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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 인칭과 대상을 지우면, 사람에게도 계절이 있어, 겨울이 되어 땅에 묻히고 봄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 과거의 모든 이는 죽을 것이고, 미래의 모든 이는 태어날 것이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뒤의 말은 늘 생략된다. 모든 사람이 흙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모든 흙은 사람으로 돌아가야 옳다. 사람으로 돌아가는 흙. 그것의 위치는 희디흰 목련과 검붉게 떨어지는 목련의 사이이고, 얼음과 사막의 사이이고, 내가 너를 만났을 때와 네가 나를 낳았을 때의 사이이다. 우리는 과연 시작된 것인가 아니면 종말된 것인가? 삶에 여러 번의 해후와 결별이 있어 다행한 것은, 밤과 낮의 총합이 노래의 총합보다 충분히 적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였고 너희는 우리였다. 봄에, 죽었던 자가 새잎이 매달린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을 바라본다. 미래의 우리가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면, 미래의 우리는 반드시 과거로부터 죽임을 당하리라. 이것을 나는 세상의 무덤이라 부르겠다. * 이것은 음악(혹은 음악이라 생각되는)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나는 이것을 음악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이 산문인지 시인지 혹은 소설인지는 당신이 판단할 일. * 예전에 사랑하는 어떤 사람이 ‘시작’이 있으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또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이전’이 있게 마련이다*, 라고 썼다. 또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허구’의 반대말은 ‘사실’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빌리면, 허구가 있다면 ‘아직 허구가 되기 이전’이 있을 것이고, 사실이 있다면 ‘아직 사실이 되기 이전’이 있을 것이다. ‘아직 허구가 되기 이전’이 ‘사실’에 해당되는 그 무엇이라면, 허구와 사실은 서로 ‘이것’과 ‘저것’을 구별해낼 수 없는 방법이 없어진다. 이런 글쓰기에 버릇 들여서 허구와 사실을, 음과 활자를, 나와 너를 구별해내지 못하는 글 쓰는 자의 어리숙함과 애매함이 이 책엔 적혀 있다. * 오귀인(誤歸因). 이 단어를 메모지에 써두고 한동안 들여다본다. 잘못 귀인 되는 것은 살아오는 동안 늘 내게 친숙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걸 즐길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가끔 꿈의 것을 현실에서 일어난 일로 착각하고 그곳 사람들의 안부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죽은 얼굴로, 그리고 심약한 여행처럼, 나를 ‘어제’라고 부르던 꿈속의 그 아이가 무척 그립다. 음악에게도 꿈에게도 귀인은 없으니 그곳의 길들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모든 시계에게로 저녁처럼 떨어져 내릴 것이다. * 미천한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독려해주신 권혁웅 시인께 오랜 감사를. ------------------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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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시인이다. <죽음에 이르는 계절, 2004>과 <저녁의 기원, 2007>이란 두 권의 시집을 펴냈다.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를 했으니 올해로 등단 13년 차다. 등단 10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공무원 생활 10년 만에 전업을 선언하고, 지금까지 詩하고만 산다. 아니 소소한 일상이 다소 분주하다고는 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터넷 방송 <문장의 소리>의 작가 겸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시인 강정과 2인 밴드를 여적 말로만이지만 꾸리고 있다. 노래와 연주와 작곡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무언가를 쓴다, 매일 그리고 메모한다. 조연호. 그가 새로운 책 하나를 펴낸다. <행복한 난청>. 저자는 일찍이 자신의 소견을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이것은 음악에 대한 나의 소견이다. 나는 이것을 음악이라 생각하지만, 이것이 산문인지 시인지 혹은 소설인지는 당신이 판단할 일.”이 역설적인 제목의 글에‘음악에 관한 어떤 散 : 文 : 詩’라는 부제를 달아본다. 일명 ‘같기도’와 같은 책이라는 데서 이 책에 대한 고민은 시작되고 끝이 난다. 詩 같기도 하고 散文 같기도 하고 小說 같기도 하고 여하튼 장르다, 말하는 순간 미끄러져버리는 이 묘한 책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옛날 미국에서 죽은 탁월한 에세이스트요, 비교문학자인 차학경의 <딕테>, 그 책을 예로 든다 하면 이해가 좀 쉬워질 것인가. 조연호의 글쓰기에 대해 동료 시인 김행숙은 이렇게 말한다. “시로부터 非조장르에 도달하는, 非장르로서 시가 되는 글쓰기를 조연호의 시와 에세이는 펼쳐나간다. 키냐르의 소설이나 에세이, 또 이를테면 한유주의 소설, 그리고 조연호의 시와 에세이는 장르론적인 벽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들 글쓰기의 사이는 혹은 너머는 서로에게 열려 있는 문이 내포하는 다정한 이웃의 초대, 손짓과 기다림, 걸림 없는 허공, 무한한 파장과 떨림 같은 것들로 채워져 있다. 쓴다, 쓴다는 것에 붙이는 이름과 분류는 어떤 글쓰기의 시간 속에서 너무나 희미해지고 그리고 무관해진다.” 시와 에세이라는 일반적인 장르의 경계가 있다면 조연호는 필시 지우는 자이다. 혹은 낙서하는 자이다. 서로 침투하고 침입하면서 이뤄낸 그 한 덩어리의 던져짐, 그 자체로 존재하는 데 있어 그의 글쓰기는 어떤 새로움이고 어떤 능청스러움이고 어떤 고집이다. 그가 권하는, 향유하는 음악을 우리가 알고 모르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의 글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갈 때 더욱 또렷해지는 나를 보는 것이다. 그 안에서 한없이 느려지는 내 기운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중독이라는 단어를 피로 뼈로 새기는 것이다. 양귀비처럼 붉은데 양귀비처럼 나른한 게 그의 글이다. 아마도 조연호의 <행복한 난청>, 이 散 : 文 : 詩라는 장르도 아니고 장르가 아닌 것도 아닌 새로운 글쓰기의 전형은 우리 문학의 한 전형으로 자리매김할 것이 분명하다. 나는 새로울 때 가장 자유롭다, 라고 할 우리 세대에 있어 이러한 첫 물수제비, 첫 자극이야말로 문학이라는 물 위에 이런저런 다양한 종류의 징검다리를 놓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우물에 첫 돌을 던진 자, 조연호의 글쓰기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값지다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