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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
정류장에서 너무 먼 집 9 1/2 F 거울여자 산책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콜링 유 오징어 럭키 서울 해설 ㅣ 사막의 도시, 그 실낙원의 풍경 황도경(문학평론가) 작가 후기 |
이신조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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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방은 여전히 엘라의 쇼핑백을 나누어 들지 않는다. 좁은방은 엘라 역시 '오브제'와 '미샤'와 '리씨'와 '에콜 드 파리'와 '레노마'와 '보브'와 '스테파넬'과 '아니베 에프'와 '아나카프리'와 '나이스 클랍'과 '톰보이'와 '에녹'과 '롤롤'과 '쇼비즈'와 '시스템'이 무슨 뜻을 가진 낱말인지 결코 알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좁은방은 엘라가 그 뜻을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걸 역시 알지 못한다. 첫번째 산책 코스가 끝나간다.
화장실. 파우더 룸에 고객용으로 마련된 소파에 다소 피곤한 듯 엘라와 좁은방과 엘라의 쇼핑백들이 앉는다. 엘라는 핸드백에서 파우더 케이스를 꺼내 거울을 들여다본다. 좁은방은 담배를 꺼내 문다. --- p. 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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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모팅콜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냈어요. 그리고 당신이 일러준 수면제를 사먹고 며칠 만에 깊은 잠을 잤죠. 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알아챈 당신에게 계속 팩스 서비스를 받고 싶군요. 전처럼 매일이 아니어도 좋아요. 물론 이젠 어떤 내용이든 상관없구요. 난 더 이상 광고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아니니까요. 뭐든 당신 마음대로 적어 보내줘요. 왜냐구요? 그런 것들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우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군요. 이 정도가 좋겠죠. 어쨌든 난 팩스를 계속 받고 싶어요. 내용은 당신이 선택해요. 잘덴이란 수면제의 종이갑에 적힌 글자를 모두 적어보냈던 것처럼. 변한 건 없어요. 난 변하지 않은 요금을 송금할 거구요. 팩스 기다릴게요.
--- p.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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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의사의 늙은 모가지가 붉게 부풀어올랐다. 나타샤는 무력하게 내둘린다. 늙은 의사가 나타샤의 머리채를 거칠게 움켜쥔다. 머리를 벽에 짓찧는다. 여자의 사진을 담은 액자가 위태롭게 흔들린다. 나타샤는 젼디기로 한다. 늙은 의사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두터운 베개가 나타샤의 얼굴을 덮는다. 할아버지의 호밀밭을 생각하면 숨이 차올랐다.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여전히 익숙한 조선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늙은 의사가 힘껏 베개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오른쪽 심장이 연약한 새알처럼 와직 깨어져버릴 것만 같다. 낯선 길을 갈 때는 발 밑을 조심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발걸음은 무언가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혹여 그 돌이킬 수 없음을 기대하며 함부로 숨찬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은 아닐지. --- p. 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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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그녀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십여 년을 연예인으로 살아왔다. 속된 말로 연예계에서 잔뼈가 굵은 것이다. 예쁜 어린이 선발대회에서 왕관을 차지하고부터는 '보옽'으로 살아 갈 수 없게 된 그녀. 그러나 뜻밖에도 그만큼이나 서툴고 허술한 그녀. 더구나 엄마 없이.
G의 표정에서 어딘지 모르게 교활한 계략의 냄새가 풍긴다. 옛정이나 의리는 허울뿐인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그녀를 지켜봐온 G다.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알고 있는 G다. 최근 그녀의 처지 역시. G는 지금 그녀의 조바심과 초조함을 완벽하게 간파하고 있다. 그녀를 훑어내리는 간교한 시선. 아직 쓸 만한가, 하는 눈빛이다. --- p.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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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의 가방을 열고 길쭉하게 접힌 스포츠 일간지를 꺼낸다. 만나자마자 그가 그녀에게 펼쳐 보인 맨 뒷면의 전면광고 - 1003년 4월 1일 쇼핑의 지상낙원을 만난다. "Buy-Buy Paradise"오픈 기념 사상 최대 경품 대축제.
낙원을 파는 쇼핑센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대리석 야자수들이다. 한 그루가 족히 십 미터는 될 것 같은 대형 야자수 조각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흰 대리석 표면에 작은 금빛 전구가 크리스마스 트리에서처럼 친친 감겨 빛나고 있다. 낙원을 파는 쇼핑센터. --- p. 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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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할 만한 작가적 자질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고 『기대어 앉은 오후』로 1999년 문학동네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소설가 이신조의 첫 소설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실질적 데뷔작이랄 수 있는 신인작가상 수상 장편 『기대어 앉은 오후』에서 "섬세한 감성, 경험의 다의성에 대한 관용, 여성적 모랄의 미학화 등 신뢰할 수 있는 작가적 자질을 보여줌으로써 이미 여성 소설의 세련된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을 받은 바 있는 만큼 이번 첫 소설집에 대한 기대는 각별하달 수 있겠다. 1편의 중편과 8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번 소설집에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공동체의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지향성, 안정을 향한 정체성의 탐색이 아니라 그 근원을 알기 어려운 채로 불안하게 부유하는 정체성의 혼돈 그 자체다. 그리고 이것은 대체로 최근 젊은 세대의 소설적 주제 및 감성과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혼돈을 소설로 제시하는 작가의 손길은 숙련된 소설 장인을 연상시킬 만큼 세련되고 탄탄하다. 절제를 체득하고 있는 안정된 문장, 정교한 복선, 소설적 전언을 향한 단단한 응집력 등 작가의 기본기는 무엇보다 그의 소설을 읽을 만한 무엇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가 아직 자기만의 강렬한 소설 세계를 보여주는 데는 이르지 못한 것 같지만, 이런 신뢰할 만한 자질들은 머지않아 이신조가 한국소설의 지형도에 자신의 이름을 뚜렷하게 새기리란 기대를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사막의 도시에서 이름 찾기 이신조는 삭막한 도시를 배경으로 익명화되고 사물화된 존재들과 그들 사이의 타자화된 관계들을 그려냄으로써 우리가 서 있는 우울한 실낙원의 세계를 담는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죽음과 부패로 얼룩진 화려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인물들은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에 시달린다. 또한 이름을 갖지 않은 사람들과 사물들, 숫자로만 규정되는 존재들, 혹은 여러 이름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몸의 감각을 통해 사라진 이름, 존재의 비밀, 틈새를 찾아간다. 표제작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은 '검정 그물 스타킹'의 시선으로 아역 출신인, 한때 "잘나갔던", 그러나 현재는 홈쇼핑 케이블 프로그램의 제의나 받는 여배우를 바라본다. 숱한 불륜의 염문과 두 번의 이혼, 그녀의 대리인이자 매니저이자 코디네이터이자 재산관리자이자 연기지도자이자 가장 열렬한 팬이었던 엄마의 죽음, 이루지 못한 채 흰 새처럼 날아가버린 사랑, 연예계라는 아름답고 잔인한 정글 앞에서 쓸쓸하고 피로하고 시들어버린 여배우. 결국 여배우는 자신을 애정과 연민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타킹으로 스스로 목을 조르고 난간 아래로 몸을 던진다. 「산책」에서는 Ella@######.com과 Zovenbang@######.com으로 존재하는 엘라와 좁은방이 '이미테이션 트레비 분수' 앞에서 만난다. 그들은 마치 벚나무와 플라타너스와 아카시아와 단풍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를 걷는 것처럼 즉석 베이커리 '포숑'을 지나, '클라니크'와 '시셰이도'와 '비오템'과 '크리스찬 디올'과 '랑콤'과 '지방시'와 '에스티 로더' 사이를 산책하고, 롯데월드 어드벤처 매직아일랜드에서 '꿈과 환상의 나라'를 만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가짜'다. 서로의 진짜 이름은 알지도 못하는 엘라와 좁은방은 여전히 각자의 세계에 '따로' 존재할 뿐이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는 전체 20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 장의 순서를 뒤섞음으로써 파편화된 기억으로부터 존재의 비밀을 풀어가는 혼란스런 과정을 담고 있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낯선 남편의 얼굴을 만난다. 기타를 치는 남편, 간이역 대합실의 남편, 병원 앞에서 활짝 웃는 남편,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축구공을 쫓아가는 남편, 쥐들이 갇힌 쥐덫에 불을 지른 후 쥐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남편…… 이 혼란스러운 과정은 '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해가는 과정이 되고 남편을 찾아가는 여정의 끝에서 '나'는 정작 실종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나'는 어느 누구와도, 무엇과도 닮지 않은 자기 고유의 이름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이다. 「콜링 유」는 고도의 섬과도 같은 도시의 삶에서 과연 타인과의 진정한 만남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모닝콜 서비스를 해주는 주인공 '나'에게 타인은 05, 96, 42와 같은 숫자화된 기호로서만 존재한다. '나'는 그들의 나이도, 직업도, 취미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Nevermind'라고 말한다. 문학평론가 황도경씨에 따르면 이는 무관심과 허무감 속에서 진행되는 현대인의 무미건조한 삶을 환기시키는 대사다. "이들이 알고 있는 많은 것들과 모르고 있는 많은 것들 사이에, 부재하는 인간관계와 길게 나열되는 사건, 사물들의 목록 사이에 고독하고 소외된 채 서로 무심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단면이 우울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밖에 부모의 파산으로 인한 남매의 억눌린 욕망과 짓씹혀진 육체, 그 찢겨진 몸과 꿈을 악착같이 재생시켜 세상을 향해 불온한 욕망을 방출시키는 「정류장에서 너무 먼 집」, 오래된 연인의 권태와 우울을 그린 「9½F」, 아무 곳에도 속할 수 없는 카레이스키 매춘부로 살아나가는 나타샤의 절망과 고독을 보여주는 「거울 여자」, 마른 오징어 같던 엄마와 아버지, 남동생을 떠나 서울로 온 '나'가 겪는 유부남과의 놀이 같던 사랑과 그 이후 「오징어」, 서울의 지형을 지도화하는 주인공이 자기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그린 「럭키 서울」 등 『나의 검정 그물 스타킹』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도시에 파묻힌 현대인들의 내면을 깊게 투시한다. 그 모든 절망과 고독의 노래 앞에서 아찔해짐은 '고양이의 시선'이 우리의 진실까지도 캐묻고 있음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