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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트의 골짜기 01
언어의 무지개 02 정치의 무늬 03 문학이라는 놀이 04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 05 |
Koh, Johng-Seok,高宗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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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국어 문장가의 뜻밖의 귀환
존재는 역설적으로 부재不在를 통해 더 잘 인식된다. 숨이 막혀봐야 공기의 존재와 가치를 또렷이 알게 되듯, 어떤 것의 소멸과 종말은 그 대상을 우리에게 새롭게 환기시킨다. 그것이 또다른 생성과 탄생의 동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재는 마냥 절망적인 것이 아니다. 오늘날 고종석이라는 한 문장가의 돌연한 절필 선언 앞에서 그저 아쉬워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이 책 《플루트의 골짜기》는 고종석 글의 부재에 대한 갈급한 응답의 산물이다. 모두 다섯 권으로 기획된 알마출판사의 ‘고종석 선집’은 그의 산문세계를 망라하는 시리즈로서, 첫째 권인 단편소설 모음을 시작으로 언어/시사/문학/에세이 등 다방면의 글을 엄선해 묶을 예정이다. 30년 가까운 글쓰기 경력과 스무 권 넘는 방대한 저서를 다섯 권의 선집으로 압축해 그의 글을 한눈에 조망하려는 시도이다. 소설가 혹은 언어학자, 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 등으로 모습을 달리하며 탁월한 글을 써온 ‘문장가 고종석’의 전모를 그려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선집 첫째 권인 《플루트의 골짜기》에는 단편소설 열두 편을 깐깐하게 가려 담았다. 고종석은 그간 두 권의 단편소설집을 단행본으로 펴낸 바 있다. 《제망매》(1997)와 《엘리아의 제야》(2003)가 그것이다. 두 단행본 모두 현재 절판 상태로 시중에서 만나볼 수 없다. 《플루트의 골짜기》에는 위 두 단행본의 가장 정수 격인 작품을 엄선한 것은 물론, 단행본에 최초로 수록하는 작품 네 편까지 망라해서 묶었다. 작품 〈플루트의 골짜기〉〈이모〉〈고요한 밤 거룩한 밤〉〈우리 고장에선 그렇게 말하지 않아!〉는 기존에 문학잡지에서 실린 적은 있지만, 단행본으로서는 일반 독자와 처음으로 만난다. 대표 작품부터 단행본 최초 수록 작품까지 고종석의 소설세계를 한 흐름으로 꿸 수 있다. 박태원과 최인훈을 잇는 에세이소설의 적통 ‘단편의 여왕’ 앨리스 먼로의 2013년 노벨상 수상에서 알 수 있듯이, 단편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새롭게 부각을 받고 있다. 고종석은 이 형식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해왔다. 특히 에세이와 소설이 결합된 듯한 특유의 기법을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로만 함몰되어 점점 황당무계해지는 소설계 경향에 묵직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지적하듯 “수필적인 사유와 문체로 소설적 장르를 구성하는 방법은 박태원으로부터 최인훈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학에 아주 희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문학사 전체를 내려다봤을 때의 관점이고, 현재의 단면만을 놓고 보면 ‘에세이소설’은 분명 드문 스타일이다. 그만큼 스토리텔링, 영화화 등 ‘돈이 되는’ 키워드와는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고종석 소설을 오늘날 되돌아보는 가치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소설 속 화자의 “나는 시인이다. 나는 견자다. 누군가의 가랑이 밑을 지나지 않았다는 건 내 자부심이다. 기품 있게 살자”(109쪽)라는 말처럼, 고종석은 세태의 흐름과는 거리를 두고 에세이소설의 전통을 그 나름의 방식으로 계승해나간다. 수필적 사유가 자아내는 ‘리얼’한 느낌과 더불어, 고종석은 현실의 존재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놓는 방식으로 현실감을 이끌어낸다. 이를테면 《제국》의 저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등장해 가상의 인물 현경우와 담소를 나누는가 하면(129쪽), 시인 김남주의 빈소가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26쪽), 숙취 해소제가 소설의 소재로서 장황하게 상술되기까지 한다(88~89쪽). 상상의 존재가 현실의 기표 아래 놓이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누이의 이메일 주소는 giuliana@club-internaute.fr이다. 그 주소로 무언가를 써 보내보라. 누이가 당신에게 답신을 해줄지는 모르겠으나”(81쪽)라는 대목이 대표적이다(실제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고종석 소설에서 현실/상상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모호성을 통해 상상은 강한 현실성을 얻고, 현실은 상상을 통해 비약한다. 인간을 향해 나아가는 동심원적 파문 표제작인 〈플루트의 골짜기〉의 ‘나’는 고종석 단편 주인공들의 정서를 대표하는 듯하다. 즉 비정한 삶 속의 외로운 실존, 속물적인 타락과 허무주의적인 현실 긍정 등이 그것이다. 〈플루트의 골짜기〉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라는 캐릭터로써 이를 형상화했다. 잘 알려졌듯 독일 네안데르탈(네안데르 골짜기)에서 발견된 두개골은 호모사피엔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적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인간 이전의 ‘야수’가 아니었다. 곰의 허벅다리 뼈로 플루트를 만들 만큼 음악적 지능이 있었고, 따라서 언어적 지능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석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재에도 일부 멸종하지 않고 현생인류와 섞여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가정하고 소설적 상상을 펼친다. 이 네안데르탈인과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이 단편 곳곳에 포진해 있다. 즉 홀로된 이, 소멸되어가는 이, 주변으로 밀려난 이들의 조용한 슬픔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누이가 죽거나 멀리 떠나가고(〈제망매〉〈누이 생각〉), 아내에게 이혼당하거나(〈엘리아의 제야〉) 아예 결혼하지 않고 옥탑방에서 시를 쓰며 혼자 살아간다(〈이모〉). 때로 주인공들은 감정에 겨워 격해지기도 하는데, 누군가는 불혹이 되도록 아버지를 증오하고(〈사십세〉), 누군가는 딸의 실명失明에 서럽게 흐느낀다(〈아빠와 크레파스〉). 이들은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방인’의 정서를 가지고 세상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나 “신이, 누구한테서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고 몽땅 빼앗아 가버리는 경우는 없”다(451쪽). 고종석의 인물들은 체념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이끌어내는가 하면(“체념의 가장 큰 이점은 세상만사를, 그러니까 자신의 삶까지를 포함해서 세상만사를,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인 것 같아요”[56쪽]), 세상의 금기를 서정적으로 넘어서며 친족-타인과 결합하기도 한다(“내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흐무러지고 있었다. 나는 누이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누이는 제 입술을 내 입술에 가볍게 포갰다가 뗐다”[118쪽]). 나아가서는 이방인-타인과 벽을 허물고 따뜻한 인간애를 느낀다(“민우가 태엽을 돌리니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을 받아든 아이는 다시 한 번 환히 웃었다. … 어쩌면 네팔에도 그 나라 말로 이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있을지 모른다”[410~411쪽]).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나아가는 인간을 향한 동심원적 파문. 그것이 다름 아닌 “인간에 대한 미움과 경멸을 눅이는”(138쪽) 네안데르탈인의 플루트 소리가 아닐까. 이제 ‘피리 부는 사나이’ 고종석을 홀린 듯 따라갈 시간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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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
언어는 사유 세계의 공기와 같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을 운용하고, 다른 정신과 만나는 까닭이다. 그것은 거의 의식되진 않지만 생각을 담는 그릇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생각의 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하지만 언어 자체를 관조하는 지식인은 그리 많지 않으며, 더구나 그것을 대중의 눈높이에서 풀어내는 이는 한국 사회에서 찾기 힘들다. 작가 고종석이 발표해온 수십 편의 언어학 에세이는 이런 맥락에서 교양인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왔다. 이 책은 고종석선집(총5권 기획: 소설, 언어학, 시사, 문학, 에세이)의 둘째 권으로서, 작가 고종석의 사유 세계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언어학 에세이를 엄선해 담았다. 고종석의 단행본 《감염된 언어》《말들의 풍경》《국어의 풍경들》《자유의 무늬》 중에서 선집의 위상에 걸맞은 글 20편을 가려 수록했다. 1998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약 10년의 기간 동안 생산해온 글들이다. 그가 서문 격인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주류 언어학 내부의 좁다란 논점들보다는 언어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는 널따란 논점들과 주로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한국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더러 다른 자연언어들에 대한 탐색도 포함하고 있다.” 고종석은 학술적 딱딱함도, 화려한 말잔치도 아닌 적절한 균형의 지점에서 ‘언어란 무엇인가, 한국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해나간다. 그 과정에서 영어와 한자의 위상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이른바 ‘한국어’의 실체란 무엇인지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치밀한 논의를 펼친다. 또한 표준어/사투리, 외래어/순우리말 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치열한 투쟁의 양상을 살펴보는가 하면, 모음체계의 변화와 심리형용사?부정문?시제 등 한국어의 다양한 풍경들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독자들은 논리적이고 수려한 문장으로 담아낸 눈부신 언어학적 성찰들을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어는 한국어‘들’이다 좋은 학자는 관찰력이 뛰어나다. 언어학자 고종석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학자다. 이를테면 그는 한국어와 한글이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라는 점을 관찰하고, 이를 분명히 구별한다. 즉 한국어는 언어이고, 한글은 이를 표기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또 그는 한국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중요하게 지적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15세기 중엽으로 돌아가, 한글을 창제했다고 알려진 음운학자들과 그들을 이끌었던 세종대왕을 만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시 말해 15세기 한국어와 21세기 한국어는 서로 ‘다른’ 언어다. (…) 우리는 7?10세기에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5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와 19세기 한국인들이 쓰던 언어를 모두 ‘한국어’라고 부른다. 그것들이 서로 ‘다른’ 언어인데도 말이다._16쪽 사실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은 없다. 실제 존재하는 것은 한국어‘들’이다. 그런데 인간 인식의 한계로 인해 이 점을 자주 망각하면서 수많은 담론상의 혼란과 금기가 생겨났다. 즉 지금 여기의 한국어만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이것이 흔들리고 변화하는 것을 ‘타락’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어를 좁은 테두리에 가두면서 발전적 논의를 가로막는다. 고종석은 한국어가 실은 한국어‘들’임을 분명히 강조하며, 민족주의적 색채로 물든 담론의 난마를 헤쳐나갈 강력한 전제를 확보한다. 만일 순수한 한국어, 단일한 한국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지켜야 할 이유도, 회복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외래의 언어를 막을 이유 또한 없다. 고종석이 보기에 언어는 서로 섞이고 스미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그럴 때 지극히 아름답다. 예컨대 18세기 말 이래 시작된 일본 메이지 시대의 번역 열풍이 그렇다. 확실한 것은, 메이지 이래 일본 열도에서 만들어진 무수한 신조어들은 한자라는 매개를 통해 즉각 한국어에 흡수됨으로써 한국어의 어휘를 배가시키고 한국인들의 세계 인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사실이다. 그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해내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말의 풍부화와 그것을 통한 우리 의식의 획기적 전환이 우리에게 좋은 일이었다는 사실마저 변하는 것은 아니다._61쪽 한자어가 일본제라고 해서 그것이 한국어의 굴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는 프랑스어에 미칠 듯한 열등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영어의 그 넉넉함은 프랑스어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국제적 위상을 오늘날 확립하게끔 했다.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빈곤하고 위축되는 것은 민족주의적 열정 아래 ‘순수 한국어’를 고집할 때다.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한다 언어학자 고종석의 미덕은 민족주의적 열정에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그는 민족주의적 욕망을 거부하고, 그보다 정확한 관찰과 사실에 무게를 둔다. 그가 1998년 학계의 일대 파란을 일으킨 복거일의 영어공용어화론을 지지하는 까닭이다. 고종석이 보기에 영어와 한국어를 같이 쓰는 상황은 거리낄 게 없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굴욕적인 일도 아니다. 우리가 이중언어 사용자가 됐을 때, 더 나아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먼 미래에 민족어가 ‘박물관언어’가 됐을 때, 궁극적으로 민족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잠시 정체성 문제에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가 정체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일 것이다. 우리는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는 대신에 세계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인류로서의 정체성을 얻을 것이고, 민족주의의 억압이 풀린 여러 단계의 인간관계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들을 얻게 될 것이다._153쪽 21세기 한국어와 21세기 영어의 거리만큼이나 21세기 한국어와 7세기 한국어의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영어공용어화는 그저 좀더 쓸모 있는 언어를 하나 더 쓰는 것일 따름이다. 더구나 기록언어로서의 한국어는 사실상 번역문에서 그 형태를 잡아나갔다. 단적으로, 한글로 쓰인 한국어의 제1성은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 문?와로 서르 ??디 아니??…”라는 ‘훈민정음 언해’의 번역문에서 시작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만드는 내재적인 순수함 따위는 없는 것이다. 고종석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긴 글에서 이 논쟁이 품고 있는 여러 측면들을 동서양의 사례를 아우르며 세밀히 검토한다. 이로써 한국 사회의 주류 언어관에 민족주의가 깊이 침윤되었음을 밝히는 한편, 한국어에 대한 인식 지평을 확장시킨다.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다 수천에서 1만여에 이른다는 자연언어들 가운데, 사용자 수를 기준으로 한국어는 12?13위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제2 언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언어의 위세는 그에 못 미치는 것이다. 고종석은 이러한 현실과 그 이유를 〈한국어의 미래〉에서 짚어보면서, “교통어로서 한국어의 미래는 밝지 않다”고 냉철하게 진단한다. 이런 현실에 더해 영어공용어화론을 주장하는 고종석은 한국어가 곧 소멸할 것이라고, 소멸해도 된다고 믿는 것일까? 나로서는 민족어가 사라지는 상황이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나는 민족어들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어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이, 민족국가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는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것의 소멸을 추구했던 70여 년의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고도 살아남았다._142쪽 역시나 현실적인 진단이다. 그는 민족어인 한국어가 긴 시간을 두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 아래 그는 한국어의 다양한 현상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한다. 즉 민족주의 없이 한국어를 존중하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무조건적인 예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사실들을 흥미롭게 짚어낸다. 예컨대 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상찬하면서도, 중국 한자의 영향으로 글자를 퇴행적으로 네모 형태로 모아쓰게 된 점을 지적한다. 또한 우리가 무심히 쓰는 말들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한국어의 다층적인 겹과 복잡한 논리를 드러낸다. 가령 ‘이 국은 짜지 못하다’는 가능하지만 ‘이 국은 못 짜다’는 불가능한 이유, ‘신은 내일 죽어요’는 되지만 ‘어머니는 내일 아프셔요’는 안 되는 까닭을 언어학적으로 규명한다. 독자들은 투명한 눈으로 한국어를 가감 없이 바라보는 것과 더불어, 언어와 삶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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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유주의자의 특별한 시선
고종석은 ‘편 가르기’의 범주에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 논객이다. 보수적인가 하면 진보적인 듯싶고, 진보적인가 하면 보수적인 듯싶다. 그러나 이는 편 가르기의 시선으로 그를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일 뿐이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자유주의자’였다. 고종석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입각해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논리를 투명하게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자유주의자는 어떤 모습일까? 제가 동의하는 사상에 대해서는 파시스트도 공산주의자도 기꺼이 자유를 보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제가 증오하는 사상에 대해서까지 너그러운 것이다._198쪽 고종석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좌파와 함께 살 준비가 돼 있는 온건한 우파”라고 규정한다. 우파는 우파이되, 다른 사상적 입장과의 공존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자유주의적인 면모는 국가보안법에 대한 비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고종석이 보기에 국가보안법은 진즉에 폐기되었어야 할 악법이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상의 자유에 족쇄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극우 세력이라면 국가보안법 폐기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당장 고종석을 ‘종북주의자’라고 낙인찍을 만하다. 하지만 고종석은 북한 정권에 대해 선을 긋는 정도를 넘어 강한 혐오감마저 드러낸다. 북한 체제는 현존하는 최악의 체제 가운데 하나다. 어쩌면 역사상 최악의 체제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_39쪽 자유주의자 고종석이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이 있다면, 그건 바로 북한일 것이다. 북한은 좌익 정권도 아니고 사실상 “봉건적 가산국가”로서 나치 체제보다 더 촘촘한 전체주의 국가라는 게 고종석의 진단이다. 동시에 그는 남한의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똑같이 ‘자유’의 잣대를 들이댄다. 길게는 18년, 짧게 잡아도 7년간 박정희가 잔인하게 저지른 군사깡패 두목 짓에는 용서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그는 민족반역자를 넘어선 인륜 파괴자였다._94쪽 전두환 씨에게 내란목적살인죄가 인정됐다는 것은 그가 살인자라는 뜻이다. 그것도 그냥 살인자가 아니라 국헌을 짓밟으며 집단살해를 저지른 인물이라는 뜻이다. 전 씨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는 반인도죄反人道罪의 당사자이자 반역자인 것이다._267쪽 이렇듯 고종석은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를 합리적 언어로 설득력 있게 비판한다. 자칫 한국 사회의 편 가르기 풍토에서 모두로부터 오해받을 수 있는 주장들이다. 그런 만큼 고종석은 세심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언어를 구사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종석 특유의 문체를 태동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건 그는 좌와 우 이전에 자유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일관되게 고수하며, 한국 사회에 독특하고 매력적인 사유의 결을 제시한다. 개인주의의 확산을 바라며 고종석이 옹호하는 자유는 ‘집단의 자유’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다. 그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권리에 제약을 받지 않고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요원할 뿐이다. 고종석은 개인의 자유가 침해받는 장면들을 세밀하게 포착하며, 그 문제점을 새삼 환기시킨다. 이와 관련해 특히 그가 여러 에세이들에서 거듭 지적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호남 차별이다. 영남을 정점으로 한 지역적-‘인종적’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전라도가 있다._375쪽 한국 사회에서 경상도는 말하자면 근본이 있는 집안이고, 전라도는 말하자면 근본이 없는 집안이다._381쪽 일제 때 ‘센징’이 범죄자였듯, 지금은 ‘라도’가 범죄자인 것이다._388쪽 고종석은 전라도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는 집단에 의해 부당하게 차별받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그것이 서구의 인종주의에 비견할 만하다고까지 강하게 비판한다. 호남 차별은 그의 자유주의적 심성을 심하게 거스른다. 고종석은 그 장기적 해법으로 개인주의의 확산을 제시한다. 전라도 차별이나 지역주의의 장기적.궁극적 해결은 개인주의의 확산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한 개인에게서 집단의 표상만을 읽는 집단주의가 융성하는 한,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은 사라질 수 없다. 전라도 차별을 떠받치고 있는 집단주의 정서는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동성애자, 이혼녀, 미혼모 등 모든 문화적 소수파를 차별하는 관행의 사회심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집단으로부터 해방된 주체적 개인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파 속에서 늘어날수록, 소수파들 역시 주체적 개인의 자리를 확보할 가능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_394쪽 고종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라도 사람’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다. 그가 김현이나 김우창 같은 지식인들의 사례를 들며 격하게 공감하는 것으로 볼 때, 그 역시 ‘전라도 사람’으로서 한국 사회에서 겪은 낭패감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이런 곤혹스러움을 사회의 다른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나간다. 그 많은 장애인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 그들은 왜 거리로 나오지 않는가? 우선, 서울이라는 도시에는 장애인을 배려한 시설이 거의 없다. 예컨대 휠체어에 몸을 실은 사람은 지하철을 탈 수도 없고, 화장실을 사용할 수도 없고, 높다란 건물을 쉬이 오를 수도 없고, 지하통로로 길을 건널 수도 없다._302쪽 담배 피우는 여성, 술 잘 마시는 여성, 이혼한 여성, 욕 잘하는 여성, 게으른 여성, 범죄를 저지른 여성, 성적으로 분방한 여성, 탐욕스러운 여성, 시건방진 여성은 동일한 행태를 보이는 남성보다 더 비판받는다. 요컨대 남성에게는 허물이랄 것도 없는 일이 여성에게는 허물이 되고, 남성에게 허물이 될 만한 부정적 가치의 행태는 여성에게는 훨씬 더 큰 허물로 평가된다. 여성이 받는 이런 차별적 시선은 계급과 지위를 가리지 않는다._493쪽 진보정치인이라면, 표를 헤아리기에 앞서 소수자들과 무조건 연대해야 할 테다. 차별 철폐야말로 진보의 핵심 가치이니 말이다._152쪽 고종석은 자신의 경력을 저널리스트로 시작했다. 그리고 서른 해 가까이 저널리스트로 살았다. 그만큼 시사 에세이들에는 그의 본원적 관심과 정체성이 잘 녹아 있다. 무엇보다 고종석의 작가적 시선은 시사적 주제를 그저 한순간 소비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적실성 있는 생각할 거리로 탈바꿈시켜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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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비평을 위하여
이번 선집의 두 축은 시 비평과 산문 비평이다. 전체 목차 구성을 스케치해보면, 1부에서 시 일반에 관한 고종석의 견해를 드러내고 2부에 산문 비평, 3부에 시와 산문 비평을 실었다. 그리고 4부에서 시 비평을 집중적으로 수록하고 5부에서는 옛 시 비평을 시도했다. 6부는 한국문학에 대한 몇 가지 제언들이다. 1부 ‘시의 운명’에서는 시 일반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유럽에서 시는 사멸했으며, 그 본연의 모습인 노래 가사의 형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아직 시가 살아남아 있는 한국에도 곧 닥칠 미래일 것이다. ‘글쓰기의 대중화’ 물결 속에서 아마도 시인의 아우라는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라 그는 전망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다른 산업사회, 탈산업사회의 경우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시의 자리는 좁아질 것이다. 왜 그런가? 다른 무엇보다도, 시의 위세, 시인의 위세가 새로운 세대에게 계속 전수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글쓰기의 민주화-대중화라고 해도 좋다-와도 관련이 있다. 파리에서와 같은 지하철 시를 통해서든 통신망을 통해서든 시를 쓰는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늘어날 수도 있겠지만, 그 시인들은 시 앞에서 경건한 예전의 시인들은 아닐 것이다._20쪽 이처럼 고종석은 1부에서 시에 관한 다소 비관적이고 음울한 진단을 내놓는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3부 이후에 제시되는 시 평론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매력적인 시들을 고종석 특유의 미려한 문장으로 소개하고 분석하고 예찬한다. 즉 1부는 시에 대한 고종석의 전망을 드러내는 것에 더해, 이후 펼쳐지는 시 평론과 강한 대비를 이루며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2부 ‘산문 산책’은 산문가들에 대한 고종석의 평이다. 다음과 같은 이들이 다루어진다; 김현, 전혜린, 정운영, 이재현, 서준식, 김윤식, 최일남. 이 부는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해볼만 한다. 첫째, 솔직한 비평이란 무엇인지 보여준다. 흔히 ‘주례사 비평’이라 하여 칭찬 일색의 비평문화가 형성되어 있는데, 고종석은 이를 간접적으로 비판이라도 하듯 느낀바 그대로를 직접적으로 상술한다. 그(김윤식)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_78쪽 김현의 글은 어쩔 수 없이 낡아 보인다. 사실 이런 ‘낡음’은 이미 김현 생전에도 기미를 드러냈다. 김현의 어떤 글은 정치함에서 김인환만 못해 보이고, 자상함에서 황현산만 못해 보이며, 화사함에서 정과리만 못해 보인다. 생전에 낸 마지막 평론집 《분석과 해석》의 서문에서 김현은 청년기부터 그때까지 자신의 변하지 않은 모습 가운데 하나로 ‘거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거론했으나, 그 혐오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한 것 같지는 않다. 청년 김현의 글에서는, 청년 정과리의 글에선 찾기 어려운 유치함과 허세 같은 것도 읽힌다. 현학은 ‘배운 청년’이 흔히 앓는 병이지만, 청년 김현은 그 병을 좀 심하게 앓았던 듯하다._34쪽 둘째, ‘산문’을 비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한국에서는 주로 ‘시’와 ‘소설’을 비평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두 장르를 위주로 담론이 유통된다. 고종석은 그가 가장 애호하는 ‘시’ 비평을 다음 장으로 유보하면서까지 ‘산문’ 비평을 부각시킨다. 이는 비평의 지평을 확장함으로써 텍스트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로 인해 서가에서 오랜 잠을 자던 산문가들이 깨어난다. 예컨대 다음 대목을 읽고 정운영을 다시 들춰보지 않기란 힘들다. 정운영은 문학 텍스트에 맞먹는 미적 광채를 신문 칼럼에 부여한 드문 저널리스트다. 하긴 그의 문체적 사치는 신문 글만이 아니라 본격 논문에서도 절제를 몰랐다. 그 점에서 정운영은 연구자이기 이전에, 저널리스트이기 이전에, 문장가였다. 설령 그의 글의 메시지가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흐릿하게 퇴색한다 할지라도, 그의 문장은 한국어가 살아 있는 한 또렷이 남을 것이다. 그의 소문난 퇴고벽, 교정벽이 사실이라면, 문장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정운영이 진정 바라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꿈을 이뤘다._49~50쪽 유려한 문장으로 시를 온전히 감당하다 3부 ‘친구의 초상’은 친분이 있는(또는 호감이 있는) 문인과 그 작품에 대한 비평이다. 시와 산문의 비평이 혼재되어 있는데, 동료 문인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고종석의 비평작업이 변천해온 과정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초기에는 저널리즘의 틀로 문학에 접근했고(6~9챕터), 후기로 갈수록 정밀하고 분석적인 비평이 이루어진다(1~3챕터). 특히 시집 발문들인 1~3챕터는 분석의 밀도가 촘촘하고 비평서사의 전개력이 돋보인다. 고종석은 시인-화자가 누구인지 묻고, 그가 사는 세계가 어딘지 가늠한다. 그러고 시인-화자에게 문제되는 것이 무엇이고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세심히 관찰한다. 이를테면 이윤림이나 황인숙의 시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이라도, 고종석의 비평을 보고 나면 해당 시인에게 성큼 다가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는 고종석의 생각들은 잠시 페이지를 멈추게 한다. 불확실한 삶, 아픈 삶은 인간의 삶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받은 것들의 운명일 것이다. 삶의 위태로움에는 성역이 없다. 그 삶 속에서는 연약함이 오히려 힘일 수도 있다_98쪽 나이 듦의 한 징표는 추억으로의 몰입이다. 되돌아보는 것은 나이 든 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모든 추억은 미화의 유혹에 취약하게 마련이지만, 늙음이 바라보는 젊음의 추억은 특히 그렇다._120쪽 4부 ‘시집 산책’은 고종석이 편애하는 시집과 시인들의 목록이다; 김소월, 김정환, 서정주, 신경림, 이성부, 이용악, 황인숙, 김지하, 오규원, 강정, 김남주, 이순현, 최승자, 김종삼, 조윤희, 오장환, 조용미, 정은숙, 고은, 이연주. 체계적이라기보다는 우발적이며,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인 목록인 듯하다. 그러나 그 편애의 온도는 하나같이 뜨겁다. 고종석은 유려한 문장으로 시집의 언어를 온전히 감당해낸다. 특히 그는 비교를 통해 시인들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능하다. 당대 조선 상황에 대한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에 깔고 이 시(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를 읽노라면, 문학의 위의威儀니 하는 것에 냉소적인 나 같은 독자도 문득 자세를 바로잡고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때, 비슷한 시기에 서정주가 현란하게 구가한 감각의 아스라함은 문득 비천하게까지 보인다. 감각의 깊이에서, 《오랑캐꽃》의 시들은 도저히 《화사집》의 시들을 따를 수 없다. 그러나 감각의 격조와 기품에서, 《화사집》은 도저히 《오랑캐꽃》을 따를 수 없다._276쪽 김종삼의 시가 박인환의 시에 견주어 덜 거북스럽게 읽히는 것은 그의 서양 취미가 박인환의 것보다 사뭇 익혀져 있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기호에 대한 퍼스의 분류를 훔쳐오자면, 박인환의 박래어들이 대체로 도상icon이나 지표index에 그친 데 비해, 김종삼의 박래어들은 드물지 않게 상징symbol에 이르렀다. 김종삼은 외국 이름이나 외래어들을 그려다 붙이며 제 교양이나 취향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 의지해 정서적 확장과 공명을 이뤄내는 데 자주 성공했다. 말하자면 김종삼은 그 고유명사들을 장악하고 있었다._349쪽 5부 ‘옛 노래 세 수’는 〈누이제가〉〈서경별곡〉〈청산별곡〉에 대한 평론으로 고종석의 시야가 고대와 중세로까지 확장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청산별곡〉에서는 그의 언어학적인 관심이 도드라지게 나타난다. 이는 언어학자로서의 고종석과 문학평론가로서의 고종석이 합류하는 진귀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후렴구의 경쾌함은 ‘ㄹ’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얄랑셩’의 ‘ㅇ’ 받침소리에서도 온다. ‘ㅇ’은 가벼움과 말랑말랑함의 소리, 탄력의 소리다. ‘ㅇ’은 공〔球〕의 자음이고 동그라미의 자음이다. ‘ㅇ’ 소리는 또랑또랑하고 오동포동하고 낭창낭창하다. 그것은 음절의 끝머리에 대롱대롱, 주렁주렁, 송이송이 매달려 있다. 그것은 아장아장 걷거나 붕붕거리거나 빙빙 돈다._436쪽 6부 ‘우수리’는 한국문학에 대한 사념들로, 오늘날에도 유효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2007년에 쓴 글 〈말의 타락〉에서는 마치 2015년을 예견이라도 한 듯, 비평언어의 과잉과 타락을 강하게 경계한다.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꾸미는 언어는 아름답지 않다. 좋지 않은 것을 좋다고 다독거리는 언어도 좋지 않다. 그것은 타락한 언어다. 지금 예술비평은 그런 타락한 언어의 전시장이다._452쪽 또한 고종석은 외국인에 대한 한국어 교육이 ‘문학 중심’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가 하면, 문학상의 한 부문을 평론에서 논픽션문학 일반으로 넓힐 것을 제안한다. 이처럼 제도를, 문화를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는 그의 정신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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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연민과 성찰의 에세이
다채로운 산문세계를 펼쳐온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선집이 완간되었다. 2014년 1월 《플루트의 골짜기》(소설)부터 시작해 《언어의 무지개》(언어), 《정치의 무늬》(시사), 《문학이라는 놀이》(문학)을 거쳐, 2016년 1월 마침내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에세이)으로 2년 만에 시리즈를 완간하게 된 것이다. 이 선집은 고종석의 30년 가까운 글쓰기 경력과 스무 권 넘는 방대한 저서를 다섯 권의 선집으로 압축하는 야심 찬 기획이었다. 작가 고종석의 저술 가운데 가장 정수가 되는 글만을 엄선해 실었고, 그에 걸맞은 장정과 디자인을 선보였다. 알마의 고종석선집은 그의 산문세계를 탐험하는 독자들에게 더없는 길잡이이자, 연구자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정본이 될 것이다. 이번 책 《사소한 것들의 거룩함》에는 모두 54편의 에세이가 담겨 있다. 사랑, 언어, 여자, 도시, 영화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모두 4부 구성 아래 정연하게 갈무리했다. 선집을 마무리하는 책답게 이른바 ‘고종석 스타일’이 자유로운 형식 아래 총체적으로 드러난다. 즉 지적인 섬세함과 유려한 언어감각, 빼곡한 지식교양이 두루 갖춰져 있다. 거의 대부분의 글이 〈한국일보〉에서 최초 발표된 것들이며, 더러 《인물과 사상》《문학과 사회》《씨네21》 등이 출처인 글도 수록했다. 그의 에세이 글쓰기는 대개 저널리즘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저널리즘을 뛰어넘는 저널리즘이었다. 고종석은 지성적인 에세이의 한 절경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며, 그 사유의 폭과 깊이를 통해 각자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지성적인 에세이의 한 절경 이 책의 에세이들은 명확한 주제어 아래 묶여 있다. 즉 1부는 ‘사랑’(또는 사랑의 말), 2부는 ‘도시’, 3부는 ‘여자’라는 키워드다(4부만 각 편들이 서로 다른 주제다). 이는 고종석이 그저 ‘자유로운 글쓰기’라는 얄팍한 개념으로 에세이를 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특정한 주제를 의식하고서 그 안에서 사유와 언어를 최대한까지 밀고나가려 했다. 이는 흔히 유행하는 에세이라는 이름의 ‘쪽글’과는 스타일과 내용, 품격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지성적인 에세이의 한 절경을 펼쳐 보여준다. 1부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2008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으로, 동명 단행본의 자매편이다. 전작이 단 여드레 만에 쓴 30대 청년의 뜨거움을 보여준다면, 이번에 수록된 글은 보다 성숙한 시점에서 사랑을 바라본다. 이를테면 〈어둑새벽〉에서 고종석은 자신의 연애 경험을 솔직하게 고백하는데, 그의 사랑이 단지 열정과 기쁨만이 아닌 상처와 회한까지 채색된 농익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이는 사랑은, 소시민 혹은 일반인이 자신의 전형성 안에서 그 바깥 언저리를 치밀하게 들여다보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이는 보통 사람이 경험하는 사랑의 양태를 상기시키며 진한 울림을 자아낸다. 2부 ‘도시의 기억’은 세계의 도시들과 작가 고종석이 접속한 기록이다. 베를린, 파리, 로마부터 암스테르담과 샌프란시스코까지 모두 열한 곳의 매력적인 도시에 관한 글이다. 고종석은 도시가 자아내는 특유의 느낌과 더불어 그 도시의 역사적 내력과 상징적 의미까지 두루 짚는다. 이로써 도시는 단순한 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이는 시중에 범람하는 각종 세계여행기의 빈곤한 사유들에 마치 죽비 혹은 단비를 내리꽂는 것만 같다. 그 누가 일본 나라奈良에서 ‘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읽어내고, 베오그라드를 ‘마음 속의 하양’으로 채색하겠는가. 3부 ‘여자들’은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로자 룩셈부르크나 로자 파크스, 아룬다티 로이는 그리 이질적인 선택이 아니라 하더라도, 최진실과 앙투아네트, 니콜 게랭은 무엇인가. 과연 고종석은 이들 ‘여자’들에게서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것을 생각의 주제로 잡아냈을까? 여자들에 대한 진부한 사고의 테두리를 넘어 담론의 넓이와 깊이를 확장해간다는 면에서, 그의 이들 에세이는 또다른 의미의 ‘여성 해방’이라 할 만하다. 4부 ‘우수리’는 그야말로 우수리다. 각 에세이들에 배어 있는 재치와 따듯한 감정은 뒤로 하더라도, 그의 관심이 이토록 다양한 분야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이는 그의 왕성한 지적 활력을 말없이 증언한다. 고종석이 선집 시리즈를 통해 화성학적으로 전달하려 했던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지적 활달함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넷 상에서 아무리 지우려 해도, 그는 어쩔 수 없이 ‘지성인’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