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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꽃그늘 아래
2. 멀어지는 집 3. 고갯마루 4. 일식 5. 대낮에 6. 봄날은 간다 7. 검은 돛배 8. 언덕 저편 9. 내게 바다 같은 평화 10. 어귀에서 |
李惠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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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당신 없는 세월은 더 더디 흐르겠지. 빨리빨리 늙었으면 좋겠어. 빨리 늙어서...내 꿈은 그저...그냥, 가만히 앉아서 해바라기하는 거야. 그 옛날 당신 집을 지날 때면, 나는 언젠가 내가 거기서 그렇게 한세월 보낸 것만 같아서, 그 할머니 곁을 지나 불쑥 그 집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지. 그처럼 나는 그냥, 차 소리가 멀리 들리는 한가한 공원, 볕 바른 곳에 가만히 앉아 먼데 눈을 주고 깜박깜박 조는 거야. 잠깐 눈을 뜨면 나무 그림자는 저만큼 옮겨가 있고, 또다시 자울자울 졸다가 모이 쪼던 비둘기떼 후르륵 날아가는 소리에 반짝 깨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후딱후딱 시간을 건너뛰었으면. 끌탕하던 마음도 저며들던 아픔도 그때쯤엔 사위어 고운 재로 날리는데, 나는 그 희부연 속에 앉아. 당신 태워간 그 배 언제 오려는지 먼데 바라보다.
--- p.1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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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네. 겨우네 얼었다 녹았다 하던 땅이 마르더니, 오늘은 흙먼지 날리는 바람도 스산하고, 이제 당신, 당신 같은 혼백들이 슬몃슬몃 없는 몸 일으킬 시간 아니야? 어스름녘이면 이상하게 희뜩희뜩 눈앞을 스치는 듯하던 그것들, 알고 보면 당신 같은 혼령들이었나. 왜 그런다잖어. 귀신은 어스름 깔릴 때 내려와서 새벽닭 우는 소리에 쫓겨간다며? 그럼 낮 동안엔 어디 있는 걸까. 해뜬 날 뒤따르던 그림자 속에 머무르는 걸까? 당신 어디 있다가 오는 거야? 당신이 여기에 와 있기나 한 건지 딴 데서 노니는지, 누가 알겠어. 이젠 미끄러질 리도 없으니 너울너울 날아서 가던 길 마저 가고 있는지 모르지. 당신, 도대체 왜 나한테 온 거였어?
말이 났으니 말인데, 당신하고 결혼하던 날, 나 운 거 모르지? 그때도 당신, 폼은 어지간히 잡았어. 냉수 한그릇 떠놓고 올리는 식인데도 육탈한 지 오래됐을 당신 어머니 아버지에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불러대며 결혼한다고 고했으니까. 그게 있이 살던 사람 법인지는 몰라도 난 좀 우스웠지. 그런데도 당신이 소반 앞에서 뭐 대단한 사당에서나 고하는 것처럼 "이제 이 사람, 풍양 조씨 조성자를 우리 가문의 며느리로 맞아……"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문득 북받치더라. ---pp.172~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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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꽃그늘 아래」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의 2년 여간의 체험이 효과적으로 녹아든 작품이다. 갑자기 죽은 애인 영모의 넋을 찾아 서울에서 족자카르타에 온 여인 서연은 그곳에서 영모를 짝사랑한 후배 윤지를 만난다. 귀신의 세계와 밀접한 듯한 족가카르타의 묘한 분위기와 발리에서의 화장 장례식을 접하며 서연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와 아직 풀어내지 못한 응어리진 상처들을 마주하게 된다. 섬세한 마음의 실마리를 타고 흐르던 이야기는 다음의 마지막 대목에 이른다. "(…) 하수구로 빨려들어가는 물, 물은 한국에서와 반대방향으로 소용돌이쳤다. 적도 아래쪽이라서 그렇다고 했다. 채 건져내지 못한 꽃잎 몇장이 흘러내렸다. 물이 빠지는 바람에 욕조 안쪽 네 면에 점점이 붙은 그것은 발자국, 아주 작은 발자국 같았다."
「고갯마루」는 집안의 재산을 거덜내버린 허랑방탕한 큰오빠의 몰염치를 견뎌내는 여성화자 '내'가 학습지 방문교사로 5년 만에 고향을 찾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고향에서 나는 큰오빠의 실답지 못한 인생이나, 타성바지로 흘러들어와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다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데기 명재의 삶, 누추해져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여기서 나는 "조용하지만 극심한 분노"와 "연민"과 "화해"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현대문학상 심사평에서 김화영 교수는 이혜경 소설의 특징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하나는, 어느 작품도 금방 눈에 튀는 돌출적 인상을 주지 않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높이의 격조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는 점, 그 둘은, 그의 작품을 두번 세번 반복하여 읽는 독자에게 점차로 그 곱씹는 맛을 배가시켜줄 만큼 한땀 한땀 떠가는 문장의 감칠맛이 이야기 내용과 하나를 이루면서 이 작가만의 독특한 분위기 형성에 성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조각조각난 모습을 큰품으로 껴안응려는 연민과 사랑의 깊이가 작품의 여운을 더욱 깊고 길에 이끌어간다는 지적으로서, 이 단편을 잘 설명해준다. 이렇듯 표면적 인간관계 속에 숨겨진 불안과 외로움들을 날카로운 언어와 침묵의 여백으로 엮어가는 작가 이혜경이 독자를 생각하는 소박하지만 단단한 마음가짐을 보자. "어떤 이에게는 무심코 마시는 커피 한잔 값에 지나지 않는 책 한권, 그러나 자신을 위한 책 한권을 마련하는 일에도 짧지 않은 주저와 망설임을 거치는 당신이 있음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당신이 하고 많은 책 가운데 이 책을 집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등줄기가 시리다. (…) 무리하게 공기를 단축하고 부실한 자재를 사용한 건물 (…) 이 책을 읽고 난 당신이 이런 것들을 떠올린다면 어떡하나 …… 불행히도 책은 가전제품이 아니라서 애프터써비스가 불가능하다. 다만 지금 이 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랄 뿐." 문학평론가 진정석이 지적하듯 이번 소설집은 "어느 한군데 치우침이나 편벽됨이 없이 스스로 깊어져가는 이혜경 소설의 한 진경을 보여주는 노작"임에 틀림이 없다. 잔잔하고 차분한 문학적 감동이 날로 귀해져 가는 요즘 세태에 소설의 은은한 향기를 즐길 줄 아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