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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의 역사상은 허구
2. 기자동래설은 중화주의자들이 조작했다 3. 임나일본부는 가야의 왜 통제기관 4. 광개토왕비문의 왜는 한반도 남부 세력 5. 한일 기마민족설은 역사적 상상력의 산물 6. 신라는 삼국을 통일할 뜻도 능력도 없었다 7. 훈요십조는 조작되지 않았다 8. 전근대시대엔 지역차별이 없었다 9. 미륵사상은 체제변혁사상이 아니다 10. 실학은 조선왕조체제 유지 위한 보수개혁사상 11. 조선 후기에 신분제는 해체되지 않았다 12. 동학농민봉기는 반봉건 근대적 운동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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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에 가면 '애구지'라 불리는 구릉지가 있다. 구지로에서 김해 공설운동장 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구릉지인데, 주변에는 김해패총, 수로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구릉지가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1~5세기경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무려 1백여 개나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대성동고분군이라 불리는 이곳에는 3세기 후기에서 5세기 초에 조성된 가락국의 왕릉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90년 발굴을 시작하자, 환두대도 등 무기류와 갑주류 등 기마관계 유물, 그리고 파형동기, 벽옥류 등 왜 계통의 유물이 출토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인 학자 에가미 나미오의 흥분 그런데 여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있었다. 1948년 '북방 기마민족에 의한 일본열도 정복설'을 발표하여 일본 사회에 충격을 주었던 일본인 에가미 나미오였다. 그는 1991년 이곳을 답사한 뒤, 이곳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들은 자신의 학설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자신의 가설에서 실증하지 못한 유일한 약점이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한지역에서 기마민족에 관한 고고학 자료였는데, 대성동고분군의 발굴 조사로 자신의 학설이 완벽하게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발굴조사로 몽고지방으로부터 만주 ·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에까지 뻗친 기마문화의 연결고리가 마침내 충족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그의 학설을 입증해주는 것일까. 일본 학계에서조차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는 그의 학설이 새삼 문제시 되는 것은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 '한국판 기마민족설'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3세기 말경, 북방의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했다는 '부여족 남하설'과 기마민족이 신라를 정복했다는 이른바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이 그것이다. 이러한 학설들은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일까. 먼저 원류격인 에가미의 '기마민족설'부터 따져보자. 일본을 놀라게 한 기마민족설의 근거들 에가미의 주장은 간단하다. 북방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건너가서는 야마토 정권을 성립시킨 주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마민족을 내륙 유라시아에서 동북아시아까지 존재했던 흉노, 돌궐, 선비, 오환 등 유목민족이라고 했다. 물론 우리 고대의 부여족과 고구려족도 포함시키고 있다. 그는 이 기마민족들이 중국 남북조시대인 3~5세기 무렵에 스키타이계 기마민족문화와 다른 또 하나의 기마민족문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호족문화와 한족문화의 혼합인 '호환문화' 혹은 '중국화된 호족문화'이다. 이들의 특색은 기사의 전법과 이에 적합한 마구, 무기, 복장, 갑주 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고 했다. ---pp.10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