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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5
증도가 원문 해석…… 11 증도가 해설…… 25 맺음말…… 3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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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결국 목적지와 그 길과 나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없으니 따로 얻거나 남는 것이 본래 없고 내 삶의 의미 역시 이 속에 은밀하게 들어 있다. 일체 성현(聖賢)이 알려준 최종목적지는 바로 반야바라밀이고 그 존재는 곧 신(神)으로서의 부처이고 그 행(行)을 직접 알려주는 것이 금강경이다. 그 길은 어떠한가를 중도(中道)로서 일관되게 알려주는 것이 신심명이다. 목적지에 도달한 인간으로서의 부처인 나 자신과 노니는 그 자리에 대해 직설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곧 증도가다.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것은 세 경전에 두루 걸쳐 그 길 중간 중간에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세 경전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자기와 인생을 바르고 굳게 재정립하고 동시에 진리의 세계이자 대우주 신령세계인 마하반야바라밀다로 향한 구경(究竟)의 기본지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세 경전을 핑계삼아 『금강경의 재발견』, 『신심명의 재발견』, 『증도가의 재발견』이라는 3개의 논(論)으로써 법(法)과 선(禪)을 근본으로 성속(聖俗)을 원만하게 융합하여 걸림없이 반야(般若)의 도(道)를 밝게 드러내고 그 힘을 알게 되는 필수입문과정을 완성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 누구나 신령세계의 입문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 이치를 깨달아 금생에 나 자신을 완전히 탈바꿈시켜 내생에 원하는 인연을 자유롭게 골라 충분한 복(福)을 갖고 처음부터 훌륭한 성인(聖人)으로서 좋은 데 태어나 일반인과 차별되는 성직자의 모습을 갖추지 않고 화광동진(和光同塵)하여 사람들 마음을 극락으로 만들고 맘껏 즐긴 후 이 땅에 영원한 기쁨을 안겨준 영원한 우리의 부처로 존경받기를 바란다. ---「머리말」중에서 3.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무명실성즉불성 환화공신즉법신 무명의 실제성품이 곧 불성이요 허깨비같은 빈몸이 곧 법신이로다 나의 몸과 무명을 떠나 다른 곳에서는 신(神)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영혼이 부처님의 밝은 광명과 자비심이 아니라 대도(大道)를 어기는 개별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채로 생명의 뿌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무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영혼의 참된 성품은 그 무엇도 아니라 바로 불성(佛性)이다. 불성은 곧 신성(神性)이니 영혼의 참성품은 신이고 부처라는 의미가 된다. 즉, 한마디로 나는 신(神)이고 부처인 사실이다. 그래서 당연하게 무명 가운데서 대광명인 불성이 현전(現前)되는 그 찰나가 깨달음이고 참선(參禪)이며 증도(證道)다. 마침내 여래장(如來藏)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때는 이 현상계와 신령세계가 하나가 되어 있음을 보고 알게 된다. 색(色)과 공(空)이 서로 즉(卽)하고 다름이 없는(不異) 자리의 마음을 체득한 것이다. 그래서 현상계 가운데서 귀신이나 신령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고 불성의 뜻으로 내가 신령세계 속으로 차원을 이동하여 신령들과도 교류하게 된다. --- p.33~34 8.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體中圓 돈각료여래선 육도만행체중원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나 자신의 여래의 모습을 붙잡고 단박에 망심을 떨쳐내버려 순수한 여래로 화(化)하니 지옥에서 천상에 이르는 고행(苦行)과 난행(難行)의 6바라밀을 통해 얻는 일체의 지혜와 공덕과 신(神)과 부처님이 나의 본체로서의 자성(自性)인 여래 속에 이미 대우주 전체와 동일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본다. 단박에 깨치니 수행(修行)은 곧 증득(證得)이고 증득이 곧 수행이다. 당연히 수행에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으며 길도 없고 수행함도 없다. 시작이 곧 끝이고 끝이 곧 시작인 수행을 참선(參禪)이라고 한다. 당연히 참선에는 중생도 부처도 깨달음도 어리석음도 나 자신도 일체 없이 원만(圓滿)함만 있을 뿐이다. 원만함은 곧 신(神)의 모습인지라 참선은 진실로 아신일체(我神一體)가 되는 일이고 이것을 밝게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을 보는 것은 곧 자연스럽게 일체가 원만하게 구족된 것이다. 또한 내가 원만해질수록 신에게 점점 다가가게 된다. --- p.48 15. 諸行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제행무상일체공 즉시여래대원각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제행무상이란 나 자신과 일체의 움직임이 도(道)의 용(用)이 근본이 되어 일어남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 속에 여래의 무량한 자비가 깃들어 있으니 공(空)한 가운데 공하지 않음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속에서 내 영혼이 욕망을 따로 갖고 잠시도 쉬지 못하며 움직이니 전체적으로 천지자연은 질서 가운데 무질서, 무질서 가운데 질서를 이룬다. 그러나 항상 최종적으로 무질서는 천지자연의 대도(大道)의 힘에 의해 가차 없이 소멸되니 이른 바 중생의 고(苦)로서 욕망의 강제파괴다. 그래서 평화로운 안팎의 질서를 위해 내 영혼의 움직임을 그치고 최종적으로는 그 욕망을 소멸시키기 위해 참선 등 온갖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욕망을 버리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은 영혼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멈추어져 뇌파가 안정되고 머리와 마음속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다. 적멸(寂滅)은 개별체로서의 영혼의 움직임이 영원히 사라지고 천지자연의 마음과 하나로 움직이는 상태를 일컫는다. 모든 행, 즉 움직임의 그 본질이 공(空)함을 보게 되면 그것이 곧 여래를 보는 것이니 이는 큰 지혜를 갖는 것이다. --- p.64~65 24.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석자구칭빈 실시신빈도불빈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하다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 않음에랴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福)이 있나니, 하지만 마음이 사라진 자는 도(道)가 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청빈(淸貧)이고 마음이 사라진 것은 두타(頭陀)다. 청빈은 재물복을 마음의 평화로 전환시켜 스스로 안빈낙도를 누린다. 두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어떤 복과 만족과 마음의 평화든 간에 그 무엇을 누리는 자기존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본래 자기존재는 있고 없음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깨닫고 이것들을 담고 있는 마음과 현실을 남김없이 버리고 최소한으로 먹고 살면서 무념(無念)을 바탕으로 오로지 도(道)를 붙잡는 마음 하나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청빈은 무(無)를 즐기고 두타는 공(空)을 즐긴다. 청빈은 내세에 또 물질복을 가져다주지만 고행인욕이 미약하여 도(道)를 이루지는 못한다. 반면 두타는 고행인욕이 극도로 되므로 마침내 도(道)를 이루게 한다. 도(道)는 복(福)을 완성시켜 불변의 극락을 가져다주니 일체를 구족하며 완성된 존재다. --- p.82~83 40. 行亦禪坐亦禪 語默動默靜體安然 행역선좌역선 어묵동정체안연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참선은 행주좌와어묵동정에 구애되지 않는다. 길 없는 길인지라 따로 방법이나 체계가 없는 것이다. 스님의 이 말은 바로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참선수행하는 방법이나 과정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이미 본체를 얻은 상태에서 참선이 저절로 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참선하는 자기가 따로 의식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때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 본체가 편안하니 비로소 행주좌와어묵동정이 모두 진여대용(眞如大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참선에 있어서의 무위(無爲)다. 그러니 주인이 가는 곳에 종이 따라다니듯이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태로 있고 어떤 경계에 처해도 항상 참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참선이 되면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공부되어간다. 본체가 편안하다고 함은 불변(不變)의 부동(不動)을 의미한다. 오나가나 자나 깨나 화두가 늘 붙어 있고 그대로 있어 참선이 잘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이것은 일체 망상이다. 이렇게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되는 과정을 통해서 실제로 자기의 영혼의식까지 일체 소멸시켜나가야만 참선이 되는 것이다. 참선은 두뇌로 하는 것이 아니다. --- p.112~113 48. 住相布施生天福 猶如仰箭射虛空 주상보시생천복 유여앙전사허공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타인에 대한 보시는 당연한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고 은밀한 일이다. 그러므로 더 없이 아름답지만 특별할 것도 없고 드러낼 것도 없으며 마음에 남을 것도 없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사라지지 않고 영원하게 되니 나 자신도 그렇게 된다. 보시의 진실은 내가 나 자신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고 그 공덕을 나 자신에게 주는 것이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보시하는 나 자신과 보시물과 보시대상자의 경계를 벗어나 대우주 차원에서의 존엄성과 품격높은 주체성을 스스로 세우게 되는 것이다. 인연의 의존으로부터 독립되기 때문이다. 보시의 공덕이 오는 경로는 여러 가지가 된다. 하늘(神)과 조상이 주기도 하고 덕본 상대방이 주기도 하고 생기(生氣)가 생겨나 복을 저절로 끌어당기는 것도 있으며 보시의 습관이 복에 복을 부르기도 한다. 공덕의 내용물은 인연(人緣)과 우연한 기회와 자리(위치)를 통해 오게 된다. 이 모두는 대도(大道)의 선물로 근본적으로 법(法)과 마음에 따라 공덕의 크기와 받는 시기가 결정된다. --- p.129 88. 六代傳衣天下聞 後人得道何窮數 육대전의천하문 후인득도하궁수 6대로 옷 전한 일 천하에 소문났고 뒷사람이 도 얻음을 어찌 다 헤아리랴 달마가 인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사를 갖고 와서 혜능에게까지 그것을 전한 일을 말한다. 혜능은 그 뒤로 가사를 전하지 않았다. 달마가 심법(心法)을 전한 뒤 육조 혜능에게까지 내려와 드디어 선(禪)에 대한 믿음이 널리 알려져 굳이 부처님 법의 징표로써 가사를 전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선지식의 인가(認可)만으로도 대중이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올바로 서면 성배(聖杯)나 성의(聖衣)도 그냥 보통 잔과 옷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지 못하니 성스러운 것을 찾아 헤매게 된다. 육조 혜능 휘하에 영가스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선지식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동등하니 도대체 누구에게 의발을 전하겠는가? 만약 한 사람에게만 전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른 선지식은 깨닫지 못한 것으로 또 오해를 하는 경향이 있다. 눈에 보이는 뭔가를 물려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불법이 널리 퍼져 전도(傳道)하는데 많은 걸림돌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법의 혜택을 받는 대중이 많이 줄어든다. 이렇게 보면 혜능이 가사를 더 이상 전하지 않은 것은 진정으로 중생을 위한 것이다. 불법이 중생을 부처님 가사에 영원히 매어두고 떠받들게 하면 불법이 아니다. --- p.212~213 128. 了了見無一物 亦無人兮亦無佛 요요견무일물 역무인혜역무불 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밝고 밝게 보면 보고 보이던 것이 일체 사라지니 지금과 같은 망념과 상(相)의 사람도 부처도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는 부처나 인간이나 무슨 이름을 붙여도 관계없게 된다. 한 물건이니 사람이니 부처니 하는 이름을 붙인 상(相)이 눈앞에서 사라지면서 오로지 대우주에 자기 홀로 더 이상의 밝음이 없이 존재하니 이름하여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한다. 상이 없으니 부처니 신(神)이니 하는 특정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그냥 그 어떤 것도 아닌 존재상태(nothing)가 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게 되니 그 모든 존재상태(everything)가 된다. 여기서 그 어떤 것도 아닌 것과 그 모든 것이 서로 원융무애하게 된다. 이것을 두고 고정됨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 곧 영원불변(永遠不變)이 되니 찰나와 영원, 변화와 불변이 곧 중도를 이룬다. --- p.312~313 정법(正法)과 부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불신의 양변을 모두 떨쳐내고 오로지 자기 자신이 부처님과 불법과 하나가 되어 있음을 스스로 보고 알아서 증득하라는 말이다. 신심(信心)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의미로서 깨달은 후의 완성된 믿음이다. 물론 과정으로서의 믿음까지 일관되게 포괄하고 있지만 그 믿음들도 결과로서의 증득된 믿음의 성품을 포함하고 있는 믿음이지, 별개의 믿음들이 아니다. 예를 들면 이해하는 것도 정확하게 이해하면 비록 증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증득의 결과를 낳게 되어 있으니 증득한 믿음과 별개가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신심즉각(信心卽覺)이다. 이것이 바른 믿음이고 부동(不動)의 믿음이다. 일반적인 우리들의 믿음은 소득심을 갖고 있어 오락가락 믿음이고 세뇌된 믿음일 따름이다. 그래서 믿음이 곧 깨달음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 망념이 일체 떨어져나가버려야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곧 텅 빈 마음이다. 신심즉공(信心卽空)이다. 이 때 대통을 빼앗아버리면 비로소 큰 길의 기나긴 여정이 영원히 끝이 난다. 비로소 숨 한 번 크게 쉬고 가슴을 활짝 열고 하늘을 보며 너른 들판에서 편안히 뒹굴며 마음껏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제 나는 기분 좋게 다시 환생하여 이 자유를 만인이 갖도록 할 것이다. --- p.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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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세계, 마하반야바라밀다로 향한 구경(究竟)의 기본.
반야(般若)의 도(道)를 드러내는 필수입문과정 3부작 완성!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읽어야 할 3권의 책이 바로 『금강경』, 『신심명』, 『증도가』이다. 인생의 최종목적지와 그 자리에 도달한 신(神)으로서의 나 자신과 그 행(行)에 대해 직접 알려주는 것이 『금강경』이고, 그 길은 어떠한가를 중도(中道)로서 일관되게 알려주는 것이 『신심명』이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한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과 노니는 그 자리에 대해 직설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증도가』다. 이 세 경전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 자기와 인생을 바르게 재정립하고, 동시에 진리의 세계인 마하반야바라밀다로 향하는 구경(究竟)의 기본지표이다. 성철 스님 이후, 누구도 함부로 해석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이 세 경전을 저자는 반야(般若)의 도(道)를 드러내는 필수입문과정 3부작으로 완성하였다. 읽기 쉬운 구성, 재미난 예화, 한눈에 쏙쏙 들어오는 탁월한 해설, 깊이 있는 깨달음을 전해주는 『금강경의 재발견』에 이어, ‘불법(佛法)이 전해진 후로 최고의 문자’로 알려진 신심명에 대한 심층 해설 『신심명의 재발견』과, 법(法)과 선(禪)을 양날개 삼아 깊이있게 풀어헤친 증도가 해설『증도가의 재발견』이 바로 그 3부작이다. 법(法)과 선(禪)을 양날개 삼아 깊이있게 풀어헤친 증도가 해설! '내가 나 자신을 계속 향상시켜나가면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는가? 그리고 내 존재와 천로역정인 삶의 영원한 종착역은 도대체 어디일까?' 누구나 한 번쯤 궁금해 할 것이다. 이것을 밝혀주는 글이 바로 『증도가의 재발견』이다. 『증도가』를 반드시 알고 있어야 되는 이유는 현재의 내 존재의 끝이면서 동시에 전혀 차원이 다른 시작점과 내가 궁극적으로 있어야 되는 자리를 자세히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가(永嘉)스님은 6조 혜능의 하룻밤 제자로서 단 한 번 만남과 헤어짐에 6조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되었다. 『증도가』는 영가스님이 도를 확철하게 깨친 경계를 시가(詩歌)형식으로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을 보면 크게 자기가 걸어온 길과 진리를 증득하고 누리는 한가로운 경계, 그리고 우리를 염려하고 한없는 용기를 주는 따스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구절 한 구절이 노래하듯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한 내용들이다. 가히 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는 자리의 표준으로 삼을만한 것이고, 실상이며, 구경각(究竟覺)을 온몸으로 성취한 인간부처와 나 자신의 본래면목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반야(般若)의 도(道)를 드러내는 필수입문과정 3부작의 최종 완성작인『증도가의 재발견』에서는 법(法)과 선(禪)을 양날개 삼아 『증도가』를 자유롭게 풀어헤쳐 깊이 있게 밝혀놓았다. 나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자만을 접고 두 눈을 부릅뜨고 자기를 바라본다면 내 존재의 끝은 어디인지를 깨닫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증도가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와 탁월한 해설! 『증도가의 재발견』이 이전의 다른 증도가 해설이나 강독과는 다른 점은 법(法)과 선(禪)을 넘나드는 깊이 있는 사유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누비는 저자의 탁월한 해석에 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법(法)과 선(禪)을 양날개 삼아 (증도가를) 깊이 있게 풀어헤쳐 놓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법(法) 곧 불법(佛法)에 대한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선(禪) 곧 수행과 정진을 통해 깨달음에 이른 저자의 탁월한 지혜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한국 최고의 학부인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인이 취업을 희망하는 1위 기업’인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재가불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20여 년 동안 성불도를 이루어온 저자의 모든 깨달음은 반야(般若)의 도(道)를 드러내는 필수입문과정 3부작인 『금강경의 재발견』,『신심명의 재발견』,『증도가의 재발견』에 집대성되었다.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와 유교,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깊이 있는 사유와 비교불가의 탁월한 해석은 『증도가의 재발견』에서 더욱 빛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