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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서문
개정판 서문 일러두기 1. 부도지 - 박제상 2. 소부도지 - 박제상 3. 징심록에 덧붙여 - 김시습 -징심록 추기 4. 징심록에 덧 붙인 뒷날의 기록 - 박금 -요정 징심록 연의 후기 5.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 고찰 - 김재수 6. 한국 상대사와 그 문화 - 김은수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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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씨의 아들 한웅씨는 태어날 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천부삼인을 계승하여 계불의식을 행하였다. 웅대한 하늘의 도를 수립하여 사람들에게 그 유래한 바를 알게 하였다. 어느덧 사람들이 입고 먹는 일에만 편중하므로 한웅씨는 무여율법 4조를 제정하여 환부로 하여금 조절하게 하였다. 1조는, 사람의 행적은 언제나 깨끗하게 하여 모르는 사이에 생귀가 되지 않게 하고, 번거롭게 막혀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툭 트여 장애가 하나도 없게 하라, 2조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모으고 쌓은 것은 죽은 뒤에 공을 제시하여 생귀의 더러움을 말하지 않게 하고, 함부로 허비하여 마귀가 되지 않도록 하여, 사람들이 두루 화합하여 유감이 하나도 없게 하라, 3조는, 고집이 세고 간사하고 미혹한 자는 광야에 귀양을 보내 때때로 그 사혹함을 씻게 하여, 사악한 기가 세상에 남지 않게 하라, 4조는 죄를 크게 범한 자는 섬도에 유배시켜 죽은 뒤에 그 시체를 태워서 죄업이 지상에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다.
--- p.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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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은 과거에 전세계의 인류를 통솔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우리는 과거에 인류문화 담당자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으며, 미래 사회를 구원할 이상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
--- p.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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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부 사가들은 번한의 멸망을 고조선이 망한 것이라 하고 번한을 단군조선으로 보고 있는가 하면, 번한 최후의 왕이 기준이므로 은나라의 기자가 단군조선의 왕이 된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번조선 혹은 번한은 단군조선의 제일 마지막 집에 불과하며, 기준은 번조선 최후의 왕일 뿐 단군조선 최후의 왕건은 아닌 것이다.
--- p.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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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은 자기들의 나라를 세계의 중심이라 하여 '중화中華' 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민족들은 모두가 야만이라 하여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생각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사실과는 완전히 다른 왜곡된 주장이다. 중국에 중국인다운 중국인이 세운 나라는 한나라가 처음이었다. 중국신화에 등장하는 반고는 우리 한족의 일파였으며, 그들이 말하는 삼황 즉, 복희와 여와와 신농도 우리 한족이었다. 중국인은 인류학적으로 볼 때 이절적인 민족이다.
--- p.2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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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7절 : 신라 무열왕이 미천하였을 때, 김유신등과 함께 선도산 아래 백결선생의 증손 마령간 선생에게 취업하니, 선생이 언제나 백결 선생의 도로 그들을 가르치고, 항상 부도통일론을 설하며 외래의 법을 극력 배척하였다. 후에 무열왕이 등위하여 유신 및 선생의 아들 용문등과 함께 모의하여 삼국통일의 일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후세에 최치원, 곽여등 여러 현인이 이 집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 p.1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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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 충신 박제상이 지은 《징심록》 15지 중의 제1지
〈부도지符都誌〉는 충렬공 박제상 선생이 삽량주(지금의 경남 양산)의 간으로 있을 때,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에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던 비서를 정리하여 저술한 책이라고 전한다. 한국에서 그 기록 연대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로, 《징심록澄心錄》 15지誌 중 제1지에 해당한다. 《징심록》은 상교上敎 5지인 〈부도지〉, 〈음신지音信誌〉, 〈역시지曆時誌〉, 〈천웅지天雄誌〉, 〈성신지星辰誌〉와 중교中敎 5지인 〈사해지四海誌〉, 〈계불지??誌〉, 〈물명지物名誌〉, 〈가악지歌樂誌〉, 〈의약지醫藥誌〉와 하교 5지인 〈농상지農桑誌〉, 〈도인지陶人誌〉(3지는 알려지지 않음)의 15지로 되어 있다. 후에 박제상 선생의 아들 백결 선생이 〈금척지金尺誌〉를 지어 첨가하고 김시습 선생이 〈징심록 추기〉를 써서 보탠, 그러니까 모두 17편으로 된 책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 원문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이 책 〈부도지〉는 1953년에 박금 씨가 과거에 《징심록》을 번역하고 연구하던 때의 기억을 더듬어 원문에 가깝게 되살려낸 것이다. 영해 박씨 가문과 〈부도지〉의 깊은 인연 박제상 선생이 일본의 목도에서 순절하기 전, 그러니까 적어도 A. D. 419년 이전에 기록된 이 책은, 그동안 영해 박씨 종가에서 비밀리에 전해졌다고 하나 조선조 세조 이전까지는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널리 알려졌던 것 같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사를 보내 부도의 일을 상세하게 물었다고 했으며, 강감찬 장군도 여러 차례 영해를 방문하여 조언을 구했고, 세종대왕도 종가와 차가의 후손들을 서울로 불러들여 성균관 옆에 거주하게 하고, 장로에 임명하여 편전에 들게 했는가 하면, 김시습 선생은 훈민정음 28자를 이 《징심록》에서 본을 취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라와 고려, 조선 초기의 왕들은 영해 박씨에 대해 은근한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부도지〉는 영해 박씨의 몰락과 함께 수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김시습, 조상치 선생과 함께 금화 초막동으로 잠적하여 구은사 구현 중 무려 칠현을 배출해낸 영해 박씨 문중은, 당시 세조의 눈에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보다 더 껄끄러운 존재였기에 끝내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영해 박씨 대소가는 더욱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렸으며, 심지어 선대의 비를 땅 속에 묻어 흔적마저 없애가면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1천 5백 년 만에 빛을 본 희귀 역사서 박금 씨에 따르면, 이 무렵 〈부도지〉는 금강산의 운와 효손공 댁에서 김시습의 손에 의해 포신 계손공의 집으로 옮겨지고, 다시 계손공의 아들 훈 씨가 함경도 문천으로 가지고 들어가 운림산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몇 백 년간 삼신궤 밑바닥에 감춰두고 출납을 엄금하여 박금 씨 대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금 씨는 〈부도지〉를 해방 후 월남할 때 문천 금호에 있는 금호종합이학원에 남겨두고 내려왔다. 그 한이 뼈에 사무친 박금 씨가 자신의 손으로 〈부도지〉를 되살려냈으나, 이 〈부도지〉는 《징심록》 15지 중 단 1지에 불과하다. 박금 씨는 1953년에 울산의 피난소에서 〈부도지〉를 정리하면서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를 계속 출간중이라고 했으나, 지금 그 책들은 찾아볼 길이 없다. 《징심록》의 유실은 비단 박금 씨 개인이나 영해 박씨 문중에만 한을 남긴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 전체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손실과 한을 남겼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박금 씨가 한문으로 쓴 〈부도지〉를 김은수가 번역ㆍ주해한 1986년판에서 한자를 줄이고 읽기 쉽게 다듬은 개정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