 자비의 미소를 머금은 이 관음 불상은 그가 태어나서 수호하려는 시대는 이미 오래 전에 멸망했지만 그 자신은 살아남아 예전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화상으로 그을린 두 뺨과 녹아 버린 손가락 끝, 때가 낀 온 몸, 훼손된 가사 소맷자락에 더하여 관음보살이 당연히 써야 할 보관은 벗겨졌고,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또한 망실된 채 초라한 행색으로 나타난 불상의 모습은 그간 이 불상이 겪었을 기구한 여정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었다. 이제 그의 출현과 더불어 끓어오른 여론의 물의는 그의 앞으로의 행로 또한 쉽지 않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관음불상의 기구한 운명을 ‘관음상의 눈물’으로 책 이름을 지었다.
이 불상은 1330년 서산 마을의 평범한 주민 32명이 관세음불의 연민과 자비에 의해 그들이 처한 당대의 화란(禍亂)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간절히 빌며, 서산 부석사에 영원히 봉안했다는 내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이 불상은 아름다운 고려불상이라는 예술적, 종교적 존재를 넘어 그가 아니었다면 후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서산의 이름 없는 서민들의 삶의 편린과 그들과 대마도의 유일한 관계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역사적 가치가 큰 귀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1350년 왜구의 대대적인 침입이 시작되면서 고려가 망할 때까지 500여 회, 조선 초에는 150회의 왜구의 침구가 있었다. 서산은 고려 말 최소 5번의 침구를 받았다. 필자는 부석사 불상의 약탈증거로 불상의 복장물에서 나온 결연문, 왜구의 서산 약탈을 기록한 《고려사》, 화상을 입은 부석사 불상을 꼽는다.
이 불상은 1970년 처음 그 존재가 알려졌을 때부터 대마도 왜구에 의한 약탈물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1370~1380년간 서산을 수차례 약탈한 왜구의 존재가 아니라면 서산 부석사의 불탄
관음불이 대마도에 존재하는 이유를 그 누구도 상식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이 기증이나 매매로 대마도에 건너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과거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서산 주민들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집필하며 고려 말 우리는 이 불상을 지켜 주지 못했지만, 675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또다시 이 불상을 지켜 줄 수 없을 것인지 줄곧 자문해 왔다고 한다. 그때는 무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약탈당했지만 지금은 법의 이름으로 건네주어야 할 것인가? 물론 필자는 이 불상이 왜구에 의해 약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가 소유해야 한다는 단순 논리를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지금 우리의 문화재를 정당하게 지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보는 긴 호흡이 필요한 시점임을 주장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법을 내세워 과거 역사를 지워 버리려는 작금의 일본의 행태에 대응해야 할 것임을 호소하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접점에 위치한 대마도에 고려불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치부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마도를 막연히 한국과 일본의 중개지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한국과 대마도는 어떠한 관계였기에 불탄 한국불상 130여 구가 대마도 곳곳에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인터폴에 의뢰했던 한국 절도단의 대마도 불상 절취사건은 어느 틈엔가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사건으로 반전되며, 과거 수백 년 전부터 한국 문화재를 약탈했던 일본의 오랜 전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되었다. 대마도 작은 섬 안에 백 수십여 구의 한국 불상이 우글거린다는 것은 일본인들도 잘 몰랐던 사실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불상이 화상으로 훼손되었고, 또한 대마도로 건너간 경위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대마도 불상은 대마도의 ‘수상한 과거’를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대마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인들의 혁혁한 해외진출의 원조가 되는 전설적인 왜구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간논지 관음 불상 도난사건이 야기한 중대한 당면 문제는 그간 한일 양국 간에 신경전을 벌여 왔던 일본의 한국 문화재 약탈 규모를 크게 늘려 놓은 결과가 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나 임진왜란보다도 2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서 14세기 고려 말부터 자행된 일본의 조직적인 한국 문화재 약탈 전력이 만천하에 모습을 드러내며 드디어 양국 외교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서산 부석사를 중심으로 조계종, 부석사 신도회, 서산 주민들, 시민단체 대표들은 잇달아 성명을 발표하고, 650년 만에 이 불상이 한국에 귀환한 것을 환영하는 한편, 발 빠르게 ‘부석사 불상제자리 모시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우리 정부에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조성되어 봉안된 이 불상이 일본으로 반출된 경위와 대마도 간논지에서 입수하게 된 경위를 철저히 규명할 것을 요구했다.
2013년 1월 31일 서산 부석사는 사건을 담당한 대전지방법원에 우리 정부를 상대로 불상의 반환을 금지하는 가처분 소송, 정확한 법률용어로는 ‘유체동산 점유이전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2013년 2월 25일 대전지방법원 민사부는 다음과 같이 가처분 신청을 수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 따라 불상은 부석사가 보관 장소로 지정한 대전국립문화재연구소 수장고에 이전되어 보관 중이다. 우리 정부는 가처분 재판이 최종적으로 판결되기 전까지 불상을 일본에 넘기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630~640여 년 전에 일어난 약탈사건인 만큼, 현실적으로 오늘날 사법판단의 대상이 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 간논지 측은 불상이 약탈된 이래 수백 년간 계속하여 불상을 무사히 점유해 왔기 때문에 당연히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다. 이에 반해 부석사 측이 약탈된 불법문화재임을 근거로 관음사의 소유권에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법적 난관이 크다.
우선 국내법상 또는 국제법상 수백 년 전의 사건을 사법재판에서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제한의 시효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이 모두 가입하고 있는 국제협약으로서 불법문화재 반환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 협약에는 문화재 반환소송을 위한 시효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 협약은 소급효가 없으므로 1970년 이후에 불법 반출된 문화재만을 다룬다. 따라서 이 협약에 근거하여 한국은 부석사에서 약탈당한 불상의 회복을 요구할 수 없지만, 일본은 이 협약에 근거하여 간논지에서 도난당한 불상의 반환을 한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법적으로 문화재 반환소송과 관련하여 2014년 독일의 바바리아 주 정부는 제2차 대전 중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의 소송에서 일반적으로 30년 정도 인정되는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안을 검토 중이다. 독일의 예는 다른 나라의 문화재 소송에도 큰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어 국제적으로 문화재 소송의 공소시효와 관련하여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필자는 이것이 반인도범죄, 전쟁범죄 등에 대해서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국제사회의 변화된 의식이 나치의 문화재약탈 범죄처리에 반영된 결과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와 대마도의 1000년 교류사를 기록한 국내 최초의 책

필자는 서산 부석사 관음불상을 약탈해간 왜구의 실체에 대해 역사적 《고려사》 등 역사적 사료를 통해 고증을 시도하고 있다. ‘왜구’ 하면 흔히 일본인 해적이나 약탈자를 총칭하는 말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왜구는 한 시대의 현상으로서 역사적 용어이다. 그것은 ‘14~16세기에 걸쳐 200~300년 동안 한반도와 중국 연안의 해상에서 또는 육지에 상륙하여 약탈과 납치,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던 일본인 해적단’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시기를 한정하지 않고, 극심한 약탈과 방화를 일삼은 일본인 해적이나 침략자를 총칭하여 왜구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구는 진구 황후의 8개의 깃발(八幡), 즉 하치만 전설에서 유래한 하치만 보살 깃발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왜구를 바한센(八幡船)이라고도 부른다.
왜구를 단순한 해적이나 침략자가 아닌 엄격한 의미의 왜구, 즉 역사적 존재로서 14~16세기 활동한 대규모 일본인 해적단으로 한정한다면, 왜구는 크게 보아 두 종류이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한반도를 약탈했던 왜구와 그 이후 명나라 중기부터 임진왜란까지 명나라 밀무역상인들과 결탁하여 중국 연안을 침구했던 왜구로 나눌 수 있다.
부산에서 50km도 채 안 떨어진 대마도는 수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오래된 우리 문화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는 우리 옛 문화의 유적지이다. 또한 대마도는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생명을 부지 하며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와는 파란만장한 애증의 역사를 함께 엮어온 우리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한반도와 대마도의 1,000년의 교류사를 기술하고 있다. 고려말 왜구의 준동에서부터 세종의 대마도 정벌, 삼포왜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을 거치면서 벌어진 대마도와 연관된 역사적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필자는 대마도 현지 취재를 통해 대마도의 유명한 신사의 안내판에는 고대(古代)의 가공인물인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이야기는 버젓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대마도가 자랑하는 다수의 국보급 한국 문화재가 대마도로 건너간 경위에 관하여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과거의 역사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부석사 불상 문제가 한일 양국과 대마도가 공유해 온 구체적인 역사의 한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필요하며, 그 연장선에서 부석사 불상 문제의 이해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한반도와 대마도의 깊고 험난했던 교류와 역사를 재조명하려고 했다.
대마도에 있는 국가지정 중요 유형문화재(국보급) 7점 중 6점이 한국 관련 문화재이며, 나가사키현 지정 유형문화재 27점 중 18점이 한국 관련 문화재이다. 또한 대마도에서 자체 지정한 유형문화재 70여 점 중 한국 관련 문화재는 반수 이상을 점하고 있다. 그 밖에도 드러나지 않은 개인 소장 한국 관련 문화재를 감안한다면, 대마도에 존재하는 한국 문화의 밀도는 상당한 수준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 관련 문화재의 많은 부분, 특히 불탄 불상들은 대부분 출처나 전래 경위가 밝혀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문화재이지만, 대마도와 나가사키 현의 문화재 담당자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한 도시가 이같이 수상한 외국 문화재를 대거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오늘날 매년 15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 관광객이 대마도를 찾는다고 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섬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했던 대마도에 오늘날에도 한국인이 최대 관광객이 되어 대마도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국과 대마도의 관계에서 변치 않는 한 가닥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대마도 주민들은 한국과의 농밀했던 과거 관계에 무심한 표정일 뿐이다. 필자는 한국과 관련된 대마도의 역사, 문화의 소개에는 소극적이거나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더욱이 대마주민들이 한국인 관광객들에 대해 우호의 감정보다 때로는 이들을 성가신 존재로 보는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음은 유감이라는 것이다.
대마도는 거리가 가깝고,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더하여 한국 관련 역사와 문화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원시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대마도는 나가사키현 중에서 나가사키시 다음으로 문화재가 많은 문화도시로, 압도적인 부분이 한국과 관련이 있다. 대마도 자체 제작이나 일본 본토로부터 전래된 문화재가 극소수라는 사실은 일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대마도의 특이한 현상이다.
더구나 이들 문화재는 대부분 적절한 관리 하에 놓이지 않고 신사나 사찰에 방치되어 장기적으로 훼손되거나 유실될 위험이 크다. 이것은 단지 대마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은 우리 문화재의 훼손이나 유실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우리로서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마도의 입장에서도 문화재의 유실은 대마도 역사의 유실로 이어질 것이며, 결국은 대마도가 그토록 공을 들이는 문화와 관광산업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것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외국 어느 도시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한국 문화재의 소장처인 대마도에 이제는 ‘한국문화원’과 같은 기관을 두어 대마도와의 진지한 문화적 대화를 추진해야 할 시점이라고 제안한다.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 대마도에 존재하는 한국 문화재의 유래 근거를 밝힐 수 있는 조사를 진행하여 이들 문화재의 역사적 가치를 회복시키고 아울러 이들 문화재에 대한 적절한 보호와 관리 조치를 강구할 필요성은 양측 모두에게 절실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에필로그에서 대마도에서 중점적인 역사, 문화 탐방을 위해 다음과 같은 관전 포인트를 소개한다.첫째는 원시림 깊은 산속에 묻힌 대마도 원시신앙과 고신도의 모습이다. 둘째는 니타만, 미네만, 아소만에 분포한 선사시대 및 고대의 고분 유적이다. 셋째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패주한 왜군과 백제유민들이 신라의 대마도 토벌에 대비하여 아소만 조야마에 쌓은 가네다조(金田城), 1274년 대마도를 초토화했던 여몽 침공군이 상륙했던 대마도 서남해 고모다(小茂田) 해안, 13~14세기 고려를 침구한 왜구의 소굴이자 1419년 세종의 대마도 정벌의 현장인 아소만, 1900년 러·일전쟁을 앞두고 아소만 동단을 뚫어 대마도 서안과 동안을 연결하는 길이 500m의 만세키(萬關) 운하 등이 있다.
넷째는 대마도가 조선과 조공무역 체제에 들어가 왜구의 길을 청산하고 새로이 대마도를 건설했을 때의 유적이다. 대마도주가 처음으로 왜구의 소굴인 아소만을 떠나 1408년 정착했던 마을인 사카(佐賀)의 엔쓰지(円通寺)가 있고, 사카 남쪽의 고부네코시(小船越)에 538년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온 백제 사절 일행이 일시 머물던 곳이라 하여 일본 최고의 사찰이 있었다는 자리에 사카 시대에 세운 사찰바이린지(梅林寺)가 있다.
다섯째는 긴세키조(金石城) 등 대마도 중심지 이즈하라(?原)의 임진왜란 이전의 유적과 문화재이고, 여섯째는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가 조선과 일본의 통신사 업무와 교역을 독점하면서 10만 석 영주국으로 부상하며 재단장한 이즈하라 일대의 모습이다. 후추조(府中城)와 조카마치(城下町)는 구한말 면암 최익현 등 항일의병의 지도자 11인이 1~3년간 유폐된 곳이기도 하다. 반쇼인(萬松院)은 이즈하라 시미즈산 아래 임진왜란 시기 대마 도주로서 왜란 이후에는 조일 수교를 이끌어낸 최초의 대마 번주(藩主)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원찰 반쇼인과 역대 대마 번주들의 무덤이 있다.
일곱째는 대마번 해체 이후 유적인데, 대표적인 것이 덕혜옹주와 항일의병들의 유적이다. 덕혜옹주 유적은 아쉽게도 별로 없다고 한다. 1931년 옹주 부부가 대마도를 방문했을 때 공식일정은 긴세이칸(金石館, 도의 공공연회 장소)에서 열린 대마도민 환영회 참석과 군부대 방문이 있으며, 옹주는 사지키바라의 부근의 대마여학교(지금의 대마여고)에서 기념식수를 했다 한다. 오늘날 대마도 역사자료관 근처에는 일제 강점기 대마도에 거주했던 한국인들이 세운 덕혜옹주 결혼봉축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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