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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군신화, 실제인가 조작인가
2. 단군은 언제 민족의 시조가 되었는가 3. '기자조선' 과연 있었나 4. 기자조선의 세력 범위와 그 중심지 5. 위만조선은 어떠한 국가였는가 6. 한(漢)은 왜 위만조선을 침공했나 7. 서슬 퍼런 긴장 감돌던 고조선 사회 8. 한사군의 역사적 의미 9. 북한은 단군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10. 부여의 위상, 만방에 드날리다 11. 꿈 많은 왕국, 부여의 중심지는? 12. 부여는 모두 4개였다 13. 신비의 부여왕, 권력은 약했다 14. '백의민족'부여인 삶과 죽음은? 15. 중국, "역사에서 부여를 지워라" 16. 고구려 건국시기, 재검토해야 한다 17. 결혼과 동시에 죽음 준비한 고구려 사람들 18.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19.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정치 선전문 20. 고구려의 타깃은 백제였다 21. 광개토왕의 군대는 왜 강했는가 22. 고구려 영토는 어디까지 내려왔는가 23. 중원고구려비의 건립 목적은? 24. 고구려는 가야를 경영했다 25. 아단성은 두 군데 있었다 26. 아차산성과 보루 유물을 해석하라 27. 세상의 중심은 백제 28. 위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 29. 무녕왕릉의 수수께끼 30. 백제는 만주에도 있었다 31. 백제의 마지막 왕성, 주류성은 어디 32. 백제 멸망의 미스터리 33. 신라 김씨 왕가는 흉노계 후손? 34. 삼국통일 '신라의 힘' 원천은 35. 신라는 '바다의 강자'였다 36. 화랑도의 기원은? 37. 눈부신 신라의 첩보공작 38. 신라의 반란 39. 자유분방한 신라인의 성과 사랑 40. 선덕여왕 설화는 과대포장 41. 소정방은 신라에서 독살되었나 42. 가야 건국세력은 북방계 기마민족? 43. 대조영이 '발해'를 국호 삼은 뜻은? 44. 국제진출 활발하던 고대국가 45. 종횡무진 한민족, 활동무대 광대했다 46. 고대국가의 시조 신앙 47. 고대인들 서약 "바위처럼 굳건히" 48. 삼국시대 사냥터엔 '큰일' 많았다 49. 고대국가는 민족 문화의 고향 50. 죽음은 또 다른 세계의 시작 51. 격동의 삼국시대, 살해된 왕 많다 52. 궁예, 진훤, 왕건의 새 시대 53.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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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 기간의 역사를 단군조선의 연장으로 설정하였다. 중국인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지금까지의 기자동래설을 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할 사안은 아니다. 기자조선은 중국 문헌에 그 존재가 뚜렷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전한대(前漢代)에 편찬된 《사기(史記)》 송미자 세가(宋微子世家)와 《상서대전(尙書大傳)》 등에서 확인된다. 즉,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면서, 은나라 주왕(紂王)에게 수금(囚禁)되어 있던, 은나라의 왕족이요 현인의 평을 듣던 기자를 석방했다. 그러자 기자는 조선으로 망명하였다. 무왕이 이를 알고서는 기자를 조선에 봉(封)했다는 것이다. 또 《위략(魏略)》에 보면 “기자의 후손 조선후(朝鮮侯)”라고 하여 B.C. 4세기 말∼B.C. 3세기 초에 왕을 칭했던 고조선 최고 지배자의 계통을 기자와 연결짓고 있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또 위만(衛滿)에게 축출된 준왕(準王)을 “기자의 40여 세손”이라고 하였다. (중략)
기자는 망명해서 조선을 건국한 게 아니었다. 그 망명지를 ‘조선’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B.C. 12세기 말 이전에 고조선의 존재는 확인된다. 고조선의 소재지는 한반도 바깥이 분명하다. 그리고 기자 세력은 뒷날의 고구려와 관련을 맺었다는 인식이다. 이 문제는 고구려의 기원과도 연계된 중요한 사안이며, 이를 위시한 기자 인식의 사회적 배경 등은, 장차 구명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 기자조선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 p.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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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방면에서 백제의 움직임은 345년에 전연(前燕)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인 봉유(封裕)가 국왕인 모용황에게 건의한 상서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다시금 포착된다.
고구려·백제·우문(宇文)·단부(段部)의 사람은 모두 병세(兵勢)를 옮겼는데 중국의 의(義)를 사모하여서 온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들 돌아갈 생각이 마음에 있습니다. 지금 호(戶)가 10만이나 좁은 도성에 몰려들고 있어서 장차 국가에 큰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 종족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慰撫)하고, 법으로 단속하면 됩니다.(《진서》 모용황재기) 위의 기사는 ‘백제’라는 국호가 중국 역사서에 처음 보이는 것이다. 백제는 전연의 공격대상 국가들이던 고구려·우문부·단부와 병칭되고 있는데, 345년 이전에 전연과의 무력대결 끝에 상당한 숫자의 포로가 발생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아울러 이들 나라의 위치와 관련지어 볼 때 백제는 전연과 인접한 만주 지역에 소재한 것으로 보겠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이 《송서》 백제 조의 첫머리에 보이는 다음과 같은 기사이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高驪)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백제는 본래 고려 즉 고구려와 함께 요동군(治所는 遼陽)의 동쪽 천여 리에 소재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본래[本]’라는 글자는 의미심장하다. 《송서》가 편찬되는 5세기 말엽 이전 어느 때 백제가 당초 거점에서부터 한반도로 이동해 왔음을 염두에 둔 서술이기 때문이다. 그 당초 거점은 앞의 두 사료와 결부지어 볼 때 만주 지역이 분명하다. --- p.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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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의문의 역사, 한국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일본의 역사 왜곡과 역사 드라마 방영 등으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역사서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TV 사극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그중에서도 인물을 다룬 역사서는 끊임없이 나오고 있으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 역사의 시작부이며 장구한 세월과 광활한 공간적 범위를 자랑하는 고대사는 사료가 풍부하지 못하고 고조선이나 부여, 고구려의 현장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는 점 때문에 그 중요성에 비해 제대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로 후삼국사 연구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이도학 교수가 이번에는 연구 영역을 좀더 넓혀 고대사 전체를 다룬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을 펴냈다. 2000년 1월부터 12월까지 시사주간지 〈뉴스피플〉에 연재한 ‘새로 쓰는 한국 고대사’를 정리하고 추가하여 역사인식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쓴 글이다. 고대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나 잘못 알려진 상식을 바로잡고 새로운 측면에서 역사를 해석하려는 대중 역사서는 여러 권 있지만 내용이 깊지 못하거나 분야가 한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은 한국사 최대 금기이자 논란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단군과 단군신화의 문제와 고조선 연구에 대한 시각부터 발해 국호의 기원까지 한국고대사에서 가장 쟁점이라 할 수 있는 사안들을 모아서 의문을 해소하고 더 활발한 고대사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저자는 이 책이 “흔히 말하는 대중 역사서가 아님을 밝혀”두고 있다.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해한 학계의 연구 성과들을 쉽게 풀어서 전달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저자는 고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여러 학설을 제시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연구한 학문적 성과를 제시하고 일선에서 역사를 연구하는 전공자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데 더 큰 의의를 둔다. 유물에 대한 빈틈없는 고증, 연구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 저자는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에서 전하는 사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한번 더 신중히 생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전체를 유추하여 논리적으로 학설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안악3호분은 대부분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묘주(墓主)인 고구려왕 대신에 중국에서 망영한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내력을 적은 묵서(墨書)가 남겨졌다는 점, 벽화의 주인공이 착용하고 있는 백라관은 중국계 망명객인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무덤이나 전연 귀족의 무덤인 요령성 조양시 원대자 고분 벽화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에 고구려왕을 나타내는 지표로 보기는 어렵다는 점 등을 들어 고구려 왕릉설에 이의를 제기한다(119쪽). 또한 어느 한 사실을 근거로 역사를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설에 끊임없는 의문을 던지면서 좀더 발전한 역사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역사는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며 언제든 뒤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항상 뒤집어서 생각해 보고 또 다른 의문을 던진다. 백제사의 가장 큰 미스터리라 할 수 있는 무녕왕릉의 경우, 처음에는 무녕왕릉이 과연 처녀분이었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침입자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이후 본인의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가설을 세워보기도 한다(199쪽). 저자는 이처럼 연구 결과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비판을 통해 한층 진일보한 역사 연구와 역사 인식을 지니기 위해 노력한다. 이미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라도 좀더 충실한 사료연구와 현장 확인으로 독자들이 더 생생하게 역사를 알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백제 주민들이 일본열도에 진출하여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야마구치현의 구다라베〔百濟部〕 신사나 오사카에 소재한 백제왕 신사 등의 존재를 통해 백제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존재했음을 웅변한다. 이외에 ‘고려촌’이나 ‘고려신사’와 같은 고구려 관련 지명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꼼꼼하고 통해 백제만이 아닌 많은 고대국가들이 끊임없이 일본에 영향을 주었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299쪽). 민족 문화의 고향, 고대국가의 생활과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확인한다 《한국고대사, 그 의문과 진실》은 고대국가의 정치와 풍속, 문화 등 다양한 분야를 두루 다루면서 그 생활과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 있다. 항상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한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과 동시에 수의를 만들었으며(110쪽), 아직까지도 민족 문화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는 ‘백의민족’이라는 말이 흰옷을 즐겨 입던 부여의 풍속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려 준다(92쪽). 그 밖에도 3년상(喪)을 치른다거나 신랑이 결혼 후 일정기간 처가에 머무르는 풍습 등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여러 풍속들이 모두 고대부터 이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326쪽). 이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고대국가의 풍속과 문화가 다름 아닌 민족 문화의 원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 못지 않게 고대국가도 첩보전이 치열했다. 특히 신라의 첩보공작은 고구려와 백제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까지도 뻗치고 있었으니 가위 첩보전의 대가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유신 역시 스파이전의 귀재였음을 사료 연구를 통해 밝혀 내었다. 이 같은 간첩의 존재는 우리 고대 사회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활기 넘치는 무대였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246쪽). 신라는 문무왕 때 이미 장관급에 해당하는 선부령(船府令)을 두어 선박 사무를 관장하게 할 정도로 적극적인 해양정책을 취했다. 통일신라 이전에는 바다와 별 연관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던 신라가 당나라 수군을 무려 22회에 달하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격파하여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정도로 ‘바다의 강자’였음을 말하고 있다(235쪽). 지금까지도 바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고대국가 역시 바다의 중요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추측과 이견이 난무하는 한국고대사. 왜곡되고 뒤틀린 역사 연구에 일침을 가하며 역사 바로 알기와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저자의 노력과 열정이 고대사 연구에 새로운 획을 그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