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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내며
서론- 중장기병에 대한 오해 제1장 약탈전쟁의 동반자 선비족 -도망자 주몽 -유리왕의 선비족 격파 : 사냥 습속과 군사력 -까마귀 전쟁 -교활한 사냥꾼 -국왕 주최 사냥대회 -선비족과 연합해 한군현을 약탈하다 -납치와 인신매매 제2장 선비족, 골리앗으로 성장하다 -조위의 침공과 용병 선비족 -추격자 선비 기병과 도망자 동천왕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세계 -동천왕과 그 부하들 -폭군 봉상왕과 모용씨의 공세 -소금장수 미천왕 -진의 내란과 한사군의 멸망 -고구려, 선비족의 내전에 개입하다 -압록강으로 들어온 곡물운반선 -전연으로 간 소금장수 국왕의 사신 -비운의 고국원왕 -후연의 부활과 모용수 -선비 탁발부의 부상과 고구려 제3장 광개토왕의 강소국 고구려 -담덕의 무기력한 아버지들 -행동의 천재, 광개토왕 -초원에서 낙동강까지 -신라에 몰려온 왜군의 선단 -후연에 들어선 고구려인 정권 -패배의 두려움에 떤 고독한 군주 제4장 장수왕의 초원 진출 -창고에 들어가지 못한 쥐, 북위의 딜레마 -약탈자의 덫 -힘의 균형추가 낳은 암묵의 약속 -내실 있는 음모꾼 풍태후 -유산된 정략결혼과 의도된 사산 -기만 위의 누각 -아차산의 비극 제5장 북위의 분열과 경쟁자 돌궐의 등장 -약탈자가 된 고구려의 거란 기병 -북위의 해체 -폭행당한 고구려 국왕 -경쟁자 돌궐의 등장 -초원에 불어닥친 살육의 광풍 -북주의 침공과 온달의 등장 제6장 고구려의 전마戰馬 생산과 유목민 -고구려의 귀중한 재산 국마 -“병든 말을 사와야 합니다” -국마의 치밀한 관리와 훈련 -“우마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는다” -국마의 수급과 유목민 -토번과 싸우는 당에 말을 수출하다 제7장 돌궐을 둘러싼 수와 고구려의 대결 -고구려의 반격과 수의 통일 -내홍의 불씨에 기름을 부은 사람들 -고구려의 돌궐 포섭과 수의 침공 -협상의 귀재, 을지문덕 -세상의 끝을 향한 수양제의 진격 -당고조, 돌궐을 업고 장안에 입성하다 제8장 유일 강대국 당의 등장과 고구려의 초원 정치 -돌궐의 자체 붕괴 -가련한 고구려 국왕, 건무 -포획된 전쟁기계 -당에 이끌려온 전쟁기계들 -피안개 속의 안시성 -역사 속에 박힌 가시 -단명한 유목제국 설연타 -고슴도치 장창보병의 위력 -소정방의 백제 침공과 신라왕 김춘추 -총알받이부대, 방효태 군단의 전멸 -독재자의 무능한 세 아들 -허수아비의 선택 -난파선에서 내린 대조영 결론-공존할 수 없는 타자, 고구려 부록1 고구려 왕위계보 부록2 5호16국 시대 유목민족 일람표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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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중장기병이 고구려 정복전쟁의 첨병은 아니었다.
“어느 날 완전무장한 중장기병이 초원을 행군한다고 생각해 봤다. 하중 때문에 말도 사람도 심장에 부담을 느낄 것이다. 무거운 갑옷과 마갑은 수레에 실어야 할 것이고, 지구력이 있는 소, 수레, 마부가 필요하다. 그렇게 보급 행렬이 더욱 길어질 수밖에 없다. 하중을 잠시 면했다고 해서 유리한 것도 아니다. 갑옷과 무기가 수레에 있는데 유목민 기병이 습격을 한다면 속수무책이다. 전투 시 빛이 내리쬐는 여름이라면 갑옷을 입은 사람이나 짐승은 스팀을 받아 퍼질 것이고, 겨울이라면 추워서 갑옷 속에 더 많은 옷을 입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장기병은 마음대로 전투시간을 선택할 수 없다. 유목민들은 중장기병들이 지치기를 기다린 후에야 덤벼들 것이다.”---‘책을 펴내며’ 중에서 ② 고구려가 7백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문명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당시 결코 고도화된 문명을 가진 국가가 아니었다. 만일 그러했다면 조위의 관구검이 침입했을 때 타격을 입고 멸망했을 것이다. 덜 완성되고 덜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회복이 훨씬 빨랐다. 판자집 군락에 불이 번져 모든 것을 태웠다고 한들 판자집은 금방 다시 지을 수 있다. 초호화 고층빌딩에 불이 난다면 폐허가 남고 철거비용도 만만치 않아 예전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관구검 이후 고구려는 342년 모용씨의 침입을 받고 한 번 더 수도가 초토화됐다. 그래도 고구려는 금방 살아났다. 그것은 분명 보다 작고 덜 발달된 사회의 원시성이 주는 이점이었다.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추신경이 머리에만 집중되지 않았고, 팔과 다리와 몸통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 그래서 일부가 파괴되어도 금방 복원이 되었다.” ---제2장 ‘선비족, 골리앗으로 성장하다’ 중에서 ③ 환도성은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깡촌’에 가까웠다. “그 해---246년) 10월 조위 군대는 승세를 몰아 국내의 환도성으로 쳐들어가 함락시켰다. 약탈과 폭행, 살인이 자행됐다. 1천 명 이상의 고구려인이 학살당하거나 포로가 됐다. 그러나 관구검은 현재 환도성이 위치한 집안 골짜기에 들어왔을 때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거기서 세상의 끝을 보았다. 점령해 본들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한 국가의 수도가 이렇게 험한 구석에 처박힌 깡촌일 줄은 몰랐다. 환도성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서글픈 벽지 중의 벽지였다. 있는 밭뙈기라는 것도 개미 얼굴만 하고 그렇게 돌이 많고 척박해서야 아무리 일을 해도 가랑이만 찢어지고, 소출을 볼 수 없음이 분명했다. 그는 고구려인들이 왜 주변에 대한 약탈을 그치지 않는 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제2장 ‘선비족, 골리앗으로 성장하다’ 중에서 ④ 고구려의 성은 사람들이 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쉬기 위한 곳이다. 그리고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키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고구려의 산성을 농성장으로 한정해서 볼 수 없다. 성이란 기병들의 격납고와 같은 존재였다. 싸움을 하다 지친 기병들은 성에 들어와 먹고 쉬었고 다음 전투의 준비를 했다. 말도 역시 그러했다. 배후에 성이 없이 기병전을 벌이는 것은 어렵다. 당이 이끌고 온 유목 기병들은 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는 고구려 기병을 평지에서 차단했다. 고구려 기병들은 돌궐기병과 평지전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구려기병이 패하면 성은 포위되었고, 공성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산성은 기병 전력의 뒷받침 없이는 지킬 수 없다.” ---제8장 ‘유일 강대국 당의 등장과 고구려의 초원정치’ 중에서 그래서 성을 배경으로 싸우면 지치지 않고 오래 싸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격하는 측에서는 목숨을 걸고 성을 함락시켜야 했다. 그 방법으로 저자가 소개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은 매우 흥미롭다. “615년 수 양제는 분양궁汾陽宮에서 북쪽으로 행하던 도중에, 그는 시필가한 휘하의 동돌궐 군대에게 거의 사로잡힐 뻔해 성곽도시인 안문군성으로 피신했다. 그런데 성안의 군민이 계속 늘어나 15만에 이르렀다. 식량은 20일 밖에 지탱할 수 없는 양이었다. 성안의 식량을 축내기 위해서 돌궐은 의도적으로 10만 이상의 농민들을 성안으로 몰아넣었던 것이 확실하다. 궁지에 몰린 양제는 그동안 인민을 괴롭혀온 고구려원정을 포기할 것과 많은 포상을 지급할 것을 다급하게 약속했고, 사방에 격문을 띄어 구원병을 모집하였다.” ---제7장 ‘돌궐을 둘러싼 수와 고구려의 대결’ 중에서 성의 문을 열고 나오지 않으면, 적군들은 성 주변의 마을을 이 잡듯이 짓밟아 주민들을 성안으로 쫓아 보내고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만약 성에서 이들을 받아주지 않으면 대열의 앞에 세워 성으로 전진하며 화살 방패막이로 사용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은 토번---티벳)까지 결과를 궁금해 할만큼 국제적인 현안이었다. “…설연타는 645년 말 10만 대군을 이끌고 당의 수도와 인접한 오르도스 지역을 침공한다. 안시성 함락을 앞둔 당태종은 눈물을 머금고 병력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 중의 가마에서 당태종은 심하게 앓았다고 한다. 그것은 살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마중나간 태자는 천하의 영웅이 아니라 병든 노인을 보았다. 토번의 국왕 송첸캄포는 요동에서 돌아온 당태종에게 서신과 함께 근사한 선물을 보낼 만큼 당과 고구려의 전쟁에 관심을 보였다. 그 전쟁은 세계를 변모시킬 수도 있고 토번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다. 고구려가 오래 버틸수록 토번은 당으로부터 지속적인 원조를 받고 티베트 고원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때문이다. 당시 태종의 딸 문성공주와 함께 당의 발달된 문물과 과학기술이 토번에 유입되고 있었고, 토번의 국가 시스템이 고도화되고 있었다. 고구려가 당에 빨리 굴복하면 토번의 장래도 어두워질 것이 자명했다.” ---결론 ‘공존할 수 없는 타자 고구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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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전쟁의 나라
고구려가 강성 한민족이라고 하기 전에, 왜 고구려라는 나라는 그렇게 박터지게 싸울 수밖 에 없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어볼 만하다. 고대의 전쟁은 거의 대부분 생존을 위한 전쟁이다. 이것은 고구려나 주변 유목민, 고구려 당시의 중국 5호16국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구려만큼 밥숟가락 들듯이 칼을 들어야 했던 나라는 없었다. 척박한 산악지대에 터를 잡은 고구려는 주변이 온통 산으로 막혀있고 땅은 대개 돌밭이었다.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다. 초원의 유목민들조차 고구려보다 조건이 풍족했다. 그들은 가축을 길러 고기와 우유를 정기적으로 공급받는 윤택한 사람들이었다. 고구려는 수렵민족이었다. 움직이는 밥(짐승)을 며칠씩 쫓아다녀야 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을 먹이 기 위해 짐승들을 몰아서 한꺼번에 잡는 법을 배워야 했고, 화살을 아끼기 위해 한방에 급소를 쏘아야 했다. 주몽이 활을 잘 쏘았다는 것은 그가 수렵민 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에게 싸움은 생활이자 생존 본능이다. 고구려는 있는 것을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국경을 열고 무언가를 찾아다녀야 하는 나라였고, 그것이 고구려 영토 확장의 동기였다는 게 이 책의 가장 기본적인 시각이다. 그래서 저자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 결코 문어발식 확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구려는 사자의 발톱과 여우의 교활함을 갖춘 나라였다. 굴욕스럽더라도 이익이 되지 않는 싸움에서는 한수 접었고, 먹고사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 영토를 거느리려 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한강 이남으로 진출한 것은 지속적인 식량보급을 보장하는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밑에서 집적거리는 백제와 신라를 손봐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 입장에서 고구려는 ‘공존할 수 없는 타자’였다. 수와 당이라고 왜 로마제국처럼 주변 부족들을 잘 다독이고 길들여 ‘팍스 수,당’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래서 헐값에 비단과 금을 하사하는 출혈교역을 마다하지 않았건만, 이익에 밝은 야만족들을 힘들게 꼬드겨서 밥이 다 지어질 때쯤 되면 꼭 고구려가 와서 이간질했다. 고구려가 가장 많이 써먹은 수법이 “당신들은 이용만 당하고 버려질 것”이라는 현실적인 충고였다. 수나라 양제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약속한 돌궐 계민가한의 천막궁전을 방문했다가, 자기보다 먼저 와있던 손님(고구려 사신)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그 얼마 후 수양제는 유목기병을 동원하는 데 실패하고 농민잡동사니만 대거 이끌고 고구려 땅을 밟았다가 대참극을 당했다. 당태종도 고구려의 초원정치 때문에 몇 번의 원정에 실패하고 결국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서 과로사하고 말았다. 당고종에게 내려진 아버지의 유언은 “고구려를 반드시 정리하라” 정도가 아니었을까. 시오노 나나미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을 쓸 때는 주변에 읽을 자 료들이 넘쳐났고, 손에 만져질 것 같은 흔적들이 도처에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문서기록도 없고, 몇 개의 비석문,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일본서기』에 인용되는 『백제사』, 그리고 중국의 28사가 거의 전부다. 얼마나 기록이 없었으면 돌궐제국에 대한 동로마역사학자의 기록에 지나치듯 언급된 ‘Moukri’(무크리=맥구려=고구려)라는 단어 하나가 실마리가 되어 이야기가 풀려나오겠는가. 안악3호분에 그려진 고구려 군대의 행렬은 이런 비참한 수준의 기록과는 너무나 대비될 정도로 환하고, 구체적이고, 손에 잡힐 것 같아서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특히 고구려 국마(國馬)를 다루고 있는 제6장은 고구려가 어떻게 체계적으로 전마(戰馬)를 관리했는지, 말에 대한 고구려인의 지식수준은 어떠했는지, 왜 『삼국유사』에 나오는 평강공주가 국왕친림사냥대회에 참석하는 온달에게 “시장에 가서 병들고 파리한 말을 사오라”고 했는지에 대한 해답도 제시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