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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몸과 누드
2. 아폴론 3. 비너스 l 4. 비너스 ll 5. 힘 6. 파토스 7. 도취 8. 또 하나의 관례 9. 누드 자체가 목적인 누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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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무어의 가장 만족스러운 작품으로는, 1938년의 드러누은 석상과 1946년의 기대 누운 목상 두 점을 들 수 있다. 이 조상들에는 수많은 여러 다른 연상들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전자에는 멘히르(menhir)의 감정이나 바닷물에 닳아 빠진 바위의 추억 같은 느낌이 있고, 후자에는 십자군의 얼굴 같은, 공허한 가슴을 파고들어간 나무 심장의 고동이 있다. 그러나 그 어느것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이 갈등하는 추억들은 인체에 순응함으로써 해결된다. 그리고 사실 그것들은 파르테논 신전의 <디오니소스>와 <일리소스>에서 최초로 구현된 누드 조각의 두 기본 이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즉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석상은 언덕처럼 대지로부터 솟아오르고 있고, 텅 빈 흉부와 버린 다리를 가진 목상은 나무처럼 대지에서 돋아나려 애쓰고 있으면서, 강한 성적인 준비를 갖추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리하여 근대 예술은 과거의 예술보다도 훨씬 명황히, 누드란 단순히 육체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유추로써 우리의 상상적인 체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모든 구조에 인체를 관련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인체를 그들의 기하학에 관련시켰다. 20세기의 인간은, 크게 확대된 육체생활 체험과 한층 더 정교해진 수학적인 상징의 패턴으로 인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한층 더 복잡해진 더 복잡한 유추 내용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20세기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복잡한 유추를 자신의 모습 일부로서 가시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자신을 신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누드에 완벽성을 주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누드가 맡고 있는 기능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는 더 이상 신을 아름다운 인간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진 않지만, 우리 자신의 육체를 통해서 보편적인 한 이치를 깨닫는 듯할 때, 그러한 자기동일화의 축복닫은 찰나에, 우리는 여전히 신성에 가까이 갔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pp.475~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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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나 전투>를 위한 미켈란젤로의 데셍에 나오는 누드상들은 강하고 결연한 동시에 우아하며, 완벽하게 균형잡혀 있다. 영웅적인 힘과 경기자적인 힘이 여기서는 일치된다. 그리고 모든 회화 중 가장 유명한 누드들, 즉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예언자들, '이성적 영혼(aminae rationali)'의 표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이들을 부를 때에도 경기자들이란 칭호를 붙인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미켈란젤로가 그들을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중개자로 의도했음은 명백하다. 그들의 육체미는 신적인 완벽성의 이미지이며, 민첩하고 활기찬 그 동감은 신적인 힘의 표현이다. 그리스 이상주의의 형식에 갇힌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는 강렬한 정신으로 충전되어 있어, 기독교에 봉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몇몇 경기자들은 고대 원작을 원류로 하고 있는데, 특히 최초에 손댄 두 사람이 그렇다. 그 포즈는 오늘날까지 경옥조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경기자들에는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 처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기본적인 운동 리듬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윤곽선이 굴곡되거나 살붙임이 변전되어 가는 곳마다 긴박감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인들이라면 그런것을 번잡스럽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겼으리라.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 동세 표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육체적 현재 안에서 존재한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경기자들은, 어쩌면 그것이 과거일지라도, 육체를 초월한 어떤 미래를 향해 몸부림 치고 있다.
혼은 아직 육신의 옷을 걸친 채 이미 몇 번이고 신을 향해 올라가노라. 이 쉴 새없는 전율, 말하자면 모든 형태가 소멸될까 불안하여 땅을 긁고 있다는 이 느낌은, 해부학적 지식으로 제한될 때 비로소 그 효과를 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표현주의의 폭풍이 인물들의 형체를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지식이야말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고대로부터 포즈를 취해 와 고전적 규준을 훨씬 초월한 표현으로까지 발전시키게끔 했다. 그 한 예는 페르시아 무녀 옆에 있는 경기자이다. 기묘하게도 그의 포즈는 헬레니즘 부조에서 바커스의 무릎에 기대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어개의 근육은 고대의 어떠한 인물의 어깨와도 다르다. 여자의 어깨는 더더욱 닮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의 등을 어떤 고전적 경기자상, 예를 들어 뮌헨에 있는 <일리오네우스>와 비교해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이미 1512년이라는 시점에서도 정통적 고전 비례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나를 알 수 있다. 거대한 양 어깨가 작은 엉덩이를 향해 급격히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왜곡이다. 그러나 강하게 빨아들이는 리드미컬한 힘이 그 앞으로 인체의 모든 굴곡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등의 윤곽선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웅장한 건축 데생에 나오는 쇠시리(moulding)의 측면도만큼 거의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심오한 해부학 지식에 바탕을 두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쇠시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pp.271~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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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나 전투>를 위한 미켈란젤로의 데셍에 나오는 누드상들은 강하고 결연한 동시에 우아하며, 완벽하게 균형잡혀 있다. 영웅적인 힘과 경기자적인 힘이 여기서는 일치된다. 그리고 모든 회화 중 가장 유명한 누드들, 즉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예언자들, '이성적 영혼(aminae rationali)'의 표현이라고 일컬어지는 젊은이들을 부를 때에도 경기자들이란 칭호를 붙인다. 그들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이었든 간에, 미켈란젤로가 그들을 육체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의 중개자로 의도했음은 명백하다. 그들의 육체미는 신적인 완벽성의 이미지이며, 민첩하고 활기찬 그 동감은 신적인 힘의 표현이다. 그리스 이상주의의 형식에 갇힌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육체는 강렬한 정신으로 충전되어 있어, 기독교에 봉사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몇몇 경기자들은 고대 원작을 원류로 하고 있는데, 특히 최초에 손댄 두 사람이 그렇다. 그 포즈는 오늘날까지 경옥조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이 경기자들에는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에 처음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기본적인 운동 리듬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미 윤곽선이 굴곡되거나 살붙임이 변전되어 가는 곳마다 긴박감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스인들이라면 그런것을 번잡스럽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여겼으리라. <원반 던지는 사람은 그 동세 표현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육체적 현재 안에서 존재한다. 반면 미켈란젤로의 경기자들은, 어쩌면 그것이 과거일지라도, 육체를 초월한 어떤 미래를 향해 몸부림 치고 있다.
혼은 아직 육신의 옷을 걸친 채 이미 몇 번이고 신을 향해 올라가노라. 이 쉴 새없는 전율, 말하자면 모든 형태가 소멸될까 불안하여 땅을 긁고 있다는 이 느낌은, 해부학적 지식으로 제한될 때 비로소 그 효과를 낼 수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표현주의의 폭풍이 인물들의 형체를 망가뜨려 놓을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 지식이야말로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고대로부터 포즈를 취해 와 고전적 규준을 훨씬 초월한 표현으로까지 발전시키게끔 했다. 그 한 예는 페르시아 무녀 옆에 있는 경기자이다. 기묘하게도 그의 포즈는 헬레니즘 부조에서 바커스의 무릎에 기대고 있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어개의 근육은 고대의 어떠한 인물의 어깨와도 다르다. 여자의 어깨는 더더욱 닮지 않았다. 만일 우리가 그의 등을 어떤 고전적 경기자상, 예를 들어 뮌헨에 있는 <일리오네우스>와 비교해 본다면, 미켈란젤로가 이미 1512년이라는 시점에서도 정통적 고전 비례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었나를 알 수 있다. 거대한 양 어깨가 작은 엉덩이를 향해 급격히 용두사미가 되어 버리는 것은,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왜곡이다. 그러나 강하게 빨아들이는 리드미컬한 힘이 그 앞으로 인체의 모든 굴곡을 이끌어 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등의 윤곽선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웅장한 건축 데생에 나오는 쇠시리(moulding)의 측면도만큼 거의 추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심오한 해부학 지식에 바탕을 두지 않았더라면 우리를 설득시키지 못했을 것이며, 아마 쇠시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리라. pp.271~2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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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에서는 ‘누드(nude)’와 ‘알몸(naked)’을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알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으로, 그런 상태에서 느끼는 약간의 당혹감을 함축하고 있으나, 누드는 움츠리고 무방비한 신체가 아닌, 균형잡히고 건강하며 자신만만한 육체, 즉 재구성된 육체를 의미한다.
미술사의 중요한 시기마다 누드는 가장 위대한 작품들에 영감을 주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누드가 더 이상 지배적인 주제가 되지 못했던 시기에도 아카데믹한 기법이나 연습을 숙달하는 실례로서 그 지위를 지켜 왔으며, 현재에도 고전예술과 현대예술을 잇는 주요한 끈으로 남아 있다. 인간은 왜 벌거벗은 인체를 그리고 조각했을까. 조각사와 회화사에서 누드는 어떤 변화를 겪어 왔으며, 예술사의 거장들은 왜 그토록 그들의 위대한 작품들의 주제로 누드를 활용했는가.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대중에게 친숙한 저술능력을 겸비한 미술사가로 유명한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이 책 『누드의 미술사(The Nude)』에서 명쾌하고도 흥미롭게 그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란 주제를 헤쳐 나가기 위해 「알몸과 누드」 「아폴론」 「비너스 I」 「비너스 II」 「힘」 「파토스」 「도취」 「또 하나의 관례」 「누드 자체가 목적인 누드」, 이렇게 아홉 편의 소주제들을 설정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체험을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누드의 주제들로서, 우리는 이것들이 훌륭하게 구현된 작품을 통해 누드가 보편적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닌 표현수단임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누드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시대를 풍미했던 미술사조의 특징까지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렇듯 ‘누드’는, 이를 정밀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적어도 회화와 조각 분야의 미술사 전체를 훑어야 할 만큼 중요한 주제로 자리매김해 왔다는 것을 말해 준다. 1장 「알몸과 누드」에서는 기원전 5세기, ‘누드’라는 예술의 한 형식을 창안했던 고대 그리스의 미술과,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육체의 비례를 탐구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체자리아노, 뒤러 등을 다루면서, 누드라는 형식이 미술사에 최초로 나타나게 된 연원과 배경을 개괄적으로 풀어낸다. 2장 「아폴론」에서는 ‘완벽한 형태’라는 이상(理想)을 근본으로 하고 있는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 아폴론상들의 아름다움이 조형적으로 어떻게 변모하게 되었는지를 〈쿠로스〉 〈크리티오스의 청년〉 〈피옴비노의 아폴론〉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기념비적인 고대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서, 훗날 그것이 미켈란젤로나 도나텔로의 ‘아담’이나 ‘다비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면서 어떤 과정으로 전신(轉身)되는가를 흥미롭게 추적하고 있다. 이상적이고 관능적인 여성 누드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감정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상징은 ‘비너스’로 정형화해 왔다. 3, 4장 「비너스 I」 「비너스 II」에서는 이렇듯 고대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여성 누드 작품들에 나타난 섬세하면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각 작품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그 특징과 아름다움들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한편, 세기를 거치며 수차례에 걸쳐 나타나는 ‘세 미의 여신’의 서로 다른 형태들을 비교해 보거나, 도발적인 에로티시즘을 공공연한 예술로 자리매김한 앵그르 작품의 의미와 역사를 읽어 나가는 것도, 과거의 미술을 새롭게 알아 가는 즐거움이다. ‘힘’은 인류가 가장 오랫동안 영속적인 형태로 표현하고자 한 주제이자 생명력의 원천이다. 5장 「힘」에서는 남성 누드의 상징인 힘을 다룬 누드들이 어떠한 구도와 기법을 통해 표현되어 왔는지를 개괄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6장 「파토스」에서는, ‘힘의 누드’에서는 의기양양하고 아름다웠던 육체가 좌절과 패배에 의해서 고통당하는 비극성과 운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라오콘〉이나 〈피에타〉와 같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신화적 주제의 비극성은 예술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인간에 대한 신의 노여움, 즉 신적인 것의 승리를 표현해 왔으나, 고통의 원인을 인간 내부에서 찾는 거장 로댕의 출현과 함께 한 시기의 종말을 맞게 된다. 한편 인간성의 비합리적 요소를 보여주는, 즉 의지는 소멸하고 육체는 그 무게나 존엄 대신 충동과 관능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누드의 영역이 있는데, 바로 7장 「도취」에서는 고대 디오니소스부터 미켈란젤로에 이르는, 대지의 인력(引力)에서 해방되려는 도취의 누드들을 이야기한다. 8장 「또 하나의 관례」는, 중세 기독교 도상학의 필요에 의해 나타난 벌거벗은 인체들, 즉 고딕 예술가들이 발전시켰던 누드의 형태를 다룬 장이다. 중세에는, 육체를 더 이상 신의 완벽성을 반영하는 거울이 아닌 굴욕과 수치의 대상으로 여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형식을 이루는 누드 양식은 중세예술에 면면히 흐름을 이루며 나타난다. 저자는 위의 여덟 편의 글을 통해 인간의 유일 이념이나 감정을 전달하려는 욕구가 누드에 어떤 형체들을 주어 왔는지 밝히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9장 「누드 그 자체가 목적인 누드」에서는 독립된 조형적 구조의 원천으로서의 누드에 대해 면밀히 검토한다. 누드 그 자체에 가치있는 형태가 주어질 수 있다는 믿음은 고대로부터 이어져 왔으며, 마티스, 피카소, 헨리 무어와 같은 현대미술의 거장들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작품들을 통해 그 영역을 개척한다. 이 책 『누드의 미술사』는 조각사와 회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누드’에 관한 몇 안 되는 개설서이자 이론서 중 하나이다. 미술사에서 누드가 차지하는 지위에 비해 그에 관한 책이 드문 실정은 이 주제가 극히 다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간된 『누드의 미술사』는 인류사에서 가장 심오한 욕망과 관심사를 깊이있는 철학으로 다루면서도 대중들이 가까이하기 쉽도록 흥미롭게 저술되었다는 찬사를 끊임없이 받아, 이 분야의 고전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해 왔다. 520여 페이지의 이 책에는 300컷에 달하는 도판이 거의 매 페이지마다 실려 있는데, 이는 텍스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더불어 독자들에게 누드의 역사를 읽으며 그와 연관된 거장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음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