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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노래 / 이혼여행 / 에어컨 / 라미 / 쫑 / 바라나시에서 온 편지 / 김용사 죽음 삼촌 / 참새 / 거짓말 / 통표 / 보증인 / 시간을 병 속에 / 벚꽃 / 합창 동경 타지마 씨의 세딸 / 읽지 않은 성경 / 마쓰자키 선생 / 고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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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베어낸 사진, 마음을 저며낸 글
어두운 길 위의 정적과, 길 끝에 켜진 한 점 불빛의 적막이 손에 만져질 듯 생생하게 다가오는 그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사진이란 바로 시간을 베어내는 작업이라는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진가란 사상가다. 카메라란 네 사상을 옮기는 연필 같은 도구다 철학 없이 사진을 찍는 사람은 그저 찍사에 불과하다'는 스승의 말을 가슴에 담아둔 그의 사진에 대한 열정은 무엇보다 뜨겁다. 그는 말한다. '사람의 시체에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나는 울지 않는다. 차가운 렌즈로 들여다보고 손끝의 온기로 셔터를 냉정하게 끊는다. 얼음보다 차갑게'라고.
그에게서 사진이 시간을 베어내는 작업이라면, 글은 아마도 마음을 저며내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이 책에 실린 19편의 글들은 각각 <방랑> <죽음> <동경>에 나뉘어 담겨 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에 실린 그의 짧은 글들은 마치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드라마틱하고도 밀도 있게 전개되고 있다. <방랑>에 묶인 글들은 주로 젊은 시절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얻은 소중한 인생의 경험들이 담겨 있다. 동남아 일대와 인도, 유럽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체성과 인생을 고민하는 청년에게서 느껴지는 진지함과 풋풋한 치기는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한다. <죽음>에는 유년시절을 추억하는 저자의 애틋한 심정이 녹아들어가 있다. 그와 함께 유달리 죽음이 많이 등장한다. 삼촌과 참새, 그리고 아끼는 후배의 죽음을 써내려간 글들에서 저자는 좀더 깊이 인생을 숙고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동경(東京)>에는 어려웠던 일본 유학시절의 이야기와 함께 그의 스승인 마쓰자키 선생의 이야기가 인상깊게 펼쳐진다. 사진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함께 사진가의 길을 선택한 자의 지난함과 행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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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바다가 불러낸 한 사진가의 내면풍경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바다로 뜨는 해만 보았지 지는 해는 본 적이 없다. 내게 바다는 일상이자 희망이었다. 언젠가 변산에 간 적이 있다. 변산의 지는 해를 바라보고 전율했다. 그때 나는 마흔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그후 내가 매혹된 변산바다를 자주 찾았다. 변산바다에서 나의 방랑을 멈출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생의 고비 혹은 전환점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든다. 감쪽같이 매설돼 있는 지뢰를 밟듯 어느날 불현듯 나를 호명하는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잠시 정신을 놓았다 눈을 떠보면 신새벽 후미진 시외버스 터미널이거나 구름이 만져질 듯한 산꼭대기, 혹은 옛 동네 등 낯선 시간과 공간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속울음처럼 깊이 감춰두었던 자신과 비로소 독대하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마흔에 접어들면서 이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곳은 갯벌에서 풍기는 삶의 비린내가 생생한 변산반도의 해지는 겨울바다. 크고작은 죽음을 통해 인생을 알아간 소년, 한때 히피를 꿈꾸었고, 자신만의 철학이 담긴 사진을 찍기 위해 혹독한 수련을 거친 청년, '사람 사는 기 어데 간들 안 똑 같나'라는 어머니의 한마디를 바랑 속에 넣고 방랑길에 올랐던 그는 해지는 변산바다 앞에서 비로소 절망과 좌절, 방랑 속에서 길어올린 인생의 진리와 소중한 인연들을 풀어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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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사진과 글이 겹꽃처럼 피어나는 사진산문집
그리스어의 'photos(빛)'와 'graphien(그리다)'에서 유래한 사진은 1839년 존 F. W. 허셜 경이 처음으로 감광지에 인화하는 과정을 고안한 이래 '제8의 예술'로 불리며 당당히 예술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매김해왔다. 특히 현대로 올수록 그 쓰임새와 중요성은 더욱 커져 거의 모든 영역에서 사진이 요구되고 있다. 출판도 예외가 아니어서 꼭 사진집이 아니더라도 글과 사진이 함께한 책들은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개는 글이 사진을, 혹은 사진이 글을 설명하고 있거나, 꽃잎을 받쳐주는 꽃받침처럼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무게를 실어주기 위해 그 자리에 불려나온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은연중에 주객의 자리가 정해져 있는 형식이 그동안 우리가 자주 접해왔던 책들이다.
김홍희의 사진산문집『방랑』은 거기서 한 발 비껴선 새로운 형태의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객의 자리를 다투지 않음으로써 글과 사진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팽팽한 긴장과 탄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글과 사진이 아무런 관련 없이 동떨어져 자신의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실린 19편의 산문과 46컷의 사진들은 변산바다를 향해 나 있는 두 줄의 레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천변만화하는 자연을 향해 셔터를 누르는 순간 그의 내면에선 지나온 생의 순간들이 플래시처럼 동시에 터진다. 해지는 변산바다 앞에서 생의 순간을 떠올리며 셔터를 누를 때, 그의 정신과 마음의 궤적들은 동시에 영상언어인 사진과 문자언어인 글에 실려 선연하게 인화되는 것이다. 그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소용돌이는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며 감각을 빨아들인다. 이때 글과 사진은 등을 맞대고서 상대가 감지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훑어내리는 또다른 눈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글과 사진은 서로의 장르가 가진 한계를 지우며 새로운 창을 만들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