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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중국사를 들여다보기에 앞서
-공자와 맹자의 차이 그 시대성 -진시황. 역사적 추세를 따르다 -기원전의 경제인. 이괴의 계획경제 -기원전 90년의 사마천. 서기 90년의 반고 -문경시대의 치세. 그 새로운 해석 -한무제식 권력 유지법 -"성인" 곽광과 "찬탈자" 왕망의 차이 -왕망 개혁의 진실 -전한과 후한. 그 갈림길 -군사적 천재 광무제의 모자란 생각 -환관. 황후. 외척. 붕당 -위진남북조와 낭만주의 -오랑캐가 나라를 어지럽힌 장기 분열의 비극 -비수의 전투. 350년 위진남북조를 열다 -천하를 다시 하나로 북위의 척발씨 -분열에서 통일로 수당제국의 등장 -망국의 군주 수양제 -모범적 치세. 당태종의 정관시대 -비정한 독재자 측천무후 -쇠락의 전주곡과 깃털 양귀비 -문관과 무관의 불협화음. 안사의 난 -번진이라는 화근 -어부지리의 재앙. 황소의 난 -5대10국 중국역사상 최악의 시대 -송태조 조광윤이 세운 무혈의 전통 -수치스러운 화의. 전연의 맹약 -시대를 앞선 개혁. 왕안석의 변법 -황제가 잡혀간 사건. 정강 연간의 수치 -가사도. 희대의 간신으로 기록되기까지 -국가발전의 사상적 걸림돌. 도학가 -칭기즈칸과 쿠빌라이 -쿠빌라이가 남긴 전통. "한지붕 세가족"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 ■ 에필로그 - 세계는 생존자에게 속해 있다 ■ 황인우 교수 특별 취재기 / 생활속에서 우러난 역사관 황인우 저작 목록 |
Ray Hung,黃仁宇,황런위
權重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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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와 맹자의 차이, 그 시대성
-200년이란 시차가 가져온 사상적 차이 ;유가사상의 두 축이라 할 공자와 맹자의 사상적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통은 두 사람의 개인적 성격, 또는 개인적 수양 정도의 차이 등을 가지고 설명하지만, 저자는 두 사람이 각각 살았던 시대를 통해 이 답을 구한다. 그래서 공자의 보수적 경향과 맹자의 혁명성은 그들이 살았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사회상황과 밀접히 연관돼 있음을 밝힌다. ♠진시황, 역사적 추세를 따르다 -물길을 터서 중국을 통일하다 ;'폭군' 진시황은 어떻게 중국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했을까? ->지금까지 진시황의 개인적인 성격이나 능력에 초점을 맞춰 진시황의 중국 통일을 설명해왔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무렵, 중국의 기후 및 지리, 정치적 요건은 통일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성숙해 있었다. 따라서 진시황은 다만 이러한 역사적 추세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고, 그 결과물이 최초의 중국 통일이었다는 주장을 내온다. ♠군사적 천재 광무제의 모자란 생각 -"작은 적을 두려워하고, 큰 적을 만나면 용감했다" ;광무제 유수는 한왕조를 중흥한 것인가? ->광무제 유수는 유씨의 한나라를 중흥하여 후한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그러나 유수가 건설한 제국은 진정으로 한왕조를 중흥한 것인가? 저자는 당시 반란이 일반화된 사회상황 속에서 유수는 놀라운 군사적 운용능력을 발휘하여 중흥주가 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인구의 격감과 전통의 파괴라는 현실 앞에서 유수는 과감히 중앙집권을 포기하고, 화폐경제를 강화하여 물자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등의 대개혁을 단행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환관·황후·외척·붕당 -한나라 멸망의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한나라 400년 왕조가 환관과 외척 때문에 망했을까? ->전후한에 걸쳐서 400년을 이어온 한왕조가 망한 이유에 대해 일반적으로 환관과 태후 및 외척과 붕당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실제 역사의 진행과정을 살펴볼 때, 이러한 문제들은 한왕조가 망하기 전에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한왕조가 망한 더 근본적인 이유는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에 부흥하지 못한 한의 정치체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정한 독재자, 측천무후 -"어찌하여 남자 첩을 두지 못하는가" ;고종의 황후로서 자신의 아들들을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던 측천무후는 과연 '악녀'였을까? ->자신의 아들인 중종과 예종을 폐위시키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왕조의 이름도 주(周)라고 고치고 50여 년간 중국을 통치한 측천무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저자는 측천무후가 처했던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그에 대한 평가를 이끌어낸다. 중국의 전통적인 황제의 성격을 이해한다면, 당시의 상황은 측천무후와 같은 강력한 통치자를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쇠락의 전주곡과 '깃털' 양귀비 -당나라가 양귀비 때문에 망했을까? ;현종의 사치한 생활이 나라를 망치게 했을까? ->보통 당제국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안록산이 어양에서 전고를 울리며 반란을 일으킨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현종이 양귀비에게 빠져서 정치를 잘못한 것이 이 반란의 원인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현종의 중앙정부가 전통적인 통치방식을 벗어나서, 통치공식을 만들고 이를 강제로 하부로 확대 적용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관료들의 반발이 당을 기울게 했다고 주장한다. ♠칭기즈 칸과 쿠빌라이 -"인생의 가장 큰 쾌락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있다"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는 중국사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할까? ->송왕조와 명왕조 사이에 있는 원왕조는 중국사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 몽골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 칸은 사실 중국 땅에 한번도 발 디딘 적이 없는데, 원나라 역사에서는 그를 태조라고 했다. 저자는 이러한 원대를 중국사의 입장에서 살펴보면서, 이 시기가 이전의 제2제국의 개방성과 이후 제3제국의 수렴성을 동시에 갖춘 과도기적인 시기였다고 설명한다. ♠쿠빌라이가 남긴 전통, '한 지붕 세 가족' -"이 일은 너희 몽골인은 모른다" ;쿠빌라이는 중국에 어떤 전통을 남겼을까? ->쿠빌라이는 몽골인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와중에 중국으로 들어와서 실제 원왕조를 건설한 사람이다. 그는 칭기즈 칸이 남긴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고, 자신이 장악한 중국의 원래 전통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넓은 시각으로 본다면, 그는 당나라 말기 이래로 분열된 동북아지역을 통일하고, 동시에 초원지대와 농업지대라는 생활방식이 다른 두 지역을 동시에 통치한 사람이다. 그리고 칭기즈 칸 같은 잔혹한 해외원정 방법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전통을 남겼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 -군주가 타락하면 나라가 망한다? ;원나라가 순제의 무능과 타락 때문에 망했을까?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재위 중에 명왕조의 주원장에게 쫓기어 막북으로 달아났다. 그래서 전통시대의 사가들은 원왕조의 멸망 책임을 그에게 돌렸다. 그러나 원왕조의 멸망을 황제 한 사람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단견이다. 그리고 순제는 오히려 원의 중흥을 꾀한 군주이다. 원왕조의 멸망을 거시적으로 보면, 몽골족의 유목적 관습과 중국인의 농경적 습관의 차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 등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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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황의 서술태도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서술태도를 네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우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논의를 이끌어낸다. 만리장성 이야기를 할 때는 낙양에서 관광한 얘기에서 시작하고, 자신이 미국의 뉴 폴츠란 곳에서 경험한 내용을 들어 자본주의의 본질에 접근한다. 또 만주 일대의 풍경에서 쿠빌라이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리하여 독자로 하여금 쉽게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게 한다. -둘째로 그는 일개인이나 특정 사건에 역사적인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물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개인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사건이나 개인 때문에 어떤 결과가 빚어졌다는 식의 논의는 철저히 배제한다. 따라서 현종이 양귀비와 놀아나느라 당나라를 망쳤다는 식의, 도덕적인 잣대로 역사를 판단하는 시각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는 역사를 전체적인 안목으로 조망한다. 따라서 당나라 멸망의 원인도 양귀비나 당현종이 아닌, 당시 당왕조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는다. -셋째, 그의 거시사관은 한 가지 사건을 논할 때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전후 시대와 그 사건을 둘러싼 동서남북의 사회·지리·문화까지 두루 살피는 것이다. 가령 진시황이 기원전 3세기라는 이른 시기에 중국 전체를 통일한 것은 그의 개인적인 능력이 탁월해서라기보다는, 중국의 기후와 지리적인 요건 및 조숙한 정치사상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는 주장이다. 진시황은 다만 이런 자연스러운 역사적인 추세에 따라 중국을 통일했을 뿐이다. 황인우 교수의 종합적 시각은 영웅사관을 탈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역사학의 일반적인 고려 범위를 지리와 과학으로까지 넓혀놓았다. -넷째로 그의 거시사관은 국제성을 띠고 있다. 그는 역사학이 세계가 한집안이라는 정신 아래 동서양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그 사이에 놓인 편견을 없애는 데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예를 들어 원나라는 중국사 안에서 보느냐, 아니면 세계사 안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주제가 달라질 수 있는 사료이다. 칭기즈 칸과 그의 후예들은 13세기에 유럽과 아시아를 뛰어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이들에게 수치를 당했던 유럽인들은 아직까지도 몽고를 중국민족 전체와 연결지어 비난한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 '북방의 소수민족'과 자신들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레이 황은 이러한 논쟁을 뛰어넘어 칭기즈 칸이란 정복자를 만들어낸 당시 중국과 유럽의 역사적 상황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구성해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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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사적 시각으로 풀어낸 새로운 중국사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은 변화하지 않는다. 변화하는 것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레이 황은 역사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서 역사자료를 선택하거나 그 인과관계를 배열하는 것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따라서 과거 사실을 배열하는 작업에서 역사가가 담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동시대 사람들의 입장에서 역사를 해석하는 일이다. 레이 황은 과거 중국의 역사책은 전통적인 관료정치의 시각으로 편찬되었고, 현대 역사책은 자본주의를 경계해야 할 노선으로 보는 계급투쟁의 입장에서 씌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사회의 전 조직을 상업화하고, 숫자로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나고 있다. 이 말은 곧 이러한 변화된 시각으로 중국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레이 황은 중국인들이 지난 2,000년 동안 만들어놓은 정치·경제조직 및 문물에 대한 자부심은 그대로 유지한 채, 이 과정에서 발생한 잘잘못을 '멀리 넓게 보는' 거시사적 시각으로 유장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역사학을 아우르는 한 시대의 읽을 거리 대만의 원로 역사학자 타오시성은 레이 황, 곧 황인우의 작업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황인우 박사는 몇몇 인물과 몇 가지 사건을 선택하여 뜻 가는 대로 써내려갔지만, 역사 속의 사회와 정치·경제·사상을 마치 한 줄로 꿴 염주같이 계속 이어가기 때문에 독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마치 염주를 한 알 한 알 헤어가듯 차마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오늘날 문학과 역사학에서 한 시대의 읽을 거리로 팔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레이 황의 이러한 매력에 독자들이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옮긴이의 상세한 주석과 더불어 각 장의 첫머리에 그 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해놓아 설령 중국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은 왜 일찍이 자본주의를 실행하지 못했을까? 이 책을 통해 레이 황이 독자들에게 궁극적으로 던지고 있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중국사 안에서 찾아낸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본주의의 본질을 고려하지 않은 채 중국의 자본주의를 논한 오류를 먼저 지적한다. 그는 국가체제를 거쳐서 모든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만 자본주의가 형성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종교와 신앙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절대로 천천히 발육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결국 뼈를 깎는 개혁 없이는 자본주의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은 자본과 물자의 소통이 어려운 대륙국가로서, 수천 년 동안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해왔기 때문에 자본주의로의 개혁이 여타 유럽국가에 비해 더 어려웠다. 하지만 반드시 중국역사 속에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부정적인 요소들도 역사 발전에 공헌했다는 것이 레이 황의 주장이다. 이 주장과 관련하여 그가 내세우는 개념이 '장기간의 역사적 합리성'이다. 중국역사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자본주의의 전제요건이라 할 '숫자를 가지고 사회를 관리하는 상태'로 변화해왔으며, 그 결과 현재 중국은 "비가 오고 나서 맑게 개인 상태"라고 레이 황은 보았다. 역사를 멀리 떨어져서 넓게 본다는 것 레이 황의 저술태도는 그가 주창한 거시사적 역사서술법과 깊이 연관돼 있다. 그는 최근까지도 역사서술의 주류가 되고 있는 미시사적 역사서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제기하고, 그 대안으로 '거시사(巨視史, Macro History)'적 역사서술을 제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주장한 거시적 역사관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장기간을 대상으로,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시야를 넓게 하는 태도로 새롭게 역사를 검토"하는 것이다. 레이 황은 자신의 역사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즉, 작자와 독자는 역사 속 인물들이 똑똑했는가 어리석었는가, 잘했는가 실패했는가 비교하는 단기적이고 단편적인 시각에 머물러선 안 된다. 역사를 보는 중점은 과거의 역사와 지금 우리의 처지를 상호간에 비교·검증하는 데 있지, 단지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일로 제목을 잡아서 작가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있지 않다. 당시의 사회 윤곽을 그리는 데 최선을 다하면, 비록 자료에는 많은 차이가 있어서 가지런하지 못해도,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철저히 실제 경험에 뿌리내린 역사관 레이 황은 기존의 역사관은 상층구조에 국한된 관점을 갖고 있어서, 정책을 비교하거나 인물을 비평하면서 그것을 하층의 역사현상과 대조해보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이런 편파적인 역사관이 수많은 역사적 맹점들을 생산해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몸소 체험한 10여 년간의 군대생활이 그에게 농촌으로 들어가서 하층사회를 경험하고, 역사를 관찰하는 시야를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고 밝혔다. 사실 레이 황은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헤쳐온, 또 자신의 힘겨웠던 인생역정을 토대로 학술적인 업적을 쌓아온 보기 드문 학자로 손꼽힌다. 그 결과, 레이 황은 일부 지식층끼리만 공유하고 끝나는 '자위적' 학문 태도를 철저히 배격해왔다. 그는 생전에 "내가 쓴 역사는 대부분 통속적인 것이다. 그러한 내용이 내가 공헌할 수 있는 부분이고, 아울러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라고 공공연히 밝히곤 했다. "중등교육을 받은 독자면 내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비롯하여 레이 황의 저작들은 확실히 기존의 학술논문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그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설정한 뒤, 그 길을 포장해가면서 도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진면모를 하나하나 복원해낸다. 그의 목표는 중등교육을 받은 정도의 독자들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 태도가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것을 계기로 기존의 역사기록 태도가 고쳐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레이 황의 거시사적 시각이 잘 드러나는 이 책에는 중일전쟁의 참상, 장개석과 모택동의 갈등, 군 제대 이후 미국에서 만학도로서 고생한 일, 자본주의 미국 사회의 진면목 등 그가 직접 듣고 목격한 이야기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책은 진정한 인생 경험 없이 사료에만 파묻혀서 써낸 저술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