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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들어가며 제1장 포로수용소의 감시원 01 타이 포로수용소 - 죽음의 태면 철도 02 말레이 포로수용소 - 석유 기지 팔렘방 03 자바 포로수용소 - '지상왕국' 속의 지옥 제2장 조선인 군속과 포로수용소 01 왜 조선인을 감시원으로 삼았는가 02 포로수용소의 기구와 실태 03 지원인가? 징용인가? 제3장 전쟁범죄재판과 조선인 군속 01 전쟁범죄란 무엇인가 02 싱가포르의 오스트레일리아 법정 - 이학래 씨 경우 03 싱가포르의 영국 법정 - 유동조 · 정은석 씨 경우 04 바타비아의 네덜란드 법정 - 최선엽 씨 경우 제4장 전쟁 책임과 전후 책임 01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과 조선인 전범 02 생활과의 투쟁 03 해결되지 않은 전쟁 책임 후기에 대신하여 참고 문헌 옮긴이의 말 |
Aiko Utsumi,うつみ あいこ,內海 愛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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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 왜 전범이 되었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조선인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전쟁범죄인이 되었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인은 도조 히데키 등 7명이었던 데 비해, 조선이 23명이 BC급 전범으로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왜 조선인에게 일본의 전쟁 책임이 전가되었던 것일까? A급 전범은 ‘특정 지역을 불문하고 연합국 정부들의 공동 결정에 따라 처벌해야 할 중대 범죄인’으로 연합군 점령사령부의 통제 아래 재판과 처벌이 집행됐다. 반면 BC급 전범은 ‘특정 지역에서 통례의 전쟁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일본이 점령했던 대동아 공영권 각지(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49개소)에서 열렸다. 용의자로 체포된 사람은 정확하진 않지만 모두 2만 5,000명 이상으로, 유죄인 사람은 5,700명, 그 가운데 984명이 사형 판결을 받았다. 일본이 전쟁 중에 저지른 행위를 심판했던 이 재판에서 조선인 148명이 전범으로 처리되었다. 조선인 전범 가운데 군인은 단 세 명뿐이었다. 필리핀 포로수용소장이던 홍사익 중장(사형)과 지원병 두 명(유기징역). 나머지 145명 가운데 중국에 통역으로 징용된 16명(사형 8명, 유기징역 8명)을 제외하면 129명 전원이 타이, 자바, 말레이 등 동남아 지역 포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모집된 군속들이었다. 오늘날의 군무원에 해당하는 군속은 당시 이등병보다 못한 존재였다. 그런데 어째서 군마나 군견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 받았던 그들이 전범이 되었던 것일까? 전범 재판의 불합리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일본군과 연합군의 문화와 가치가 충돌하는 최전선에 있었던 조선인 군속들 일본군 조직 내 맨 밑바닥에서 포로에게 명령하고 통솔하는 것이 감시원의 일이었다. 물론 명령은 상관에게서 전달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구타는 일본군의 독특한 문화로 일본 군대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포로와 접하고 살았던 조선인 군속들은, 일본군의 맨 앞에서 포로들과 무릎을 맞대는 지점에 있었다. 바로 그 지점은 일본군과 구미인의 문화와 가치관이 충돌하고 아우성치는 현장이었다. 전진훈(2차 대전 당시 공포한 일본군의 규범)에 세뇌된 일본군은 ‘살아서 포로의 수치를 당하는’ 것을 최대의 치욕으로 생각했다. 옛 식민지인을 포함해 모두가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연합국 군인들에게 적의 손에 잡힌 포로는 전력을 다해 싸운 명예로운 존재였다. 1929년 일본은 제네바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진훈’ 정신에서 포로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든지 자결하든지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제네바조약같이 박애의 마음으로 포로를 대하는 것, 포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명예를 중시하는 것은 전진훈의 정신과 모순되었다. 결국 서명은 했지만 비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포로에 대한 생각 차이는 열악한 수용소 위생 환경, 배급 식량 부족, 강제 노동 등과 맞물려 현장에서 큰 마찰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전범을 지명 색출하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일본이 패전한 후 일본군 포로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과거 연합군 포로들이 지나가며 지명 색출하는 과정에서는, 명령을 내린 상관들보다는 직접 포로들을 감시한 조선인이나 대만인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알려져 있으면 만사 끝이었다. 한편 연합군 측은 포로의 4분의 1이 죽임을 당하는 취급을 받은 것에 대해 더욱 분노했다. 수많은 포로들의 죽음에 대해 패망 후 현장에 있었던 일본인 장교와 하사관, 조선인 군속들이 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몇 월 며칠까지 완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작업 현장에서는 그 어떤 것보다 명령이 우선이었다. 쓰지도 못할 비행장과 철도를 만들어서 수많은 포로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대본영의 작전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명령을 내린 사람들의 전쟁 책임을 과연 철저히 평가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후 동진회의 재판 과정에서 우쓰미 교수가 방위청에서 발굴해 세상에 알린 극비 문서에는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기록돼 있다. 1945년에 9월 17일에 시행된 「포로 취급과 관련, 연합국 측의 심문에 대한 응답 요령 등에 관한 지시」인데, 당시 육군대신 시모무라 사다무가 내린 문서로 일명 ‘시모무라 문서’라 불린다. 포츠담선언에서 포로 학대를 중요한 전쟁범죄로 연합국이 주목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모무라 사다무가 연합국 측의 심문에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 전군에 지시를 내린 것이다. 여기에는 포로 학대의 책임에 관해 ‘포로 학대의 원인은 수용소가 조선인과 대만인에 의해 조직되었고, 그들의 낮은 교육 수준이 포로 학대를 유발한 원인임을 명확히 밝힐 것’이라고 지시되어 있다. 왜 일본군은 조선인을 포로감시원으로 이용했을까 죽어서도 포로가 되지 마라! 이런 생각을 군대 내에서 철저히 주입시켰던 일본군이 남방 작전에서 생포한 연합군 포로의 수는 예상 밖이었다. 1942년 5월 17일 《아사히 신문》에 따르면, 그 수는 26만 1,000여 명에 이른다. 일본은 제네바조약에 서명했지만, 이 조약의 정신을 준수할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1942년 육군성은 조선군 참모장에게 「포로처리요령」을 통보한다. 거기에는 군사상 필요한 노무에 포로를 이용하려는 육군성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129쪽 참조) 또한 조선군 참모장 이하라 준지로가 육군차관에게 보낸 보고서에서는 백인 포로를 사상 선전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황민화 이데올로기를 주입한 백인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어 황군의 위력을 선전하고 대동아전쟁의 정당성에 대해 조선인들에게 심정적 동조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그에 따라 조선인과 대만인을 대상으로 포로수용소 감시원 모집이 시작됐다. 5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조선 전역에서 3,000명을 모집하였다. 그 동기는 3,000명이 제각각 달랐지만, 일본 육군성의 의도는 부족한 인력을 보충함과 동시에 식민지 청년을 백인 포로를 감시하는 데 충당함으로써 내선일체, 황민화의 효과를 거두는 데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 쪽은 BC급 전범 재판에서 한국인 군속들이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당했다는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서류상 국적은 ‘일본’이었고 창씨개명으로 이름조차 일본식이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은 싸움, 해결되지 않은 전쟁 책임 1991년 조선인 BC급 전범 모임인 동진회 회원들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전가당한’ 부조리한 현실을 규탄하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생애 마지막 소송을 제기했다. 사형 집행으로, 자살로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고등재판소, 최고재판소까지 소송을 진행했다. 그러나 1999년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결정되면서 재판을 통해 일본 정부의 보상과 사과를 얻어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 뒤 동진회는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계속하며, 인도적으로 전범 사형수들의 유골을 반환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 활동을 벌였고, 결국 채택되었다. 지금, 전범자들의 유골은 유족의 품으로 또는 한국 망향의 언덕으로 돌아가 있다. 그러나 사과와 보상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