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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벽두에 웬 무협인가?
“협객은 죽어도 기개는 향기로워 천하영웅이 부끄럽지 않다.”(縱死俠骨香 不慙世上英, 이백) '블랙코미디 무협'이라는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한국 무협계의 젊은 이단아 한상운의 신작 《도살객잔》이 도서출판 북앤피플에서 출간되었다. 《도살객잔》은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에 엽기와 패러디, 그로테스크한 코미디를 첨가해 무협의 전혀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하는 코믹잔혹 무협소설이다. 이러한 한상운의 작품경향은 작가가 의도했던 안 했던 간에 최근 문화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는 엽기와 코믹, 패러디의 세계가 작품 속에서 빠짐없이 드러나고 있어 신세대취향의 독자들과의 감성적 교감을 가능케 한다. 2001의 우리 문화계는 다양한 스타일의 엽기버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화계의 첨병이랄 수 있는 영화에서는 《신라의 달밤》이나 《엽기적인 그녀》가 젊은층의 절대적인 호응을 얻으며 흥행에 성공했으며 엽기토끼 등을 소재로 한 아동출판물, 《딴지일보》를 비롯한 각종 패러디 신문들, 컨셉트만화 '졸라맨 시리즈', '패러디가수 이재수의 활약' 등이 다양한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젊은층의 치기발랄하고 가벼운 문화유행은 30, 40대의 추억어린 향수를 자극해 새로운 스타일의 '신복고주의' 열풍을 불러오게 했다. 영화《친구》와 《번지점프를 하다》, 광고에서의 촌티 패션, 동창생 찾기 사이트인 '아이 러브 스쿨' 같은 문화현상들은 자연스럽게 이들이 가장 즐겨 찾았던 '무협'의 세계로 한층 폭넓은 문화유행을 일으켰다. 앞서의 다양한 문화욕구들을 등에 업고 최근 급속하게 번지고 있는 '무협' 컨셉은 만화·영화·광고파와 게임방 등 3파1방을 휘젓는 기세다. 《비천무》,《단적비연수》에 이어《무사》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흥행장르로 떠오른 가운데 광고에서는 동양제과의 '오감자, 춘추전국시대편', 대우자동차의 '마티즈, 경차지존편', 신세기통신의 '이소룡편' 등이 선보이고 있다. 또한 인터넷사이트에서도 '무협소설' 컨텐츠가 30, 40대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으며 최고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신세대들에게는 《조선협객전》을 비롯한《녹정기》, 《영웅문》,《신조협려》등의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처럼 무협이 다양한 코드로 변형돼 붐을 이루는 것은 서구에서 신화나 영웅에 기초한 판타지가 유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협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무협이 풍성한 이야기를 종횡으로 엮어 아시아적 콘텐츠의 '소재창고'로 성장할 수 있다는 데 그 무한한 저력이 있는 것이다. 90년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용대운, 좌백, 진산으로 대표되는 신무협은 평범한 주인공, 현실적인 스토리, 생생한 심리묘사, 역사적 배경과 문화에 대한 연구·고증을 바탕으로 한 묘사, 세련된 문체 등 이전의 무협소설과는 확연히 다른 수준 높은 작품을 통해 우리 무협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여기에 신세대취향의 코믹과 엽기 등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차용한 신세대 판타지 무협작가들까지 가세해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며 주류문화계로부터 '2류 문학'으로 취급되어온 무협장르를 당당하게 주류문학권으로 진입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 《도살객잔》은? 신무협과 신세대작가군의 혼합형이랄 수 있는 한상운의 특징은 스피디한 작가로 재담(才談)에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필체는 상당히 신세대적 사고를 반영한 것인데 무협에 대한 번뜩이는 재치, 기존 관념에 대한 의도적인 저항, 패러디를 통한 역설적 의미 표현 등은 한상운이 즐겨 쓰는 양식이라고 보여진다. 한상운의 무협관은 상당부분 재미에 있다고 추측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모적인 글쓰기를 택하진 않는다. 한상운의 적절한 평가는 동세대 작가들 특히 판타지 작가군보다는 한 수 위를 아우르는 솜씨에 있다. 즉, 글쓰기적 재지(才智)가 현재 한상운을 지탱하는 원동력이다. 《도살객잔》은 앞서의 문화코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액자소설'의 형식을 빌어 작가 나름의 실험적인 추리기법을 시도하고 있다. 즉 작품 속에서 금승위 수사관인 만화량의 사건을 추적해 가는 과정과 실제 살인현장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교차해서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사건현장에서 직접 사건을 목격하는 듯한 교묘한 착각을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다. 《도살객잔》의 결말을 통해 저자는 말한다. 인과응보와 사필귀정이란 진리가 21세기에도 통하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도덕 불감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진리와 윤리를 의심하는 냉소적이고 희극성 있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젊은이다운 반문을 보여준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현재 그가 믿고 있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무협'의 소재를 한차원 높였다는 극찬과 모호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혹평을 동시에 듣곤 하는 한상운의 이번 작품은 소설의 힘이랄 수 있는 재미라는 미덕과 사건의 개요(槪要), 그것에 얽힌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이 책의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