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책을 펴내며
한기택, 그는 누구인가 부장님은 어디 가셨나 저, 여기 있습니다 나의 꿈은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 나는 나같은 놈들과 싸우고 싶다 목숨걸고 재판하다 사랑 수축 김홍섭과 한기택 파편 한기택의 글 모음 일기 편지 추모의 글 연보 법률논문 목록 |
|
목숨 걸고 재판하다
“동료가, 선배가, 후배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그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한마디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내가 현 시대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떠난 그가 불쌍한 것이 아니라 그 없이 살아야 할 우리가 불쌍하다.”(김종훈 대법원장 비서실장) “당신이 가고, 저는 살아서 이렇게 부끄럽습니다. … 당신은 언제나 조용조용하게 우리에게 말하였고,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치열하고, 치열한 정점에서 사는 것만이 진실이며 정답이라고요.”(강금실 전 법무장관) 동료 법조인들이 그의 죽음에 부쳐 남긴 말들이다. 매사에 쉴새없이 성실하고 철저했던 사람으로 한기택을 기억하는 동료들은 살아생전 그를 ‘목숨 걸고 재판하는 판사’로 불렀다. 스스로도 중견 법관이 된 뒤부터 “목숨 걸고 재판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엄격했던 한기택의 판사로서의 자질은 중학교 시절부터 빽빽이 써온 그의 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누가 나에게 ‘네가 뭔데 시건방지게 남을 재판하려는 거냐?’고 물을까 겁이 난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게 되고 싶다.”(197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일기 중에서) “법률 종합병원 의사들의 다짐. ①우리는 이 민족과 민중에 빚진 자들이다. ②우리는 법으로부터 소외된 채 무법의 황야에 버림받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법을 통하여 빚을 갚고자 한다. ③우리는 민중을 외면하는 병든 법을 바로잡아 생명이 있는 참된 법을 찾고자 한다.”(1980년 사법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당시 일기 중에서) 한기택은 판사가 되어서도 이처럼 끊임없이 회의하고 비판하는 초심을 견지했다. 스스로에겐 그토록 치열했지만, 동료들이 전하는 그는 투사라기보다는 합리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이상에 가장 가까운 쪽으로 행동하며 조금씩 세상을 바꿔나가는 행동가였다. 그렇기에 1988년 제2차 사법파동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당시 한기택, 황의인, 김종훈, 유남석, 이광범 등은 노태우 대통령이 김용철 대법원장을 재임명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작성, 전체 법관의 절반에 가까운 430여 명의 서명을 이끌어내고 김 대법원장의 유임을 막았다. 당시 한기택이 쓴 ‘온건’하면서도 ‘자성’에 초점을 맞춘 성명서 덕분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사법부 명예혁명’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법파동에 뜻을 같이했던 판사들은 이후 ‘우리법연구회’를 만들었고, 한기택은 죽기 직전까지 애정을 쏟아 이 모임을 이끌었다. 그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대법관 박시환은 판사 한기택을 추억하며 되묻는다. 그는 자기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해 어떤 꿈을 꾸었을까? 여기 한기택이 남긴 판결을 보면 그 꿈의 단면을 엿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002년 5월에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자살한 육군 모 포병부대 이등병 엄모 씨에 대해 “가혹행위 때문에 목숨을 끊은 것은 직무수행과 관련이 깊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2003년 3월에는 한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배우자가 중국에 두고 온 성인 자녀를 한국에 초청하는 것을 법무부가 막는 것이 헌법에 보장된 평등권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2004년 9월에는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는 현행 규칙은 장애인에 대한 국가의 보호의무를 규정한 헌법에 따른 것이며 국가가 시각장애인의 생계를 실질적으로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 제도가 부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 비장애인의 ‘직업 선택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그것인 시각장애인의 ‘생존권’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고 판결하기도 했는데, 최근 헌법재판소가 이 판결과는 달리 문제의 규칙에 대해 위헌성을 인정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반면 고위공직자나 정치인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결을 내렸다. 2003년 2월 고위공직자의 재산등록 때 해당 공직자의 직계 존비속이 재산등록을 거부할 경우 거부 사유와 거부자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판결했으며, 2004년 4월에는 재벌가의 딸이 결혼 축의금 2억 1000만원에 대해 부과된 증여세를 취소하라며 낸 소송에서 “증여세 부과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그가 남긴 판결들에는 사회적 소수자들이 받는 차별과 그들의 권익 보호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소신이 담겨 있다. 재판장 한기택이 더욱 그리운 이유다. 사랑과 청빈과 고독 속에 살다 가다 한기택에 대한 기억을 모으며, 남은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한기택에 대한 본질적인 평가는 ‘목숨 걸고 사랑했다’는 데에 있다고. 재판도 그런 사랑의 한 대상이었을 뿐. 부인 이상연과 연애시절에 주고받은 수백 통의 편지도 전설이거니와, 화 한 번 내지 않는 남편이자 아빠로서 가정에서도 한결같이 성실하였다. 부부끼리 절친한 사이인 이광범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의 부인 김매지 씨는 “두 사람은 진정한 사랑과 존경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줬다”고 전한다. 그렇게 사랑했던 가족에게 관용차를 1m도 태워주지 않을 만큼 엄격했던 한기택은 흰 고무신에 도시락 봉투를 들고 법원에 출근했던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한국 법원사에서 가장 고결하게 살다간 사도법관(使徒法官)으로 알려진 김홍섭과 마찬가지로 한기택도 평생 죄인이 죄인을 재판하는 것을 고뇌했고,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 끊임없이 기도했다. 사랑과 청빈과 고독 속에서 살다가 한 줌 재로 하늘의 문에 들어간 그들이 오늘날 여전히 법과 씨름하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기억하는 자들의 몫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