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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제 1편; 풍악風樂과 여색女色을 멀리하고 아첨阿諂하는 무리를 내치십시오 1395년(태조 4) 을해년乙亥年 4월 25일 대사헌大司憲 박경朴經 제 2편; 전하께서 역사 기록을 보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1398년(태조 7) 무인년戊寅年 6월 12일 감예문 춘추관사監藝文春秋館事 신개申槪 제 3편; 국방國防을 폐지할 수는 없으나, 백성 구제가 우선입니다 1426년(세종 8) 병오년丙午年 1월 16일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 허성許誠 제 4편; 살던 곳을 벗어나 도망치는 백성을 금지해야 합니다 1426년(세종 8) 병오년丙午年 8월 27일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 박안신朴安臣 제 5편; 술로 인한 폐해가 크니 통촉하소서 1429년(세종 11) 기유년己酉年 2월 25일 대사헌大司憲 조치曹治 제 6편; 이 날만은 모두가 즐기게 하여 주십시오 1429년(세종 11) 기유년己酉年 8월 24일 전 우의정前右議政 유관柳寬 제 7편; 공신功臣의 서자庶子들을 충의위忠義衛에서 배제하여 분별을 밝히십시오 1430년(세종 12) 경술년庚戌年 2월 17일 대사헌大司憲 이승직李繩直 제 8편; 이 몇 가지가 요즈음 정치의 폐단이 아니겠습니까 1430년(세종 12) 경술년庚戌年 5월 15일 좌사간左司諫 신포시申包翅 제 9편; 살기 힘든 아들의 벼슬길을 열어주십시오 1453년(단종 1) 계유년癸酉年 1월 21일 전 경창부 소윤前慶昌府少尹 민대생閔大生 제10편; 가뭄이 극심한데 음주가무에 취한 무리가 부지기수입니다 1458년(세조 4) 무인년 5월 4일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서거정徐居正 제11편; 누가 첩이고 누가 서자인지 왕법으로 가려주십시오 1465년(세조 11) 을유년乙酉年 1월 29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김종순金從舜 제12편; 어미의 행실이 저와 같은데, 자식을 임용할 수 있습니까 1467년(세조 13) 정해년丁亥年 8월 5일 대사헌大司憲 양성지梁誠之 제13편; 벌하지 않는 것은 종친이기 때문입니까 1470년(성종 1) 경인년庚寅年 1월 18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극돈李克墩 제14편; 법의 집행이 억울한 백성으로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1470년(성종 1) 경인년庚寅年 5월 3일 형조 좌랑刑曹佐郞 최숙정崔淑精 제15편; 머리 깎은 여승은 부녀자가 아닙니까 1473년(성종 4) 계사년 7월 18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서거정徐居正 제16편;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지키는 길 1474년(성종 5) 갑오년 10월 28일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서장李恕長 제17편; 용렬하고 못난 저의 벼슬을 갈아주소서 1478년(성종 9) 무술년 3월 18일 이조 판서 강희맹姜希孟 제18편; 난신의 딸로 아내를 삼으면 첩으로 강등시키는 것입니까 1480년(성종 11) 경자년更子年 6월 12일 상산군商山君 황효원黃孝源 제19편; 어미가 있는 고향으로 옮겨주셔서 남은 봉양奉養을 받들게 해 주소서 1480년(성종 11) 경자년庚子年 10월 28일 유자광柳子光 제20편; 억울하고 원통함을 명백하게 분별해 주소서 1494년(성종 25) 갑인년甲寅年 8월 17일 행 부호군行副護軍 황형黃衡 제21편; 간언하는 신하마다 옥에 가두니 누가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1495년(연산 1) 을묘년乙卯年 6월 30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손순효孫舜孝 제22편; 왕과 신하의 소통은 정치의 체모를 바로 서게 하는 것입니다 1515년(중종 10) 을해년乙亥年 5월 11일 이조 정랑吏曹正郞 김정국金正國 제23편; 천하의 보는 것으로 눈을 삼고, 천하의 듣는 것으로 귀로 삼으소서 1515년(중종 10) 을해년乙亥年 6월 1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조원기趙元紀 제24편;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통솔의 체통을 세우소서 1522년(중종 17) 임오년壬午年 7월 20일 영의정領議政 김전金銓 제25편; 친인척의 병폐가 막심한데 왕께서 관대하시니 신들은 실망입니다 1540년(중종 35) 경자년更子年 12월 12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홍섬洪暹 제26편; 조광조趙光祖의 풀리지 못한 지하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 1544년(중종 39) 갑진년甲辰年 4월 7일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송세형宋世珩 제27편; 현명한 신하 조광조의 죽음이 어찌 왕께서 관계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1544년(중종 39) 갑진년甲辰年 5월 29일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 신백령辛百齡?한지원韓智源 제28편; 왕께서 사사로이 사람을 들이고 내치시니 하늘의 재앙이 없겠습니까 1544년(중종 39) 갑진년甲辰年 5월 29일 마전 군수麻田郡守 박세무朴世茂 제29편; 의심나면 맡기질 말고, 맡기면 의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1545년(인종 1) 을사년乙巳年 6월 15일 상호군上護軍 이현보李賢輔 제30편; 왕께서 어리시니 다스림과 배움의 시초가 바로 지금에 있습니다 1547년(명종 2) 정미년丁未年 1월 25일 부제학副提學 주세붕周世鵬 제31편; 신이 사직소를 올리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555년(명종 10) 을묘년乙卯年 11월 19일 단성현감丹城縣監 조식曺植 제32편; 단양군수 황준량 삼가 왕께 올립니다 1557년 (명종 12) 정사년丁巳年 5월 7일 단양 군수丹陽郡守 황준량黃俊良 제33편; 여우나 쥐 같은 무리가 도적질을 하니 망할 나라라도 이런 적은 없었습니다 1568년(선조 1) 무진년戊辰年 5월 26일 조식曺植 제34편; 나라와 백성을 살리는 다섯 가지 비책 1574년(선조 7) 갑술년甲戌年 1월 1일 우부승지右副承旨 이이李珥 제35편; 아비를 죽이고도 뇌물로 덮으려고 하니 이것은 왕법이 아닙니다 1599년(선조 32) 기해년己亥年 9월 7일 유학幼學 권필權? 제36편; 속히 면직을 허락하시고 현덕賢德 있는 이를 다시 선발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소서 1601년(선조 34) 신축년辛丑年 2월 20일 영의정領議政 이항복李恒福 제37편; 왕께서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으신지 반년이 다되어 갑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무신년戊申年 11월 6일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 이준李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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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소란 왕조시대에 간관 등의 신하가 임금에게 정사를 간하기 위해 올리던 글을 말한다. 상소는 왕조시대의 중요한 언로 중의 하나로 문무백관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운영되었지만, 엄격한 규칙과 절차가 있었다. 격식과 규정으로 상소를 규제한 것은 상소문이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기 때문이 아니라, 상소문이 고도의 정치적 담론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소는 대부분 정치적인 사안을 소재로 삼아 정치적 언술행위를 하는 것이다. 특히 왕이라는 절대 권력자에 대한 비판과 충고라는 그 기능상의 특성 때문에 상소는 정치적으로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상소가 아무리 공인된 행위였다고 하더라도 상소 행위자에게는 목숨을 걸만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특히 왕의 행위와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간쟁소나 신하의 잘못을 탄핵하는 탄핵소, 정책이나 사건에 대해 비판하는 논사소, 특정 사건에 대해 변론하는 변무소는 시무소나 사직소 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을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직소가 간쟁소나 탄핵소, 논사소, 변무소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날 때 그 상소의 위험성은 일반적인 간쟁소나 탄핵, 논사, 변무소 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된다. 그것은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직소가 단순히 자신의 직을 사직하거나 왕이 내린 직책을 사양할 목적으로 왕에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사직이라는 행위를 통해 왕을 압박하여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고, 이런 사직소가 왕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상소 행위자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7세기 초반까지 『조선왕조실록』 속에 수록되어 있는 상소 중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상소들을 뽑아 추려 만든 것이다. 지금 새삼스럽게 상소를 번역하여 책으로 내는 것은 조선 시대의 언로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졌었는지 현재의 우리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지금은 민주사회, 시민사회이고 미디어 사회, 정보통신 사회이다. 언로를 일정한 형식으로 규정할 수조차 없는 지금 사회가 조선이라는 통제된 왕권 사회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현재가 뛰어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규정할 형식조차 찾을 수 없는 언로 속을 달리는 말의 자유로움이 과연 조선이라는 통제된 왕권 사회보다 자유롭고 과감하며 직설적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어쩌면 형식적, 제도적, 표면적인 자유로움 속을 달리는 말의 자유는 이전보다 더 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표면적 자유가 내용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용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언로의 두 주체가 모두 언로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역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싫어할 것을 익히 알면서도 싫은 소리를 계속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말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하고, 싫어할 것을 알지만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을 알고 할 수 있어야 하며, 들은 말을 바탕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때 언로는 표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될 수 있다. 목 놓아 소리 지르는 사람, 죽을 듯 악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한번쯤은 돌아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