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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유의 지도
2. 존재의 단계들 3. 발달 4. 어울림 1 5. 어울림 2 6. 지식의 네 영역 1 7. 지식의 네 영역 2 8. 지식의 네 영역 3 9. 지식의 네 영역 4 10. 문제의 두 형태 에필로그 옮긴이의 말 주 찾아보기 |
Ernst Friedrich Schumacher
E. F. 슈마허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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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공리주의는 결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쓸모있는 답을 내놓지 못한다. 파스칼은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오직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며 행복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라고 말했지만, 새로운 사고의 철학자들은 칸트와 더불어 이렇게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이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하고 일관되게 말할 수 없고’ 또한 ‘자신을 진실로 행복하게 해줄 것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결정할 수 없다-그럴 수 있으려면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전통적 지혜는 고뇌 없이도 쉽게 알 수 있는 답을 갖고 있었다. 즉, 인간의 행복은 더 ‘높이’ 올라가 자신의 ‘가장 높은’ 능력을 개발하고 ‘가장 높은’ 사물들에 대한 지식을 얻으며 가능하면 ‘신을 보는’ 것이다. 만약 더 ‘낮게’ 내려가 동물들과 공유한 ‘낮은’ 능력만을 개발한다면, 그는 매우 불행해지고 절망에 빠질 수 있다.---p.25
털없는 원숭이를 비롯하여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정의들이 과학의 이름 아래 세상에 나온 것만큼 현대세계의 야만화에 기여한 것은 없다. 그 누가 그런 동물에게, 다른 털없는 원숭이에게 그리고 바로 자신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동물을 ‘동물기계’라고 이야기할 때, 그들은 곧 동물을 그렇게 취급하기 시작한다. 또 사람들이 자신을 ‘털없는 원숭이’로 생각할 때, 수성(獸性)이 그들 속으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게 모든 문이 열린다.---p.38 ‘조작을 위한 과학’이 지혜, 즉 ‘이해를 위한 과학’에 종속될 때 그것은 가치있는 도구이고 또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혜의 추구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아서 지혜 자체가 사라질 때, ‘조작을 위한 과학’을 종속시킬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데카르트 이래 지속되어온 서양 사상의 역사이다. 오래된 과학-지혜 또는 ‘이해를 위한 과학’-은 근본적으로 지고선, 즉 그것에 대한 앎이 우리에게 행복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진선미를 지향했다. 반면에 새로운 과학은 물질적인 힘을 지향했고, 이러한 추세는 오늘날 정치 및 경제적인 힘의 증대가 과학과 관련된 막대한 지출의 첫째 목적이자 그것을 정당화하는 주된 근거로 간주될 정도로까지 심화되었다. 옛 과학은 자연을 인간의 어머니로 생각한 데 비해 새 과학은 정복해야 할 상대 또는 파내서 이용해야 하는 자원으로 간주한다.---p.85또 ‘조작을 위한 과학’은 더 복잡하게 발전해가면서 거의 필연적으로 자연의 조작에서 인간의 조작으로 나아간다.---p.84 우리는 지식의 제1영역에는 직접 다가갈 수 있지만, 제3영역에는 그럴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게는 우리의 의도가 행동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기 쉽고, 이로 인해 우리의 의도보다는 행동이 더 실제적이기 쉬운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해가 빚어질 수 있다. 만일 내가 제1영역에서, 즉 나의 내적 경험에서만 ‘나의 모습’을 끌어낸다면,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기 쉬울 수밖에 없다. 모든 게 나를 축으로 하여 돌고, 내가 눈을 감으면 모든 게 사라져버린다. 나의 괴로움은 세상을 눈물의 골짜기로 만들고, 나의 행복은 세상을 환희의 정원으로 만든다. 히틀러 치하 독일의 세 최고 권력자 중 한 사람인 괴벨스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멸망하면 세계가 멸망할 것이다.’---p.141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공상과학 소설이며 일종의 기만이기도 하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현대인을 ‘과학’과 ‘종교’의 화해할 수 없는 다툼처럼 보이는 대립 속에 가둬버린 속임수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모든 믿음들을 파괴하고, 인간의 지위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신조를 내세웠다.... 모든 것을 오로지 적응과 생존을 위한 자연선택으로만 설명하려고 하는 진화론은 19세기 유물론적 공리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산물이다. 20세기의 사고가 스스로 이 기만을 없애지 못하는 것은 서양문명의 붕괴를 가져온다고 해도 관계가 없을 엄청난 잘못이다. 어떠한 문명도 안락과 생존의 공리주의를 뛰어넘는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 즉 종교적인 믿음이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p.168 현대 인류의 전능(全能)에 대한 믿음은 점차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새로운’ 문제들은 기술적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경망한 말과 행동, 무질서, 부패의 만연 상태는 남을 것이다. 그것들은 현재의 위기들이 심화되기 전부터 존재했으며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현대의 실험’은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이른바 현대의 실험은 내가 데카르트식 혁명이라고 부른 것, 즉 무자비한 논리를 휘둘러, 자신의 인간성을 혼자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높은 단계’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한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 인간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스스로 닫고, 엄청난 에너지와 재능을 쏟아부으면서 자신을 현세에 가두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현세가 한순간 머무는 곳에 지나지 않고, 천국에 오르기를 거부한다면 지옥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교회 없이 살아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 없이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기쁨이나 고통, 흥분, 만족, 품위 등 무엇을 얻든 ‘보통의 삶’보다 높은 단계와 연결을 유지하고 그것을 향해 발전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 종교 없이 살아가기 위한 현대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현대 이후’의 우리의 할 일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pp.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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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초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이르도록 내게 주어진 지도들은 내가 가장 알고 싶고 또 내 삶의 진로에 제일 요긴하리라 보이는 건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삶의 지도, 지식의 지도가 대다수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 당혹스러움이 오래도록 내게 도움을 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자신의 지각을 의심하는 대신 지도를 의심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비로소 깊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9-10쪽) 그래서 그가 스스로 만든 삶의 지도가 바로 <당혹한 이들을 위한 안내서>이다. 데카르트를 아버지로 받드는 근대 유럽 철학자들이 만든 삶의 지도들은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들만 보여주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참(眞)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류의 위험을 짊어지는 걸 의미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에 자신을 가둬버린다면, 오류의 위험을 최소화할 수는 있지만 동시에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미묘한 것들을 놓칠 위험은 더없이 커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뒤이어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가치가) 가장 높은 것들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흐릿한 지식도 낮은 것들에 대해 얻는 확실한 지식보다 더 낫다”라고 가르쳤다. 존재단계가 높은 것들이 낮은 것들과 똑같이 확실하게 인식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한 사람에 대해서, 한 광물에 대해서만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털없는 원숭이로 전락한 인간 인간의 ‘세계’는 생물학적 필요에 의해 주로 결정되는 동물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풍부하다. 전통 철학에서 인간은 우주 전체를 자신의 경험 안에 가져올 수 있는 소우주(Capax Universi)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진화론을 절대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유물론적 과학주의는 인간을 ‘두드러지게 큰 뇌를 가진 특히 영리한 동물’, ‘도구를 만드는 동물’, ‘정치적인 동물’ 심지어 ‘털없는 원숭이’로 정의하여 인간의 존재단계를 한없이 끌어내렸다. 그리고 현대 인간은 자신을 자기 세계의 가장 낮은 면에, 즉 생물학적 필요, 육체적 쾌락, 우연적 만남에 붙들어매고 ‘생존경쟁’과 ‘권력에의 의지’만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고독하고 더럽고 야만적이고 순간적인 삶”(토마스 홉스)으로 만들어버렸다. ‘과학’과 지혜 슈마허는 현대문명을 그가 ‘이해를 위한 과학’이라고 부른 전통적 지혜로부터 ‘조작을 위한 과학’으로 옮겨온 과정으로 정의한다. ‘이해를 위한 과학’은 인간이 창조의 더없는 영광으로서 신의 모습대로 만들어졌고, 따라서 높은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Noblesse oblige)에 의해 자연을 ‘관리한다’라고 생각한 반면, ‘조작을 위한 과학’은 인간이 하나의 고등동물로서 진화의 우연적 소산에 불과한 존재이며 자연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정복해야 하는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해를 위한 과학’의 목적은 인간의 자기 계발과 자유였지만, ‘조작을 위한 과학’의 목적은 힘의 획득이다. 그래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선언했고, 데카르트는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약속했다. 현대문명의 앞날에 대한 슈마허의 걱정은 ‘조작을 위한 과학’에의 치우침과 그에 따른 ‘이해를 위한 과학’의 소멸에서 비롯한다. 자신에 대한 앎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아직도 나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내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싶어한다면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델포이의 명문(銘文)에 씌어 있듯이 나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플라톤의 <파이드로스>) 모든 지식은 ‘자신에 대한 앎’을 토대로 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또 건전하고 완전한 것이 되려면, ‘자신에 대한 앎’은 두 부분, 즉 나 자신의 내적 세계에 대한 앎-슈마허가 말하는 ‘지식의 제1영역’-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대로의 나 자신에 대한 앎’-지식의 제3영역-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후자가 결여된 전자는 파괴적인 망상이 되고 만다. 진화와 진화론은 다르다 동식물종들의 구조가 변화해왔다는 사실은 지각에서 발견된 화석을 통해 충분히 증명되었다. 과학자들은 방사능 연대 측정의 도움으로 화석들을 역사적으로 차례차례 배열했는데 과학적인 확실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기술(記述)적인 과학 안에서 생물학적 변화를 개괄하는 것으로서의 진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화론은 아주 다른 문제이다. 그것은 생물체의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생명 자체의 탄생까지 설명하려고 덤벼든다. 이것은 아주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 과학적인 잘못이다. 삶은 논리보다 크다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부닥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것을 의미한다. 슈마허는 현대문명의 모순이 모든 문제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논리로 풀려고 하는 데카르트식 접근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문제들을 ‘수렴성 문제’와 ‘발산성 문제’로 나누어, 전자는 반드시 해결되지만 후자는 결코 해결할 수 없고 초월해야만 한다고 설명한다. 일테면 바퀴가 두 개이고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운송수단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같은 기술적인 문제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연구한다고 해도 내놓는 답들이 하나-자전거-로 모아지는 ‘수렴성’문제인데 비해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같은 인간적인 문제는 논의할수록 정반대의 답이 나오기 쉬운 ‘발산성 문제’이다. 어떤 이들은 훌륭한 교육을 위해서는 ‘규율과 복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할 터이고, 다른 이들은 최대한의 ‘자유’가 필요가 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발산성 문제들은 데카르트식의 직선적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삶은 논리보다 크다”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종교 없이 살아가기 위한 현대의 실험은 실패했다 슈마허에게 종교는 세계 모든 곳 모든 민족의 전통적 지혜이다. 인간을 넘어선 존재단계가 있는가? 알려진 역사에서 인류의 절대다수가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존재의 사슬’(Chain of Being)이 인간을 넘어 신을 향해 뻗어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은 모든 이성적 존재를 넘어서고 결코 객체이지 않으며 모든 환경과 우연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완전히 지배하는 페르소나, 즉 ‘제1운동자’(Unmoved Mover)로서의 인격적인 신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었다. 이 인류의 보편적인 믿음은 그 지속과 세기에 있어 매우 감동적이다. 우리가 지금도 가장 현명하고 위대했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모든 인물은 이 믿음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것으로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