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권예리의 다른 상품
|
사람들이 기자를 만나면 심리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때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과 정반대다. 상식적으로 누구나 극도로 경계하고 조심할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무조건 믿고 성급하게 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저널리즘을 위한 만남에는 정신분석치료를 위한 만남처럼 퇴행 효과가 있는 듯하다. 글의 주인공은 기꺼이 작가의 아이가 돼 작가를 자기 요구를 다 들어주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어머니로 여기고, 그런 어머니가 자기에 대해 좋은 말만 하는 기사를 써주리라고 기대한다. 물론 기사를 쓰는 기자는 엄격하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절대 용서하지 않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 p.50 “거짓말은 악의를 품거나, 잘못인 줄 알면서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고, 비진실은 “실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의 일부”라는 왐바우의 구분은 보스트윅에게 자진해서 또 하나의 무기를 건네준 셈이었다. 그 덕분에 보스트윅은 최종변론에서 조롱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왐바우 씨의 증언은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거짓말과 비진실에 대한 그의 정의에 흥미를 느꼈고, 그가 정의한 방식에 배심원 여러분도 흥미를 느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저라도 거짓말하다가 들킬 때마다 ‘아, 정말이지 그럴 생각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나쁜 거짓말은 아니었어요.’라고 말하고 싶을 겁니다.” --- p.80 사회에서 기자들은 박애주의자들처럼 매우 가치 있는 것들을 나눠 주는 사람으로 여겨져서(기자의 화폐는 ‘명성’인데 이것은 묘하게 사람을 취하게 한다) 그들은 인간적 가치와 전혀 비례하지 않는 존경을 받는다. 실제로 누가 자기에 대해 글을 쓴다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요청할 때 황홀해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 p.85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의 행동이나 성격과 상관없이 자기 이야기를 할 뿐이다. 정신분석가를 다른 정신분석가로 대체해도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기자도 그렇다. 정신분석 치료를 받는 환자와 마찬가지로 인터뷰 대상은 작가와의 관계를 압도하고 주도한다. 정신분석가가 환자를 창조할 수 없듯이 기자는 인터뷰 대상을 창조하지 못한다. --- p.137 저널리즘에 진실성과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인터뷰 대상의 눈먼 자아도취와 기자의 회의주의 사이의 긴장이다. 인터뷰 대상의 이야기를 그대로 글로 옮겨 출판하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라 홍보 매니저다. (…) 논픽션 작가와 독자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미래에도 인터뷰에서 기꺼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은 차고 넘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희생 제물로 선택돼 가슴에서 심장을 도려낼 그날까지 쾌적한 안락과 사치 속에서 살았던 아스텍의 젊은 남녀처럼, 기자가 쓰는 글의 주인공들은 ‘와인과 장미의 나날’, 즉 인터뷰 기간이 끝났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기자가 전화를 걸면 여전히 인터뷰를 승낙하고, 자기 목에 떨어지는 칼날을 보게 될 때 여전히 경악한다. --- p.198 소설가는 논픽션 작가보다 더 많은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소설가는 자기 집의 주인이고 그 안에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아예 그 집을 무너뜨려도 된다. 그러나 논픽션 작가는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떠나라는 임대 계약서의 조건을 지켜야 하는 세입자에 불과하다. 가구를 들여오고 원하는 대로 가구를 배열하고 조용히 라디오를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집의 기본 구조를 건드리거나 건축 구조를 함부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 논픽션 작가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실존 인물만을 다루기로 독자와 계약한 상태이고, 그런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사실을 윤색해서는 안 된다. --- p.206-207 녹취록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우리는 모두 우리가 뜻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기를 극도로 망설인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말은 모두 ‘비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망설이다가 에둘러 말하고, 지나치게 반복하고, 앞뒤가 맞지 않고, 빈틈이 많고, 문장 구조가 꼬여 있다. 녹음기는 언어 현상에서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 그러나 이 세계는 저널리즘식의 대화가 이뤄지는 세계가 아니다. 기자가 인터뷰를 녹음한 인물의 말을 인용할 때는 독자는 물론이고 인터뷰 대상에게 그의 말을 산문으로 ‘번역’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대화를 들을 때 매순간 자동으로 해버리는 일종의 ‘편집’을 전혀 하지 않고 인터뷰 대상의 발언을 그대로 적는 기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또는 실력이 없는) 사람이다. --- p.210쪽. 저널리즘에서 ‘나’라는 인물은 ‘아무것도 지어낼 수 없다’는 저널리즘 규칙의 예외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기자가 쓴 글에 나오는 다른 모든 인물과 다르다. 저널리즘의 ‘나’라는 인물은 거의 순수하게 창조된 인물이다. 자서전에서 작가의 표상으로 등장하는 ‘나’와 달리 저널리즘의 ‘나’는 작가와 거의 관련이 없다. 말하자면 영화배우가 영화 속 인물과 관련 있는 정도와 비슷하다. 저널리즘의 ‘나’는 절대적으로 신뢰받는 서술자다. 그는 이야기를 진행하고 논지를 전개하고 글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어떤 목적을 위해 특별히 창조된 인물이며, ‘삶의 객관적 관찰자’라는 개념을 구현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그러나 독자는 소설의 화자가 작가와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저널리즘의 창조된 ‘나’라는 개념을 완고하게 거부한다. 게다가 기자들도 자기 글에 등장하는 ‘나’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 --- p.215 |
|
사건 개요
군의관이었던 제프리 맥도널드는 아내와 두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넘겨졌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로부터 9년 뒤, 군에서 제대하고 성공한 개업의로 일하던 그는 다시 기소되어 형사재판이 열렸고, 유죄 판결을 받아 투옥됐다. 르포 기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조 맥기니스는 그를 밀착 취재하여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문제는 맥기니스가 오랜 취재 기간 맥도널드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위선적인 친구 관계를 유지했고, 책에서는 본색을 드러내 맥도널드를 냉혹한 살인마로 묘사했다는 데 있었다. 처절하게 배반당한 맥도널드는 맥기니스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재닛 맬컴은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모두 인터뷰하고 자료를 정리하여 ‘기자와 살인자’라는 제목으로 『뉴요커』에 기사를 게재하여 언론의 본질과 기자의 도덕성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사를 바탕으로 바로 이 책, 『기자와 살인자』를 출간했다. 기자에게 진실과 윤리는 무엇인가 한 편의 법정 드라마 같은 이 다큐멘터리를 읽는 재미는 무엇보다도 똑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진실’의 입체성에 있다. 살인죄로 징역형을 살고 있는 맥도널드를 지지하는 변호사들과 친구들은 그를 사법제도의 희생자로 간주하고,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겠다는 의도로 접근하여 맥도널드와 거짓된 우정을 나누면서 모든 정보를 캐낸 기자 맥기니스를 더없이 파렴치한 인물로 묘사한다. 독자들 역시 그들의 증언과 진술을 읽으면서 맥기니스가 얼마나 야비한 기회주의자인지를 발견하고 흥분을 감출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맥기니스를 지지하는 변호사, 작가, 관련 인물들의 진술을 읽고 나면 맥도널드가 주장하는 결백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그가 얼마나 잔인하고 냉혹하고 교활한 살인마인지를 깨닫고, 그런 자에게 ‘명예훼손’에 대한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법원의 판결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기자가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모든 증언과 해석과 판단이 독자들을 끝없는 의문의 미로로 밀어 넣는다. 진실은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다. 전형적인 중상류층 의사 맥도널드는 자신이 주장하듯이 아내와 두 딸의 목숨을 괴한들에게 빼앗기고도 억울하게 누명을 쓴 희생자일까? 아니면 맥기니스가 주장하듯이 선한 양의 탈을 쓴 끔찍하고 교활한 살인마일까?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당시 복용하던 약물 때문에 이성을 잃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증언했듯이 폭도들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으로 가족을 잃었던 것일까? 양측 변호인들의 주장을 듣고 평결을 내리는 배심원들의 판단은 과연 편견 없이 옳다고 믿을 수 있을까? 기자는 진실을 밝힌다는 명목으로 취재 대상에게 접근해서 본심을 숨기면서 정보들을 캐내고, 마지막 순간에 표변하여 취재 대상을 궁지로 몰아넣는 행동을 해도 그것이 진실을 밝히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도덕적으로 문제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가 밝혔다는 진실은 과연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일까? 사실을 말해주지 않아서 상대가 거짓을 진실로 믿고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과 처음부터 상대를 속일 마음으로 거짓을 말하는 것 사이에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언론이 말하는 진실에 대해, 그리고 언론의 윤리와 대중에게 공개하는 글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기자의 글쓰기 이 책이 저널리즘의 고전이 된 데에는 기자인 저자가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인터뷰하면서 전개하는 취재 과정이 극적이고 입체적이라는 사실이 주효했겠지만, 취재하는 사건과 인터뷰 대상에 대한 자기 판단을 끝없이 반추하고,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기자의 진지한 자세를 귀감으로 삼을 만하다는 사실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탁월성은 저자가 저널리즘 글쓰기에 대해 기울이는 성찰적인 노력에 있다. 후기에서 저자는 논픽션 글쓰기가 소설적 글쓰기와 어떻게 다른지 뛰어난 문체로 변별력 있게 분석하고, 특히 인터뷰 대상이 구어로 전한 내용을 기자가 문어로 전환하는 ‘편집’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실 속의 사실’과 ‘글로 편집된 사실’ 사이의 괴리에 주목한다. 독자는 기자의 글이 ‘사실’을 그대로 옮겼다고 믿으며 읽지만, 필연적으로 그 글은 기자의 머릿속에서 이미 ‘편집된’ 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자는 묻는다. 기자의 글이 말하는 진실은 사건과 취재 대상의 진실인가, 아니면 그것들을 자기 글로 고착한 기자의 진실인가.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하지만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맥기니스는 2014년 암으로 사망했지만, 제프리 맥도널드는 살아남았다.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그는 수감된 상태로 2002년 어린이 연극학교 교장인 캐서린 쿠리크와 극적으로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낳기도 했다. 캐서린 맥도널드는 일주일에 세 번 1,600여 킬로미터를 달려 감옥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맥도널드는 수차례 재심청구를 했으나 기각되었고, 2005년 5월 가석방을 신청했으나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함에 따라 이 요청 또한 기각되었다. 다음 가석방 심리는 2020년 5월에 열린다. 2015년 현재, 맥도널드는 메릴랜드 연방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며 여전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그의 무죄를 입증해줄 수도 있었던 네 명의 폭도 중 한 명이 범죄 사실을 자백할 의사를 밝힌 적도 있었으나 그 역시 사망하여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의 출소 만기는 2071년 4월로 그의 나이 127세일 때이다. 인터넷에서는 여전히 그의 유죄를 확신하는 사람들과 무죄를 믿는 사람들이 다양한 주장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 https://en.wikipedia.org/wiki/Jeffrey_R._MacDonald 맥도널드 웹사이트 : www.themacdonaldcase.or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