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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Ⅰ. 표상, 그는 어떤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는가? 1. 애국가의 작곡가 2. 첼리스트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3.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가 Ⅱ. 발견, 1941~44년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1. 1941년 베를린에서의 안익태 2. 안익태의 귀국계획 3. 에키타이 안의 음악적 캐리어 - 1942년 4. 지휘자 안익태의 전성기 - 1943년 5. 베를린-파리-바르셀로나 : 스페인으로의 피신 6. 일본 음악가 에키타이 안 Ⅲ. 탐색, 음악과 삶, 그리고 일독회 1. 1940년대 일독회의 프로파간다 역할 2. 일독회의 지휘자 에키타이 안 3. 일본 음악가로서 안익태의 문화.정치적 역할 Ⅳ. 환상, 심포니적 판타지 '코리아 판타지'의 수수께끼 1. 1940년 안익태 연주회 비평문의 진실 2. 보이지 않는 '코리아 판타지'의 존재 3. 독일에서의 대표작은 '에텐라쿠' 4. '에텐라쿠'가 '강천성악'? 5. 고노에 히데마로와 안익태의 관계 : 대타에서 경쟁자로 Ⅴ. 신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 두 일화의 문제점 2. 언제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나? 3. 1942년 슈트라우스의 인정을 받는 안익태 4. 안익태와 에하라 고이치의 친분 5. 슈트라우스, 에하라, 안익태 그리고 '만주국 축전곡' 6. 안익태 홍보용 팸플릿(1942/43년)의 정보 7. 다섯 가지 진실 VI. 잃어버린 시간, 독일에서의 안익태 1. 야심이 강한 음악가의 정치적 이용 가치 2. '일본의 토스카니니' 안익태 3. 식민지 음악엘리트의 모순 : 긍정적인 일본 경험과 애국 사이에서 끝맺으며 미주 참고문헌 안익태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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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안익태의 이름을 에키타이 안(Ekitai Ahn)으로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나치시기의 음악인에 대해 연구하던 독일 유학시절이다.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가 나치시기에 어떤 음악활동을 했는지 알기 위해 빌헬름(Kurt Wilhelm)이 쓴 슈트라우스 전기(傳記)를 뒤적이다 일본 황제의 위촉으로 <일본 축전곡(Japanische Festmusik)>을 작곡한 슈트라우스가 일본 대사에게 악보를 전달하는 사진을 보았다.
사진 아래 적혀 있는 글을 앞뒤로 유심히 살펴보니 안익태가 지휘한 빈 연주회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어 있었다. 그에 대한 서술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았지만 타향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움이 앞섰다. 그러나 주중에는 독일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주말에는 카페에서 피아니스트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유학시절, 박사학위 논문과 직접 관련된 테마를 연구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벅찼던 상황이었다. 누가 나치독일에 머물렀고, 누가 왜, 어디로 망명을 떠났으며,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변했는지 등 독일 음악인을 다루는 박사학위 논문이 무엇보다도 우선이었다. 안익태에 대한 호기심과 어떻게 안익태가 슈트라우스 전기에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당분간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귀국 후……그동안 미루어놓았던 안익태와 슈트라우스의 관계에 대한 물음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이차 대전 중 유능한 음악인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과 영국으로, 아르헨티나와 일본으로까지 살길을 찾아 망명을 떠났을 때, 오히려 나치독일의 중심부 베를린으로 들어가서 음악적 성공을 꾀했던 안익태. 아리아인도 아닌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 히틀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막강한 음악권력 슈트라우스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실제 어떤 관계였는가? 독일에서의 안익태는 내게 나치시기의 음악연구가 결코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 아님을 직접 가르쳐주는 듯했다.……안익태를 통해 20세기 초반의 우리 음악사 한 귀퉁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이것이 어떻게 나치독일로까지 이어 지는지 더듬어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치음악에 대해 질문 할 때 보다 우리 음악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짙은 어둠과 안개 속에서 불안하게 헤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 p.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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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독일행이 안익태의 자료를 새로 발굴하는 임무를 띠고 가는지라 독일에 머무르는 한 달 내내 나는 안익태와 숨바꼭질을 할 수밖에 없다. 고작 몇 장의 사진만 남겨놓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시기, 그가 했다는 음악활동을 실제 자료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6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한 외국인의 자료를 독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먼저 어떻게 안익태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예술가의 생애를 한 부분만 확대해서 보는 것과 전체 맥락에서 그 부분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큰 차이가 있다. 나와 마주한 안익태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자료가 충분하게 발굴되지 않아, 그의 음악 활동과 작품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조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사정이니 안익태의 독일시기를 밝히고자 하는 나의 과제는 중요한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음악학 연구자로서 내 역할에 충실하고자 2차 대전 시기 사라진 안익태의 흔적을 찾아내어 그의 한 부분이나마 조명해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나치 시기의 음악을 연구하여 학위를 받은 그간의 공부에 기대면서 안익태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 p.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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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6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새로 발굴한 자료를 토대로 해석한 결과와 안익태의 독일 자료를 발굴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는 보고서가 이중으로 얽혀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책은 독일에서 보여준 안익태의 실제 음악활동과 애국가 작곡가로서의 안익태 이미지가 충돌하는 모순을 보여준다. 컬러사진으로만 알고 있던 안익태의 모습에 새로 나타난 흑백사진의 충격적인 모습이 강한 대조를 이루는 것과 비슷하다. 책의 각 부분은 이 모순의 디테일을 하나 하나 자세하게 보여주고 이를 어떻게 해명할 수 있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잃어버린 시간 3938~1944』의 제1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안익태를 서술하기 전에 음악가 안익태를 큰 테두리에서 살펴본다.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가로서, 또 지휘자로서 안익태의 전반적인 활동에 비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시기는 4,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므로 자칫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제2장에서는 1940~44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그의 연주활동을 재구성하여 전체 윤곽을 그려낸다. 그동안 공란이나 다름없었던 이 시기의 안익태 활동에 관한 것은 지금까지 안익태 연구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일독회(Deutsch-Japanische Gesellschaft, 日獨會)라는 단체의 자료에서 찾은 것이다. 안익태가 독일과 빈에서 지휘한 연주회는 모두 일독회가 관여한 것으로 스승 슈트라우스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안익태의 음악활동에서 골수 나치와 일본 관료들이 주도하는 일독회와 일본 지휘자 고노에 히데마로(近衛秀?), 만주국 관료 에하라 고이치(江原鋼一)의 존재가 오히려 중요하다. 그동안 강하게 주장되어 왔던 〈코리아 판타지〉의 존재와 슈트라우스의 역할은 여기에 대비되어 미미하게 나타난다. 제3~5장까지는 이런 부분들을 클로즈업하였다. 제3장에서는 안익태가 독일에서 연주활동을 하도록 적극 지원한 일독회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문화적·정치적 역할을 살펴본다. 일본 대사관과 총영사관과의 밀접한 관계에서 운영되는 일독회의 존재는 심상치 않은 문제들을 암시한다. 제4장에서는 이 시기에 존재가 묘연한 〈코리아 판타지〉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독일에서 보도된 안익태 연주회 비평 자료를 근거로 그의 레퍼토리가 가지는 의미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음악가이자 안익태의 동경시절 스승이었던 고노에가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와 안익태의 관계를 조명한다. 이어 제5장에서는 스승 슈트라우스를 둘러싼 의문들을 새로 수집한 자료들을 근거로 하여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안익태가 제자로 인정받았는지를 추적해보았다. 안익태와 슈트라우스 사이에서 만주국의 외교 공사인 에하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체 서술이 한 곳에 모이는 곳은 제6장이다. 1938년까지만 해도 민족의 독립을 걱정하던 애국자 안익태와 1942년 만주국의 음악대사로, 또는 일본제국 관료와 협력하는 안익태의 모순 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는다. 또한 이것은 단순히 안익태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닌 일제강점기 시대 음악인 연구가 당면하는 문제이므로 친일/애국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다른 접근방법을 제안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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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 왜곡이 동시에 공존하는 그의 생애와 음악 활동
지금까지의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가, 〈코리아 판타지〉의 작곡가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잘 알려진 ‘안익태’라는 이름과 달리, 그의 생애와 음악활동은 여전히 많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안익태의 유럽 활동 시기의 삶과 음악적 활동은 ‘사실과 왜곡이 동시에 공존한다.’ 그러기에 더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진실과 왜곡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의 삶, 그의 음악적 활동이 하나의 관점과 맥락에서만 서술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정치적인 맥락 속에서만 기억하고, 그를 그 테두리 안에서 고착시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가 한평생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루어낸 문화ㆍ예술적 의미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은 그의 문화ㆍ예술적 성과나 의미를 재발견하는 첫 출발인 셈이다. 먼저 1943년 12월에 함부르크에서 연주했다는 것부터 살펴보면 이미 언급했듯이 안익태는 일본인 자격으로 1943년 4월 22일 일독회 행사에서 한 번 연주한 적이 있다. 그런데 위의 자필기록처럼 같은 해 12월 함부르크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을 가능성은 과연 있었는가? 함부르크 일독회 총무 베커에게 일본과 독일의 문화교류를 위해 힘써달라는 편지를 쓴 안익태가 만약 함부르크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했다면, 이 사실은 바로 일본 총영사나 대사관에 보고되었을 것이고, 이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독회 간부들의 의심을 샀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일독회의 연주회 행사를 지휘할 기회를 잃고 말 터인데, 일독회를 통해 음악적 성공을 꾀했던 안익태가 이런 일을 하지 않은 것은 그 후 일독회 총무가 안익태와 고노에를 베를린 필하모니 지휘자로 추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또 1942년 12월과 43년 8월 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했다고 되어 있지만, 우선 42년 12월에 안익태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연주한 적이 없고, Peter Muck(Hg.), Einhundert Jahre Berliner Philharmonisches Orchester, III, Hans Schneider Tutzing, 1982, pp. 288~308 참고. 단 한 번 43년 8월 18일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연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연주회 프로그램에 따르면 〈에텐라쿠〉를 연주했지 결코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하지 않았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사실과 왜곡이 공존하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하지는 않았더라도 안익태가 베를린이나 함부르크, 빈, 하노버, 프라이부르크 등에서 지휘를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본문 130~131쪽 발견ㆍ환상ㆍ신화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이자 지휘자 안익태! 그는 식민지 조선에서 첼리스트로 출발해, 일본으로 유학한 뒤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했다. 큰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간 안익태는 그때부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음악 인생을 바꾼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했고, 지휘자로서 꿈을 실현하기 위해 1938년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간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유럽에서의 삶과 활동은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된 혼란의 시간이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인가, 일본인 음악가 ‘에키타이 안’인가? 세계적인 지휘자 리하트르 슈트라우스와 안익태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한 곡이 〈코리아 판타지〉가 아니라 〈에텐라쿠〉이다. 왜 그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이 시기는 2차대전, 제국주의, 식민지라는 격동의 시공간에서 일본제국과의 관련된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사실들을 부분적으로 왜곡하고 비역사화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 시기는 안익태의 생애에서 잊혀지고 숨겨져야 하는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기정사실로 알려져 왔거나 안익태에 의해 주장되었던 것도 사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첫째, 이 시기의 안익태는 <코리아 판타지>를 연주하지 않았으며, 그의 대표작은 〈에텐라쿠〉였다. 1942년 홍보용 팸플릿에서 오히려 안익태는 자작곡 <에텐라쿠>,〈교쿠토〉 및 일본 황국 기원 2600년 기념 위촉곡인 이탈리아, 헝가리, 독일 작곡가의 일본 작품을 레퍼토리로 내세워서 일본 음악가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고자 했다. 둘째, 안익태가 독일에서 지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사람은 그의 전기에서 늘 강조되었던 슈트라우스가 아니었다. 안익태의 음악 경력에 중요한 빈 연주회, 베를린 연주회는 일독회가 자신들의 행사로 기획했던 것이며, 안익태는 오히려 일독회를 통해 슈트라우스와 가까워지는 계기를 얻었다. 슈트라우스가 <일본 축전곡>의 지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추천한 경우는 있어도 안익태를 추천한 문서는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12년간 슈트라우스의 제자였다(즉 ‘1938년 제자설’)는 안익태의 주장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1942년 안익태 홍보용 팸플릿에도 없던 슈트라우스의 제자라는 문구가 1943년 2월 빈 연주회 프로그램에 나타나게 되는 과정에서 만주국 고위 관료 에하라 고이치가 큰 역할을 했다. 안익태의 〈만주국 축전곡〉은 슈트라우스가 베를린의 에하라 집에 체류했을 때 대가의 조언을 받았던 작품이며 슈트라우스, 안익태, 에하라 세 사람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다. 넷째, 사정이 생겨 자신이 갈 수 없는 연주회에 안익태를 대신 보낸 사람은 슈트라우스가 아니라 동경음악학교 시절 스승인 고노에 히데마로나 일독회일 가능성이 크다. 〈에텐라쿠〉를 비롯하여 비슷한 레퍼토리와 유사한 지휘 스타일로 고노에의 대타 역할을 했던 안익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노에보다 더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그의 경쟁자가 되었다. 1943년 베를린 필하모니 여름 연주회에 고노에 대신 안익태가 지휘자로 선택된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다섯째, 이러한 성공이 있기까지 안익태는 적극적으로 나치와 일본 관료들에게 협력하고 연주회를 제안했다. 고노에와 달리 든든한 배경이 없었던 그는 1943년 2월 빈에서 <만주국 축전곡>이 다시 연주될 수 있도록 직접 일본 대사관 관료에게 부탁하거나, 1943년 4월 함부르크 연주회를 위해서 일독회 총무에게 자발적으로 제안하고 감사의 편지를 쓰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여섯째,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서 <코리아 판타지>를 지휘했다고 되어 있는 1954년 버전의 자필 정보는 신빙성이 없고, <에텐라쿠>와 같은 주제 선율을 가진〈강천성악〉이 세종조의 멜로디를 주 선율로 했다는 1960년 런던 필하모니 연주회 프로그램의 정보도 오류다. 이런 왜곡된 1차 자료는 안익태 연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본문 228~229쪽 그렇다면 독일시기 안익태의 비밀스러운 과거는 봉인되어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일독회의 존재도, 일본인 에하라의 역할이나 <에텐라쿠>, <만주국 축전곡>의 존재도 철저하게 침묵되어야 했다. 그 대신 슈트라우스와의 오랜 친분 관계는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야 했고, <코리아 판타지>와 <강천성악>의 존재가 더욱 부각되어야 했으리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악보와 프로그램은 보존되었지만, 최고 음악적 캐리어를 증명하는 독일시기 음악회 프로그램이나 홍보용 팸플릿, 이 시기 자작곡의 악보 등이 사라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