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등장인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백인백색의 인간 군상들
〈늘푸른 소나무〉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그 인물들에 있을 것이다. 대하소설의 형식을 띤 작품이니만큼 이 작품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는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도 많지만 작품의 뼈대를 이루어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들도 상당수에 이른다.
〈늘푸른 소나무〉는 주인공에 해당하는 석주율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가고 고뇌한 여타의 인물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두루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이다. 또 이들로 말미암아 이 작품은 일제하 조선인들의 삶에 관한 풍부한 보고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독자들은 무엇보다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만나 그들과 생생한 교감을 나눌 수 있다. 그 대표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주율의 스승이자 개신 유학자로서 평생을 바쳐 투쟁적 자세를 잃지 않는 백상충이다. 그는 본래 선비로서 구한말에는 신교육을 받고 새로운 문물에의 소양을 닦았으며 국권을 빼앗긴 후에는 의병으로 종군하여 다리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행동적인 삶을 살아간 지식인이다. 그 사상적 바탕은 비록 구시대를 이끌어온 주자학에 두고 있으나 스스로 구태의연한 사상적 한계를 혁파하고자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온갖 고초를 입고도 백절불굴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 그의 형상은 독자들에게 선연한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백상충과 같은 인물은 그 일개인의 존재 이상의 매개적 역할을 하고 있다. 백상충의 집안은 언양과 울산 근동에서 명망 높은 양반 집안으로서 그의 조부는 울산 군수를 지낸 바 있다. 그러나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노출된 그의 집안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다.
그의 형 백상헌은 지사적인 풍모와는 거리가 먼 유약한 장남으로 가산을 탕진해 가고 있으며 백상충 자신은 국권회복 운동의 일선에 뛰어들어 가문과 일신의 안위는 안중에 없다. 바야흐로 그의 집안은 몰락의 기운에 휩싸여 있는 바 이는 시대의 급류 속에서 수많은 사대부 집안에 찾아든 보편적인 운명이었다. 그런가 하면 양반계급 속에서도 새로운 체제를 수용, 기정 사실화하면서 그에 영합함으로써 이권을 누리는 사람들도 등장한다. 장순후나 한 초시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그에 따라 그들의 집안은 엇갈리는 부침 속에 놓이게 된다.
또한 백상충을 따라 박상진, 박호문, 함명돈 같은 당대의 지사들과 표충사의 애국적 승려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감시와 억압에 시달리면서도 강력한 일제 통치력에 맞서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 간다. 그들을 따라 이야기의 무대는 멀리 간도로까지 확장되면서 당대를 파노라마적으로 그려내는 역할을 한다.
주율을 중심으로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백상충을 주축으로 개신유학파 내의 입헌주의적 경향과 공화주의적 경향 등 당대에 부상하던 국권회복 운동의 흐름이 드러나고 이것이 만주와 중국대륙의 여러 독립운동 조류들로 이어진다면 주율을 매개로 삼아 나타나는 인물들은 당대 조선과 조선인들의 삶의 실상을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 물은 삼월이(흥이 엄마)와 김기조, 두 사람이다.
어린 주율을 좋아하던 삼월이는 백상충의 장인인 조익겸을 따라 부산에 나가 여관을 운영하는 한편으로 조익겸과 불륜의 관계를 맺는 등 시대의 어둠에 동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김기조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는 작품의 말미에 가서는 삶의 행로를 극적으로 전변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 그의 이미지는 극히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명민한 머리로 출세를 꿈꾸는 그이지만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모럴 의식이 없다. 그에게 여자란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유희의 도구일 뿐이고 흥이 엄마의 불륜행각은 제 잇속을 차리기 위한 호재일 뿐이다. 지식은 출세를 위한 장식이 되고 지사들의 투쟁은 자신과는 별 무관한 일이다. 그들은 일찍이 채만식의 〈탁류〉나 박태원의 〈천변풍경〉 등에 나타났던 어둠의 인물들과도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어진과 백상충에게 혹독한 고문을 선사하는 강오무라 형사 역시 민족적 양심을 망각한 존재로서 삼월이와 김기조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어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뿐이 아니다. 주율의 구도자적인 풍모는 종의 신분으로 태어난 그를 불도에 귀의케 하였다가 독립투쟁에 뛰어들도록 하고 감옥을 경유해서는 다시 계몽 및 농민운동가로 나서게 한다. 그의 행동반경이 확장되어 감에 따라 수많은 인물들이 작품을 새롭게 수놓게 된다. 독자들이 그의 어머니 너르네와 아버지 부리 아범, 형들, 누이 율포댁과 선화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당대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과 정서일 것이다.
율포댁과 맺어져 주율의 자형이 되는 곽돌은 비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일로 매진하는 인물로 나타난다. 무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띠고 곽돌 및 주율과 함께 북지로 파견되었던 경후는 이후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시종 주율을 향한 순수한 사랑을 잃지 않고 헌신해 가는 정심네의 형상에서 독자들은 시대의 어둠에 휩쓸리지 않는 순수를 엿보게 된다. '궁형'을 당한 후 개심, 주율의 추종자로 농민운동에 참여하고 마침내는 강오무라를 처단하기에 이르는 김기조의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