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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광은 그림자를 잠식한다 세트
전2권, 작가 사인 인쇄본, 초판 부록 : 노트
은소로
로크미디어 2016.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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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권]

노을 내리던 가을
푸른 밤
봄을 맞이하는 아침
악마의 계절
씨앗
꽃의 연회
여름비
안개 - 上

[2권]

안개 - 下
폭풍우
되돌아 걷는 가을
새벽 직전의 어둠


[에필로그]
빛 이후
빛 너머

[외전]
역린
아스칼리드
앞으로도 영원히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2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848쪽 | 140*205*40mm
ISBN13
9791159606229

책 속으로

세이시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가, 기가 차다는 듯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굳었다. 비야는 빠진 게 없나 되새겨 보다가 아예 써 두는 게 낫겠다 싶어 책상에 있던 깃펜을 쥐었다. 세이시가 그녀의 손을 막아서더니 신음처럼 되물었다.
“저걸 3주 안에 하자고?”
“아스칼리드 전하 수준으로 익히는 건 무리일 테고, 겉핥기나마 아는 척이라도 하실 수준은 되어야지요.”
“내가, 인간 황태자 따위와…… 수준을…….”
세이시는 넋이 나간 듯이 중얼거렸다. 비야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매우. 묘하게 쾌감까지 느껴졌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발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인간보다 월등하신 분이니까요.”
“어…… 그래…… 그랬지…….”
“자, 그럼 계획을 짜 드리겠습니다.”
비야는 세이시의 손을 밀어내고는 양피지를 당겨 목록을 쓰기 시작했다. 세이시는 얼어붙은 채 그 목록을 보다가 황당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네가 이걸 다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건가? 너 방금 말한 거 다 알아?”
“아스칼리드 전하께서 공부하실 때 내내 곁을 지킨 게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세이시가 제 머리를 짚었다. 편두통이 오는 듯했다. 비야는 뭔가 후련해진 기분으로 목록을 마저 작성했다. 날아갈 듯 유려한 필체가 그녀의 감정을 담고 있었다.
세이시는 우울해진 채로 지금이라도 다 뒤엎고 무시한 다음 도망칠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여전히 시야에 거슬릴 정도로 치렁거리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희미하게 들떠 있는 비야의 손놀림을 번갈아 응시했다. 귀 밑에서 살랑거리는 짧은 금발 아래로 희게 드러난 목덜미가 연약했다. 저 가는 목을 향해 가볍게 손을 휘두르고 뒤돌아서서 나가면 끝이었다. 한낱 반마와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세이시는 마력을 움직이는 대신 안락의자에 풀썩 소리가 날 정도로 주저앉았다.
“그래, 해 보자. 어디까지 갈지.” ---「1권」중에서

“전부, 미안하고, 두렵고, 괴로워서.”
느리게 움직이는 그의 입술이 비야의 손을 타고 올랐다. 검게 물든 새끼손가락에 오래도록 입을 맞추었다.
“지금은 말할 자신이 없어.”
무엇이 미안하고,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괴로운 건지. 왜 이렇게 아픈 얼굴로 그녀를 보는지. 알고 싶었지만 차마 더 물을 수가 없었다. 그가 위태로워 보였다. 비야는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언젠가는 말해 주실 건가요?”
“이 일들이 마무리되고 떠날 수 있게 되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대신에.”
비야는 흔들리고 있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그대로 말해 주십시오. 그것마저 숨기지는 말아 주세요.”
“나는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그가 신음처럼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비야는 흐리게 웃었다.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저도 노력할 테니까요.”
세이시는 가늘게 눈을 뜬 채 그녀를 보았다. 눈부시다는 듯이. 떨리는 손이 그녀의 조그만 얼굴을 감쌌다.
“너는…….”
목이 멘 목소리였다. 그가 숨이 닿을 정도로 제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네게 입 맞춰도 될까?”
“언제는 자기 몸도 아니라서 아까우시다면서요.”
“못 참겠어.”
으르렁대듯 나온 말은 약간 쉬어 있었다. 비야는 당황해서 눈을 깜박였다.
“태자 전하의 몸이잖습니까.”
“이렇게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데 아스칼리드도 양심이 있다면 뭐라 못 할걸.”
세이시가 투덜거리더니 휙 하고 검보랏빛 기운이 일렁였다 사라졌다. 전에 보았던 세이시의 모습으로 그가 그녀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기 직전의 거리에서 그가 멈춘 채 허락을 구하듯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먹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 위로 쏟아졌다. 밤이 찾아온 것 같았다. 그녀를 보고 있는 보라색 눈동자 안에서 붉은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야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2권」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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