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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이 만난 링컨
노무현
학고재 2001.11.30.
베스트
정치/외교 top100 3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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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서문 왜, 다시, 링컨과 만나야 하는가
프롤로그 백악관으로 가는 길

1.청소년기의 스승들
일찍 잃은 어머니
아버지의 모험정신
새어머니의 사랑과 훈육
장작 패는 사람

2. 청소년기의 스승들
일찍 잃은 어머니
아버지의 모험정신
새어머니의 사랑과 훈육
장작 패는 사람

3. 꾸는 지방의원
기회를 잡은 초선
역량을 시험받다
변호사의 쓴맛 단맛
넓은 무대로 오르는 디딤돌

4. 영광과 그늘
링컨 씨, 워싱턴에 가다
‘뜨거운 감자’ 노예제
짧게 끝난 하원 생활
‘정직한 늙은이 에이브’
정계 복귀를 노리며

5. 혹독한 담금질
긴 논쟁의 뿌리
국론은 찢어지고
어이없고 억울한 낙선
절반은 노예이고 절반은 자유
오판과 궁색한 변명

6.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더글러스와의 대논쟁
정의가 힘의 근원
역사의 대세와 대통령 링컨

7. 갈등이 전쟁으로
섬터 요새의 포연
링컨의 용인술

8.국민의 정부는 이긴다
연방군 총사령관, 링컨
겸손한 권력, 강한 정부

9. 탄환으로 정권을 세울 수 없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오
국민통합당의 출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살아 숨쉬는 정치

10. 외교를 보는 눈
위기를 극복한 통찰력
갈등은 훌륭한 결정의 도구

11. 연방통합과 노예해방
도전받는 온건론
벽에 부닥친 보상안
신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노예해방 선언

12. 하나된 미국으로
신뢰의 리더십과 그랜트 장군
재선의 그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라
관용에서 나온 국민통합
의무를 다하고 역사 속으로

에필로그 성공한 대통령의 길

참고문헌
연보

저자 소개 1

Roh Moo-hyun,盧武鉉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할 정도로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할 정도로 성격은 당차고 맹랑했다. 가난으로 인해 어렵게 진영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상고에 진학하였다. 졸업 이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된다.

군 제대 후 1971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사법고시에 매진하였다. '빨치산 부역 혐의로 옥사한 장인'과 '불투명한 고시생' 문제로 얽혀 양가가 티격태격한 결혼은 "판사안하면 어떠냐"라는 노무현의 엄포로 풀렸다. 1973년 결혼하였으며, 네 번째 도전만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1978년 5월,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1백억원대 소송도 연달아 수임하는 등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1981년 부림사건(대학생 독서서클 검거)의 변호를 맡으면서, 교도소에서 57일간 고문을 당한 한 학생의 시퍼런 몸과 겁에 질린 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이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변론에도 참여하며 투사로 탈바꿈했다.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항쟁 후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고, 1988년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에 입성한 노무현은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 ‘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와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5월 광주 자위권 발동' 연설 때 명패를 던지는 등의 행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이른바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것이다.

1990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자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고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이후 부산에서 3차례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2000년 4월,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하지만 이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지지모임 '노사모'도 결성되었다.

국회의원 낙선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그리고 김근태, 이인제, 정동영, 한화갑 등이 후보로 출마한 국민경선제 끝에 새천년 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공식 선출됐다. 당내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었던 이인제와 호남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는 한화갑을 모두 밀어낸 대이변의 승리였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거치며 노무현의 지지율은 바닥까지 곤두박질 친다. 이에 '후보교체론'까지 나오는 등 입지가 위태로워지지만, 정몽준 후보와의 극적인 단일화로 부활했다. 그리고 결국 200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하지만 드라마틱한 당선 이후, 그는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했다. 집권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이라크 파병' 결정은 그를 지지했던 진보·개혁세력의 호된 질책을 받았다.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이라크 파병 결정이 가장 힘든 결정 중 하나였음을 밝힌바 있으며, 자신의 소신 보다는 '국익'을 생각해야 하는 대통령이라는 위치에서 내린 결정임에 대해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지지율 하락 속에서 총선을 앞둔 2004년 3월, 헌정사상 국회에서 탄핵당하는 첫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총선은 열린우리당의 과반 획득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사실상 국민들에 의해 '재신임'을 받음으로써 이후 참여정부의 개혁정책들을 점화하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정치 실험'과 '개혁 정책'들은 '남-남 갈등', '진보-보수' 갈등 등으로 불리는 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구시대의 막내'를 자임함으로써 다음 대통령에게 새 시대를 물려주고자 한 그의 신념과 정책은 아쉽게도 완성을 보지 못하였다. 임기 말에는 '참여정부 실패론'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진보 세력들로부터는 신자유주의로 서민들의 삶을 더욱 고통에 빠뜨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기간 동안 많은 노력이 있었고, 또한 성과도 있었다. 그는 취임과 동시에 굳은 의지를 가지고 개혁을 해 나가고자 하였다. '평검사와의 대화' 등을 통해 검찰조직 등 권력기관, 사정기관들을 개혁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였으며, '최고 권력자'인 스스로가 권력기관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줄여나갔다. 이는 국가 기관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행정수도 이전'으로 상징되듯이 수도권과 지방 간의 격차를 줄이고, 균형적인 국토 발전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전과는 다른 큰 변화들이 그의 재임기간 동안 일어났다. 또한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는 상황 속에서 복지 지출을 크게 늘려 서민의 삶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으며, 2007년 10월에는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10·4 남북정상회담을 업적으로 남겨, 동북아 긴장 완화-평화 정착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퇴임 후에는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가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꿈은 정치인생 후원자였던 소위 '박연차게이트'와 함께 허물어졌다. 사회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었고 비판과 의심의 여론이 일었던 검찰의 수사를 통해 오랜 지인들과 가족들이 비리의 혐의를 받았으며, 그 자신도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은 세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검찰의 수사가 진행 중이던 2009년 5월 23일 새벽, 유서를 남기고 사저 뒤 봉화산을 경호원 1명과 함께 등산하던 중 아래로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갑작스런 서거 후 시민들의 추모물결은 거대하게 일었다. 봉하마을을 찾는 조문객들은 몇날 며칠 끊어지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되어 추모가 이루어졌다. 또한 '인간 노무현'과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적극적인 재평가 작업이 제기되면서 '노무현'과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새롭게 부각되었고, 노무현의 신념과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그리고 참여정부가 시도한 정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수면 위로 올라 왔으며, 참여정부가 '민주화'라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에 있어서 어떤 역사적 지위를 가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기 위한 논의도 시작되어, 그는 사후에 더욱 의미있는 조명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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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2쪽 | 460g | 153*224*30mm
ISBN13
9788985846899

책 속으로

누구에게도 원한 갖지 말고, 모든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신께서 우리더러 보게 하신 그 정의로움에 대한 굳은 확신을 가지고,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끝내기 위해, 이 나라의 상처를 꿰매기 위해, 이 싸움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는 사람과 그의 미망인과 고아가 된 그의 아이를 돌보고 우리들 사이의, 그리고 모든 나라들과의 정의롭고 영원한 평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모든 일을 다 하기 위해 매진합시다.

--- p.277

그의 위대한 임무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분열과 파멸에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노예제라는 커다란 죄악에서 나라를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나 모두를 성취하기 위해서 충성스런 국민들의 진지한 공감과 강력한 협조가 필요했습니다. 성공에 필요한 이러한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이 없었다면 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연방을 구하는 것보다 노예제 폐지를 우선으로 삼았다면, 불가피하게 미국의 강력한 계층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것이고, 반란을 진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순수한 노예제 폐지의 입장에서 보면, 링컨은 느리고 차갑고 어리석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그가 무관심할 수 없었던 국민들의 정서에서 본다면 그는 빠르고 열성적이고 급진적이었으며, 단호했습니다.

--- p.

그러나 김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은 왜 패배자밖에 없는가?'하는 의문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왜 패배했는가? 역사에서 올바른 뜻을 가진 사람은 왜 패배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 역사에서는 정의가 패배한다'는 역설적 당위로 귀착되었고, 나는 그것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패배하는 정의의 역사-.

역사를 보면 힘 자랑을 하고, 그 넘치는 힘으로 남을 정복하거나 전장에서 승리한 사람은 아주 많다. 칭기즈 칸이 있고 나폴레옹이 있다. 그 밖에 문명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시대를 건너뛰어 그 사람의 사상과 행동이 과연 본받을 만한가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그렇다면 내가 존경할 만한 인물은 누군가. 동서고금을 막론해 인류가 부정할 수 없는 정의의 개념을 내세워 승리하고,바른 역사를 이루어낸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 천년이 지나도 부정하기 힘든 '정의'라는 주제를 가지고 역사를 일군 사람. 그래서 인류에 '정의가 승리한다'는 희망을 제시한 사람이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두에서 성공한 사람이 링컨이었다.

--- p.

1894년 4월 14일 포드 극장에서 미국대통령 중 처음으로 암살된 링컨대통령의 서거 후 대표적인 노예해방론자인 프레드릭 더글라스는 링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난과 역경 가운에 연마한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 그의 증언이 이 책을 대변하고 있다.

--- p.

출판사 리뷰

저자 노무현이 본 링컨의 덕목
대부분 그랬듯이, 저자가 링컨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에 읽은 위인전을 통해서였다. 역경을 이겨내고 훌륭한 사람이 된 '정직한 위인'의 이야기. 저자는 정치에 입문한 뒤 《미국사 개설》과 같은 책을 통해 현실정치인으로서의 링컨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의 개표가 진행되고 있던 밤, 그에게 다가온 링컨은 새로운 키워드였다. 남군에 대한 연방군의 승리가 계속될 즈음에 재선된 링컨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은 저자의 가슴을 흔들었다. '증오와 내침'이 아닌 '사랑과 관용'을 이야기한 링컨에게서 저자는 국민통합의 지도력을 발견한 것이다.

견고한 이상을 현실에 조화시킨 통합의 지도력을 갖춘 사람
링컨은 자신의 권력에 의지하여 통치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재임중에 여러 집단의 공격을 받았다. 언론은 종종 링컨을 '독재자, 폭군’등으로 불렀다. 고향인 일리노이 주의 신문조차도 “미국의 공직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가장 간계하고 가장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서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는 혼란스런 정치 상황에서도 나라의 분열과 다툼을 염려했고, 연방과 연방의 헌법을 지키는 데 자신의 소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급히 내닫지 않으며'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지켰다. 정당성을 내세워 힘으로 장악하려 하지 않았으며,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아냈다. 그는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라는 성경 구절(마가복음 3:24-25 [개역한글판])을 즐겨 인용했다. '막강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확고한 정치적 소신, 대중을 끌어안는 논리적인 연설가
링컨에게 정치적 입지를 다져준 계기가 된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과정에서 있었던 거물 정치가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논쟁이다. 노예제와 미국의 미래를 논한 이 논쟁은 당시 미국이 안고 있던 사회 정치적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낸 하나의 사건이었다. 민주당 후보였던 더글러스는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루이지애나 매입지 전체에 노예제를 허용하고, '주민주권' 원칙에 따라 준주(準州)인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의 노예제 도입 여부를 그 지역 주민에게 맡기자는 법안)을 제안했다. 한편 연방 대법원은 1857년 드레드 스콧 판결(Dred Scott Decision)을 내려 준주에서의 노예제를 합법화하여 남부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로써 지역간의 분쟁은 더욱 가속화하게 된다. 어쨌든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제정됨으로써 노예제의 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창설하게 된다. 링컨은 더글러스에 반대하여, 논리적이고 확신에 찬 어조로 심금을 울리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위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제도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사랑한다고 자찬함으로써 말입니다.” 더글러스와의 논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링컨은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로 추대되었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더글러스와의 대논쟁을 통해 노예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이후 대통령의 길에 이르는 발판을 마련한다.

탁월한 인화력과 지도력으로 내각을 이끈 대통령
링컨은 자신을 배격하는 인물일지라도 그 사람의 능력을 존중했던 사람이다. 당내에 확고한 세력기반이 없는 소수파 대통령인 링컨에게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당내 실력자들의 상호 경쟁과 견제를 유도하는, 세력균형 전략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장관들을 휘어잡았다.
국무장관인 수어드(William H. Seward)는 링컨과 함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공화당의 최대 실력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지만 초기에는 링컨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내각의 각료를 선임할 때, 남부에 대한 견해가 자신과 달랐던 체이스(Salmon P. Chase)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고, 남북전쟁 직전에 대통령이 전권을 자신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대통령을 ‘촌뜨기 애송이’로 보았던 그도 곧 링컨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에 이른다. 노련한 정치인 수어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링컨의 리더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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