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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글
제1부 전란의 시대, 칼끝에 서다 1. 도주 길에 오른 선조 2. 당쟁의 시대(조선에서 양명학 서적을 처음 접하다/양명학은 왜 비판받았는가?/단숨에 승진한 배경/붕당의 조짐/의혹에 쌓인 정여립 사건) 3. 전란의 그림자(통신사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보고/수수께끼의 일본 사신 귤강광/교꾼의 목을 벤 종의지/답서를 둘러싼 실랑이) 4. 유성룡과 이순신(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이순신의 뒤늦은 출사/계속되는 이순신의 불운) 5. 전란대비(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사실인가?/진관법으로 돌아가자) 6. 임진왜란 발발(도체찰사가 되다/무너지는 조선군/운명의 탄금대 전투/패닉 상태의 선조/유성룡 파직되다) 7. 풍전등화(연전연패/풍원 부원군에 제수되다/평양성 함락되다/무너지는 기강) 제2부 통한의 시대, 나라를 다시 세우다 8. 반격(계사를 올리다/평양성 패전과 탈환/배후 차단/삼도 도체찰사/행주대첩과 서울 탈환) 9. 소강상태(강화회담과 유성룡의 반발/서울 수복의 명암/조선과 경략부의 갈등/훈련도감을 설치하다) 10. 유성룡의 영의정 복귀(양명서를 다시 접하니/경략의 간계와 싸우다/경략 송응창을 실각시키다) 11. 국방정책(진관체제로 복귀하다/양반도, 천인도 병역의무를 져야 한다/노비 충군에 대한 반발/벼슬길에 나가는 노비들/이몽학의 난/김덕령 연루되다) 12. 민생정책(대동법을 실시하다/들끓는 반대론/상업을 장려하다) 13. 정유재란 전야(기축옥사 연루자의 신원을 주장하다/강화교섭) 14. 정유재란 발발(이순신 제거되다/원균 출진하다/파죽지세의 일본군/반격/조명연합군의 총공세) 15. 유성룡의 실각(유성룡 공격받다/유성룡이 공격받은 이유/노량해전) 16. 두문불출 서애 유성룡 연보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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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申砬의 탄금대 패전 소식에 부랴부랴 도주 길에 오른 선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을 잃은 채 ‘이모야! 유모야!’하던 선조가 대신들을 잇달아 부른 것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도주하자고 말하기 위해서였다. 신립이 패했다는 보고를 들은 선조는 조선은 이미 망한 것이나 진배없다고 생각했다.
1장 <도주 길에 오른 선조> --- p.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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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훈련원 근무 8개월 만에 충청병사의 군관으로 좌천된다. 그러다가 선조 13년(1580) 7월 전라 좌수군 산하 발포鉢浦(전남 고흥군 도화면) 만호萬戶(종4품)로 승진했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충무공 행록』은 “서애西厓 유 정승만이 같은 동리에서 살던 어린 시절의 친구로서 공이 장수의 재목이라고 알아주었다”라고 전하고 있듯이 유성룡은 권력 실세들과 척이 져 지방으로 쫓겨난 이순신을 생각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4장 <유성룡과 이순신> --- p.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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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은 서울 탈환에 전쟁의 조기 종결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보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군량 확보에 많은 신경을 썼다. 명군은 군량이 준비되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유성룡은 평안 감사 이원익에게 공문을 보내 김응서가 거느린 군사 중에서 전투할 수 없는 인원을 징발해 곡식운반을 맡기고, 평안도 세 고을의 관곡官穀을 배로 청룡포靑龍浦를 거쳐서 황해도로 옮겼다. 황해 감사 유영경에게는 군사들이 행군할 연도沿道에 곡식을 비축해 제공하게 했다.
8장 <반격> --- p.1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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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을 따라 유성룡의 행적을 하나씩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대동법이 그중 하나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시범 실시했다가 100년 후인 숙종 34년(1708)에 전국으로 확대 실시한 대동법은 임란 때 유성룡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행한 제도다. 고종 9년(1871) 대원군이 강행한 호포법戶布法도 마찬가지다. 호포법 실시 이후에야 양반들도 비로소 병역의 의무를 지게 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성룡은 임란 때 속오군束伍軍을 만들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지웠다. 그뿐 아니라 천민들도 종군從軍을 조건으로 면천免賤해주고 나아가 공을 세우면 벼슬까지 주는 신분타파책을 실시했다. 유성룡의 이런 전시 정책에 큰 불만을 갖고 있던 양반 사대부들은 유성룡이 창안한 훈련도감에서 훈련 중인 노비들을 데려가는 행태까지 보였으며, 전쟁 기간 내내 도주하기 바빴던 선조는 탄핵을 유도해 그의 실각을 부추기기도 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포기해가면서 전란을 수습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민생정책을 실시한다. 유성룡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본 군주는 정조다. 그는 『홍재전서』「일득록日得錄」 ‘인물’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 헐뜯는 사람들을 고故 상신相臣(유성룡)이 처한 시대에 처하게 하고 고 상신이 맡았던 일을 행하게 한다면 그런 무리 백 명이 있어도 어찌 감히 고 상신이 했던 일의 만분의 일이라도 감당했겠는가.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필李泌에 대해서, “이 사람의 정신은 몸보다 크다”라고 말했는데 나도 서애에 대해서 또한 그렇게 말한다. 대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이미 우뚝 거인巨人의 뜻이 있었다.” ▶이 시대에 왜 우리는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향년 66세. 조선조 500년 최고의 재상이란 평가를 받은 유성룡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정적으로 여기던 선조는 3일 동안 정사를 중지시킨다. 『서애선생 연보』에는 당시의 상황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대부들이 성남城南 옛집 터에 신위를 마련하고 친척상처럼 통곡을 했다”고 전하며, 시민들이 조정에서 정한 일자보다 하루를 더 철시하면서 “우리들이 이 어진 정승을 잃은 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미수 허목은 「서애유사」에서 “선생의 충성과 갈력竭力과 주선이 없었다면 위험에 처해 쓰러져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선조조의 중흥을 이룩하고서 부자, 형제 등 국민들이 서로 삶을 유지하며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편안한 데 거처하며 직업에 종사하는 바가 진실로 선생의 힘이 아니고서 그 누구의 힘이겠는가”라고 말했다. 유성룡이 황해도에서 소금을 구워 전라도에서 쌀로 바꾸어 도성에 공급하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이 얼마이며, 그가 대동법(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으면 굶어죽었을 백성들이 얼마나 됐겠는가. 전란 극복을 위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신분적 특권까지 모두 타파하려 했던 유성룡. 우리는 왜 유성룡을 읽어야 하는가? 그의 인생을 기존 당파나 양반 사대부들의 시각이 아니라 역사의 보편적 시각으로 되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인생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또한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조선 최고의 재상, 유성룡. 그가 임진왜란과 당쟁을 승전으로 이끈 원동력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능력을 꼽을 수 있다. ① 위기돌파 능력 - 유성룡은 한없이 우유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부드러움과 단호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발생한 여러 위기상황을 회피하거나 모른 체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해냈다. ② 비전제시 능력 - 유성룡은 행정에 박식한 관료이자, 군사에 통달한 병법가이고, 경제에 해박한 학자다. 때문에 그는 전란 극복할 수 있는 전략과 정치ㆍ경제ㆍ민생 등 국가 발전에 필요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다. ③ 탁월한 국정수행 능력 - 유성룡은 대동법, 진관체제, 중강개시, 기득권 타파, 노비 충군 등 여러 제도를 정비하고 실시해 백성들의 공역부담을 덜어주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④ 뛰어난 현안해결 능력 - 유성룡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명분보다는 시급한 현안해결에 매달렸다. 극단이 아닌 중용의 길을 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해결했다. ⑤ 능수능란한 외교력 -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유성룡은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의 전략과 계략을 한눈에 파악한 뒤 이를 역이용해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뛰어난 외교 전략을 펼친다. ⑥ 유연한 사고방식 - 유성룡은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자를 자처했지만 교조적인 신봉자는 아니었다. 모든 학문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는 열린 자세를 갖고 있었다. ⑦ 날카로운 인재발탁 능력 - 유성룡은 하급 무관이라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했고, 두 장수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행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을 승전으로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