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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글
2. 독백, 두런두런, 내면일기 메시앙 판타지아 아모레 미오, 아모르 화티-리스트와 바그너 나의 불안, 나의 공포-말러의 교향곡들 내 눈의 작은 비밀 제기랄, 소쩍새 환멸 혹은 비통 3. 마니아 파라디소 옛날옛날에 광화문 3인조가 살았는데 분노와 존경과 '까암짝' 사이로 음악은 흐른다 LP여, 20년 후를 기약한다 어머니, 어려운 시절이 닥쳐올 거예요 마니아 파라디소 4. 단상,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추억의 공간 르네쌍스 환상수첩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께 털어놓고 싶어요, 아아 신이여!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 작은 무대의 큰 울림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 거지 무소르그스키의 위로 자유로운 - 그러나 - 고독한 딜레탕트의 음악 짝사랑 오 마이 블랙홀! 나의 LP사랑 H.O.T와 모짜르트는 다르다 환상을 좇는 과소비 나의 열린 음악회 거인의 초상, 오토 클렘체러 콘치타 수페르비아, 노래와 연주 사이 호사다마 호로비츠 '무조건' 좋아하는 '특별한' 연주가들 최고의 음악가 카리잔이 단돈 3천 원 5. 내가 사랑한 곡들 헨리 퍼셀의 환상곡 우수에 가득 찬 기쁨 - 베를리오즈의 비올라를 위한 교향곡 <이탈리아의 하롤드> 비버의 <미스터리 소나타> 번민을 재워주는 잠의 쾌감 - 바흐 <마태 수난곡> 섹스 코미디 <코지 판 투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 한 뼘의 차이와 두 뼘의 동질성 - 브람스와 리스트 바그너를 좋아하십니까 안타깝고 간절한 사랑의 노래 죽은 자를 위한 노래 -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제14번 202 부동의, 불멸의, 최상의 현악 4중주곡 브루흐에 대한 망설임 |
김갑수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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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서평위원 정은숙
김갑수의 산문집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는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하는 가작이다. 너무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은 책꾸밈새에다 또 글쓴이의 솔직한 감상이 잘 드러나 있는 책이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의 실제 나이와는 무관하게 '청춘의 서'라는 느낌도 책을 막 읽고 나니 솔솔 풍겨온다. 정열에 넘치는 글쓰기가 다소 눈이 부실 정도라면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흡사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이 거침없이 숱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글쓴이의 정열이 부럽지 않을 수 있으랴. 책 제목을 보고 아프가니스탄의 어떤 인물을 떠올리면 어떠랴, 하는 언설에서 보듯이 당당한 자신감과 시류에 안달하지 않는 중심이 느껴지는 책이다. 구체적으로 그 중심은 음악과 삶을 보는 어떤 견고한 시각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음악에의 몰입이야 오디오 매니아로 잘 알려진 글쓴이고 보니 새롭게 더 적을 것이 없고, 또 글쓴이도 음악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누차에 걸쳐 설명하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글쓴이의 삶에 대한 시각에는 몇 가지 더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사실 이 책은 몇 가지 점에서 너무 일찍 씌어졌거나 아니면 너무 늦게 씌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작이라 할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도 그러했지만 글쓴이는 너무 과거에 붙잡혀 있다.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물론 과거의 어떤 것에서 발원하여 오늘을 거쳐 흘러가는 것이지만 너무 지난 시간에 '들려' 있으면 오늘의 삶이 잘 안 보이는 법이다. 물론 글쓴이가 몇 백년 전에 만들어진 음악과 수십 년 전의 음악 연주에 빠져 있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주관적인 접근이 오늘의 삶을 말하는 자리에서도 깊이 침윤해 있다는 것이 좀 마음에 걸렸다. 그런 점 때문에 글쓴이의 사랑이야기는 읽는 이를 좀 힘들게 한다. 너무 사적인 부분까지 다 드러낸 것 아닌가? 가령 연극하는 사람과 글쓰는 사람은 다 어느 정도 노출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대에 서는 사람처럼 글쓰는 이가 노출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솔직한 내 느낌이다. 그런데 글쓴이는 너무 무대의 전면에 나서 아주 세부적인 것까지 다 써놓고 만 것이 아닌가? 딴은 그런 점 때문에 그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가 듣는 음악과 음악에 대한 몰입까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뭐 그렇게까지 그 자신의 삶을 들여다볼 이유는 뭔가 하는 의문이 든다. 다소 비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수십 년 전의 모습까지를 다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가지 자신에 대한 자애라고 할 만한 것에 대한 다소의 부담만 극복하면 이 책은 아주 유쾌한 음악 감상서로 읽을 수 있다. 숱한 오디오 편력기와 많은 음반들에 친절한 안내와 감상 등은 소리에 대한 몰입이 보여주는 한 진경이라 할 만하다. 바야흐로 한 방면에 대한 매니아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느낌을 안겨준다. 이제껏 두리뭉실한 해설자들만이 메우고 있던 바닥에 예술 감상에 관한 한 이제 참된 감상자의 시대,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 같은 징후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한 도전적인 예술 작품 감상서라고 할 수 있다. 냉소적이면서도 완전히 냉담하지 않고, 섬세하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담을 쌓고 완전성에 몰입하는 김갑수의 이 산문집은 이 가을에 동반하기에 아주 좋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화자의 광포한 파토스가 심상을 울린다. 하지만 이런 깊은 상흔을 안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이 책을 조심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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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음반 모으고 오디오 바꿈질해 온 게 근 20년 가까이 된다. 그 결과 약 1만장의 레코드와 3조의 오디오 시스템을 보유하게 되었다. 스피커는 대략 서른 번쯤 바꾸었고 앰프도 프리, 파워의 횟수를 합치면 그 정도 될 것이다. 지나간 세월을 헤아린다면 레코드는 하루에 한 장 이상 구입한 셈인데 확률적으로 한 100장을 뒤진 끝에 한 장을 구입한다면 그동안 몇장이나 뒤적거려 본 것일까. 오디오의 경우 파트별로 교체한 기기의 총 횟수를 한 100회 정도로만 잡는다 해도 평균 두어달에 한 번 꼴로는 무언가를 바꾸거나 구입한 셈이 된다.
"석수의 삶은 돌을 깨트리고 채소 장수의 삶은 하루 종일 서 있다."고 시인 이성복은 썼는데, 그렇다면 나의 삶은 대학로와 명동의 레코드점 한구석에 서 있거나 세운상가, 용산 전자랜드의 오디오 가게를 서성이며 고스란히 지나갔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나의 삶은 레코드점과 오디오숍을 거쳐 집에 돌아와 앉은 의자 위에서 지나갔다. 의자 위의 생. 의자에 앉아, 의자에 들러붙어, 의자에 헝겊처럼 포개어져, 마침내 의자가 되어, 나의 생은 음악소리를 따라 흘러갔다. 존재의 심연을 가득 품은 시인으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의자가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나마 시인의 모자를 쓰게 만든 단 한권의 시집도 어쩌다 음악을 멀리한 1년간이 있었던 덕택에 가능했다. 그 옛날 파종기의 풋풋한 열망을 함께 나누었던 글 친구들이 점차 화려한 명망으로, 심지어 살아있는 신화로 제 이름의 그늘을 드리우는 과정을 의자에 쪼그리고 앉아 지켜보아야 했다. 또다시 이성복의 한 구절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대체 무엇이 나의 인생을 의자로만 내몰았을까. 결코 원만해질 수 없는, 삐죽삐죽 날이 선 성격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사람을 갈망하면서도 나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기를 반복했다. 매사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어두운 습성, 멍에처럼 주어진 천성적인 이기심과 무신경함.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기에는 에고가 너무 강했다. 그러니 의자 위에서 혼자다. 습기 찬 이십대, 삼십대, 사십대의 하루하루가 의자 위에서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더라도 다시 되물어야 한다. 정녕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역시 기질적인 면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오디오 하는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귀가 얇다고 한다. 늘 어딘가가 근질거리고 궁금해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 사람들. 충동에 이끌리는 변덕스러운 성정. 그리고 산만 신경계. 이런 걸 좋게 말해 예술가적 성향이라고 부른다지. 게다가 '지금 이곳'이라는 낮은 땅의 시간이 항상 불만의 계절로 느껴지는 사람에게는 초월과 몽상의 갈망을 채워줄 어떤 무한, 무변(無邊)의 광막한 영토가 필요하다. 삶이 근질거리는 사람을 위한 무변의 영토. 음악과 오디오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이 세상 그 누가 소리의 끝을 보았는가. --- pp. 109~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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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마냥 주관적일 것만 같은 소리에 대한 판단에 어떤 공통항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한 것도 바로 그 은밀과 비밀의 체험에 공감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척 많은 노력과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오랜 시간을 들이고 많은 노력을 해서 겨우겨우 깨달아 가는 감동. 그것의 깊이와 놀라움을 어찌 인스턴트 놀잇감들이 제공해 줄 수 있으랴.
--- p.1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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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클래식 음악에는 약간의 관심과 존중감을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몰두해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보입니다. 어딜 가나 사방에 음악이 넘쳐 흐르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런 현상은 왜일까요. 아마도 고전문학 작품이 외면받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우선 과거 시대의 창작물이라 정서적으로 낯설고, 유행가처럼 쉽고 직감적으로 다가오는게 아니며, 무엇보다도 상당한 정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겁니다.
집중해서 클래식 곡을 감상하는 체험을 갖게 되면 크든 작든 인생에 변화가 생겨납니다. 피아니스트 김주영은 클래식을 알면 생겨나는 세 가지 이익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첫째, 잘난 척하면서 친구들 기를 죽이거나 데이트 상대에게 인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둘째, 아주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셋째 눈물이 흐르고 피가 끓는 감동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이것은 클래식에서만 가능한 깊은 세계다. 그러니까 "베토벤의 음악은 지루하다." 고 말하면 그것은 내가 무식한 것이지 베토벤이 지루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유머러스한 설명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내 생각을 하나 더 보태자면, 클래식 음악에 몰두해서 인생이 달라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 있습니다. 클래식 곡들은 대부분 길이가 매우 길다는 점입니다. 다른 짓을 할 새가 없다 이거지요. --- pp. 326~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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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LP를 구입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레이블의 수준과 발행연도 그리고 제작횟수이다. 아무리 곡이나 연주가가 낯설더라도 이 기준의 노하우를 잘 활용하면 큰 실패는 없다. 나는 항상 뛰어난, 이른바 명반만을 찾는 편이 아니다. 곡이 얼마나 탁월한지, 연주가 얼마나 뛰어난지보다 그 음반의 주인공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얼마나 몸부림쳤는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게 음반 구입의 주목적이다. 그래서 간혹 나만의 자의적인 기준으로 일류와 삼류의 평가가 역전되는 경우도 생긴다.
--- pp.159-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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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이 음악책으로 읽히지 않기를 바란다. 밤하늘의 달에 음악을 비유한다면, 이 글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까운 손짓에 수많은 표정이 있고 욕망의 몸부림이 있다. 그것을 인생이라고 번역해도 좋으리라. 음악을 사랑했고 거기에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맡겨온 셈이지만 궁극적으로 음악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 시간을 넘어서는 의미의 시간, 아프도록 충만한 인생의 시간이 바로 음악듣기였다.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내게는 우연히, 그리고 숙명적으로 음악이었지만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로 바꾸어 읽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 저자 서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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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작 물음은 이제부터다. 못 부르는 노래를 부르지만 않는다면 새디도 최소한 조롱은 면했을 것이다. 과연 새디는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고 다른 일로 행복해 질수 있었을까. 가령 착실한 직장인이 되었거나 얌전한 주부가 되었거나 그냥 부유한 언니집에 얹혀 잔일을 거들며 살았다면 새디는 불행을 모면할 수 있었을까. 사람이 느끼는 행복감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짐작건대 새디는 어디서 무엇을 하건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 같다.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 자아 집중형 인물들의 공통점이 그것이다. 그들은 실패와 좌절, 혹은 타인의 손가락질이라는 외형을 선택해 내면의 평온을 얻는 기이한 존재들이다. 그들의 겉은 불행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 내면에는 뜻밖의 충족감과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평온함이 있다. 좌절감, 열등감, 패배감의 외피 속으로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정반대의 통로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심리 세계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어떤 깊숙한 자기 충족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새디와 언니 조지아 그리고 평양 군중의 얼굴이 대비되어 떠오른다. 거기엔 참으로 상반된 것들이 얽혀 있다. 그렇다고 싸구려 인생론에 젖어 들지는 말아야지. 어떤 삶을 지향할지, 어떤 자아와 스스로를 동일시할 것인지 쉽사리 해답을 구하려 들지는 말아야지. 언젠가 속마음을 노출한 시를 쓴 적이 있다. 남들이 이해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에게는 절실한 내용이었다. 새디를, 혹은 스스로를 위하여 결핍은 나의 힘! --- pp. 320~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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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햇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비치지 않는다. 턱앞에 다가온 가을도 봄을 거치고 여름을 보냈던 사람이나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same old song을 부르는 자에게 계절의 햇살이란 폐포를 찌르는 매캐한 한 줌 연기 같은 것.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저 거친 창밖의 폭우가 음악으로 들리네. 한밤을 거쳐 새벽을 맞이하는 이 시간, 스피커에서는 텔레만의 <오보에 솔로를 위한 열두개의 환상곡>이 나직이 울려나오는데 빗줄기와 오보에와 화성의 영감을 이루네. 그것은 일테면 하나의 자연일까. 자연은 自然인데, 반드시 삶에서 의미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인가 되묻고 싶어지네. 일하지도 생산하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않은 채 가만히 멈춰선 자연을 나직한 음악이 감싸주네. 그래, 저 텔레만의 오보에와 창밖의 빗줄기는 서로 만나고 싶었던 거야. 충만한 계절의 흐름처럼 삶의 톱니바퀴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간절히 노력하는 일과 시간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공허에 사로잡히는 감정이 크게 다른것이 아니라는 것, 그 둘은 인생이라는 자의 양면이라는 것, 때로는 음악이고 때로는 빗줄기 소리이고 혹은 그 둘이 합쳐진 모호한 음향의 상태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어떤 가을이 찾아와도 내게는 너무나 많은 음악, 너무나 많은 책. --- pp. 132~1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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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상처받은 자의 음악과 사랑에 관한 성찰
시인, 출판평론가, 방송인으로 활약 중인 김갑수의 음악에세이집〈텔레만을 듣는 새벽에〉가 출간됐다. 부제가 “김갑수의 음악과 사랑 이야기”인 이 책은 일반적인 음악안내서가 아니라,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인생론이자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이 담겨 있는 성찰적 에세이집에 해당된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음악듣기, 1만장을 넘어선 음반, 일일이 기억해 낼 수 없는 각종 오디오 기기의 섭렵을 통해 그 분야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김갑수의 삶은 오로지 음악 한가지에만 집중된 '행복한' 삶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난 1998년에 출간된 첫 번째 음악에세이집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의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의 음악은 불우한 성장과정과 생사를 오갔던 사랑의 실패에 대한 고통의 대체물로 작용한다. 신간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는 음악과 예술을 통해 삶의 고통을 넘어선 사색의 깊이를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