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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앞에 서다
지나가는 사랑, 다가오는 사랑 사랑을 그리는 날들 인생의 모닥불 앞에서 세월 속에 남겨지다 만남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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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가 있다. (……) 나에게는 지난 서른여섯 살 때 한 여성을 만난 어느 날이 바로 그날이다. 왜냐하면 그날이 포함된 그해가 지나기 전에 내 심장은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범섬 앞바다 심해의 바닷물도, 시냇물이 흐르듯 높게 솟아오른 나무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리는 어느 봄날의 햇살도, 바닷가 바위 위에서 춤추는 그 수많은 한여름밤의 보름달 달빛도, 어느 여인의 헌신적인 도움과 그녀의 따스한 손길도, 하물며 용광로 안의 불꽃같은 문학을 향한 나의 열정도…… 내 심장을, 고철 조각처럼 얼어붙은 내 심장을 녹여주지는 못했다. 사반세기가 지난, 아직까지도…….--- p.7-8
도대체 작중인물의 가슴속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원고지에 늘어놓은 것은 말장난에 불과했다. 대화는 서술보다 성격 묘사와 스토리 전개에 더 경제적이고 능률적이어야 하는데 지루한 요설에 불과했고, 작중인물인 화자의 느낌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다른 사람의 느낌이 내 펜 끝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혹은 일제강점기 시대 소설에서나 쓰였을 법한 죽은 표현들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알았고, 그것이 일반 독자들을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p.107 그렇게 해서 우리의 두 번째 사랑은 한밤중 아무도 찾지 않는 곳, 해변 모래사장에 피워놓은 모닥불 옆에서 이루어졌다. 마치 꿈속에서 이루어진 듯한, 그 사랑행위는 자연을 모독한 죄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떤 천벌이 내리더라도 후회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계속해서 범하고 계속해서 벌을 받기를 나는 두 손 들어 환영했다. 같이 범하고 같이 벌을 받는, 그 가능성이 오히려 우리 둘을 꽁꽁 묶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p.140 나는 그동안 사랑을 모르면서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처럼 사랑 이야기를 지껄여왔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왔고,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답을 얻었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묻는다는 사실이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증거였다. 사랑을 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게 되어 있다. 그것은 문자와 언어를 초월하는, 서술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극소수의 행운아만이 경험할 수 있는 희귀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p.176 폭주를 한 다음날, 지난밤의 폭음으로 괴로워할 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괴로움이 어서 사라지기만을 바랐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혜진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고통을 잠시 망각하게 해주는 술이 동시에 내 재능을 죽이고, 내 육체를 망가뜨리고, 내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젠가 나의 고통은 끝나야 하기 때문에.--- p.215-216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혜진과 맺은 약속, 그녀가 죽은 뒤 범섬 앞바다에 자신의 재를 뿌려달라는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혀왔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 혜진을 그곳에서 살게 해주자.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혜진이 그곳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하자. 내가 할 일은 바로 혜진의 모습을 바닷속 암벽에 조각해놓는 것이다. 그 조각에 꼭 형상화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혜진의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던 날, 그녀가 지은 미소였다.--- p.228 그리고 그것은 끝을 모르는 경이로움이 펼쳐진, 우리 둘만의 모험으로 가득 찬 여정이 될 것이다. 어느 저녁의 황혼과 어느 새벽의 일출도, 어떤 삶의 슬픔과 어떤 삶의 활력도 우리 둘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면서, 그러다가 또 다른 헤어짐이 우리의 여정을 가로막으면 그것을 피해가기보다 또 다른 만남을 기약하면서, 이번에는 미소로써 헤어짐을 받아들이고 다음번의 만남을 우리 둘만의 달콤한 비밀로 그 미소 속에 깊이 숨겨둘 것이다.--- p.235 그는 손전등으로 그가 조금 전에 갔었던 벽 쪽을 비췄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여인의 전신 조각상이었다. 여인은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 p.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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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언어를 초월하고 결코 서술될 수 없는 그 어떤 것
일간신문에 장편소설을 연재하면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정훈은 작가생활 초기 단편소설을 쓸 때처럼 더 이상 좋은 소설을 쓸 수 없다는 자조감에 빠져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이혜진이라는 여자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에 이끌리던 이정훈은 우연찮게 그녀의 일기장을 몰래 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녀가 그녀의 연인 김혁수에게 크게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을 계획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김혁수와 함께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괴로워하는 그녀를 위로해주던 그는 그녀의 격정적인 감정에 이끌려 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어지러움으로 가득 찬 머리가 입술의 감각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녀의 입술이 내 입속에서 끊임없이 거친 탐험을 하는 사이, 내 입술은 다시 감각을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던 어떤 욕망이 처음으로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껍질이 벗겨진 욕망은 영원히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내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 그다음 순간, 내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세상의 어떤 힘도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다음에 어떤 징벌이, 어떤 잔인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p.95) 이렇듯 이정훈의 사랑은 뜨겁게 시작되지만, 이혜진이라는 여자는 처음부터 어찌할 수 없는 강한 비극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에 이 둘들의 사랑은 순탄치 않다. 이들의 사랑은 제주도 서귀포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는 데로 이어지지만, 이혜진이 이정훈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재를 서귀포 앞 범섬 앞바다에 뿌려줄 것을 부탁하면서 여전히 불안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결국 일주일간 취재차 인도 여행에 다녀온 이정훈은 그녀가 자신과의 지순한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미국에 있는 김혁수에게로 떠났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크게 절망한 이정훈은 그 후 1년간 이혜진을 그리워하면서 술에 의존하거나 다른 사랑을 찾거나 여행을 하는 등 마냥 세월이 흐르기만을 바라는 방황의 시간을 보낸다. 이렇듯 이 작품은 한 여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한 남자의 사랑이 현실적 장벽에 부딪쳐 안타까운 순간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랑을 “문자와 언어를 초월하는, 서술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아주 성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이정훈은 그녀와의 추억을 그리워하면서 또한 그녀가 곁에 없는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스스로 자기파멸적 삶을 이어간다. 이러한 다소 고전적인 사랑의 방식을 작가는 속도감 있는 문체와 솔직한 언어로 그리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진부한 사랑 이야기에 빠지지 않게끔 하는 문학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이들이 펼쳐내는 지순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은 가슴속 깊이 스며들면서 진한 여운을 남긴다. 사랑과 문학, 그리고 예술이 빚어내는 오묘한 삼중주 이혜진과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 못지않게 현실 속에서 이정훈을 부단히 괴롭히는 것은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다. 그는 대중의 인기만 좇는 엉터리 대중소설에서 벗어나 과거 창작 초기처럼 제대로 된 소설을 쓰기 위해 문학적 열정을 불태운다. 그간 신문연재 소설에 쫓겨 새로운 경험이나 느낌을 충전해놓지 못한 채 이제는 소재 고갈에 치달은 자신의 처지에 고뇌한다. 이는 곧 이정훈의 입과 눈을 통해 말해지는 홍상화 작가의 치열한 작가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작품 중간 중간에 배치한 에피소드나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서도 진정한 문학을 추구하는 작가의 혼을 엿볼 수 있다. 다층적 삶의 이면과 존재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는 작가의 혜안이 작품 곳곳에서 번뜩이면서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점도 이 소설의 완성도를 높이는 요인이다. 그때 나는 불멸의 단편소설 하나 남기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다. 명예도, 부도, 대중적 인지도도, 다른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무명이었지만 행복했다. 그리고 그때는 누가 뭐라 해도 진정한 소설가였다.(p.9) 이혜진이 김혁수 곁으로 떠난 후 절망 속에서 방황의 시간을 보내는 이정훈에게 “그녀를 잊기 위해서는 그녀에 대해서 소설을 써보라”고 심미정이 권하지만, 이정훈은 바로 소설로 옮기기 못한다. 그녀와의 추억이 너무 생생해서 그 처절한 고통을 이겨내고 도저히 소설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영원히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 서귀포 밤섬 앞바다 바닷속 암벽에 그녀의 전신상을 새긴다. 이정훈이 바닷속 암벽에 이혜진의 미소를 새기는 데 심취한 나머지 잠수병에 걸려 다리가 불구가 되면서까지 조각이라는 예술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를 이룬다. 잠시 후 그는 입에 문 레귤레이터를 다시 떼었다. 그리고 암벽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벽 한 곳을 두 손으로 잡고 몸부림치며 얼굴을 그곳에 비벼댔다. 그동안 그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고, 주위의 모든 것도 따라서 숨을 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돌아와 레귤레이터를 입에 물고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주위의 모든 것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그는 손전등으로 그가 조금 전에 갔었던 벽 쪽을 비췄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아름다운 여인의 전신 조각상이었다. 여인은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p.239) 그리고 사반세기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정훈은 “잠재의식 속에 갇혀 있다가 가슴을 통해, 손을 통해, 그리고 펜을 통해 원고지에 옮겨지는” 글쓰기의 고통을 통해 비로소 이혜진을 모델로 한 소설 『범섬 앞바다』를 완성한다. 이혜진을 향한 이정훈의 또 다른 사랑의 결실이 바로 한 편의 소설로 탄생한 것이다. 불구가 된 몸으로 한자 한자 원고지를 메워 나갔을 장면은 문학의 초월성으로 이어진다. 또한 이는 오랜 시간 좋은 소설 쓰기를 갈구했던 소설가 이정훈의 작가적 삶의 완성이기도 하다. “사랑이 바로 최고의 예술이에요. 예술이란 인간이 겪는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지요. 모든 슬픔과 고통과 잔인함까지도……. 사랑이 바로 그런 거지요.”(p.137) 이처럼 이 작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을 조각이라는 예술로, 그리고 처절한 창작의 고통을 깨고 나오는 소설로 승화시켜 영원한 사랑으로 완성해가는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색다른 구성은 너무도 뻔해질 수 있는 사랑 이야기에 풍부한 입체감과 깊이 있는 중량감을 더한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이 마침내 예술로 새겨지고 소설의 옷을 입어 찬란한 빛을 발하는 그 비현실적 장면 앞에서 독자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감동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