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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향藝香이 묻어 있는 남도 따라가는 길
<향 따라 여백 찾아가는 길>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차를 인연으로 하여 혜장스님과 다산 정약용, 그리고 다산과 초의선사의 아름다운 교유,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 그리고 소치 허유를 아우르는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게다가 혼탁한 세상살이를 벗어나 무릉도원을 꿈꾸던 고산 윤선도가 유배지이자 남도의 예藝를 간직한 강진과 진도, 해남과 보길도를 잇는 기나긴 여정에서 오롯이 되살아납니다.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고산 윤선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책은 여느 책처럼 인물에 대한 평이나 작품평, 또는 그들의 사상과 업적을 되짚어내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일상을 잔잔하게 담아내, 시대를 초월하여 마치 이웃어른을 만나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됩니다. 한잔의 차를 앞에 두고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담론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즐거움이란……. 저자는 그 선인들을 우리 곁으로 초대합니다. 차와 인연이 되어 다산과 초의 그리고 추사를 만나고, 보길도 물길따라 윤선도의 풍류를 만나고, 남도 유배지에서 한限 많은 인생을 살아가는 조선의 여인들의 슬픈 이별을 만나고, 길을 따라 정신과 육신이 떠나듯이 그림에 심취해 마침내 남종문인화의 대가大家를 이룬 소치 허유를 만나고, 그가 일군 남종 산수의 종갓집 운림산방에 잠시 머물면서 허씨 화풍의 맥脈을 짚어보기도 합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예藝와 민속民俗의 보고인 진도에 잠시 머물러 한판 벌어지는 씻김굿을 구경하고, 몽골의 지배에 저항하며 물길따라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던 삼별초의 눈물겨운 항거를 재현한 한편의 민요창극 '진도에 또 하나 고려 있었네'의 무대 뒤편을 보기도 합니다. 하얀 찻잔에 연둣빛 고운 색의 차를 우리에게 권하면서 저자는 그 향기에 취해, 그 맛에 취해 밤 깊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리고 어느새 남도의 그 아름다운 풍광이 우리 곁에 되살아납니다. 저자는 국문학자도 아니요, 전문적인 문화답사가도 아닙니다. 다만 글이 좋아 도시를 버리고 태묻은 진도에 내려와 독한 진도 홍주에 취해 절대 고독을 삭이며 살아가는 작가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지독한 남도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여, 사진작가 허용무 씨의 도움을 빌어 남도의 그 찰진 유배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책을 덮는 순간, 남도가 무척이도 그리워졌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길을 잡아 남도로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문득 '인연은 참으로 소중하다'는 작가의 말이 떠올라 차와 관련된 그들의 인연을 몇 구절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은은한 향香, 깊은 연緣 다산이 강진에 유배중 일 때 만덕산 만덕사(백련사)에 기거하는 혜장이 다산을 만나고 싶다고 청합니다. 당시 죄인을 멀리하는 것이 일반적 민심인지라 그를 만나고 싶다고 청을 넣어준 혜장에게 다산은 깊은 관심을 갖지요. 불자인 혜장이 뜻밖에도 주자와 공자의 역학, 계몽 수십 장을 술술 암송하므로 다산은 과숙유(果宿儒:학식과 덕망이 높은 학승)라는 찬사를 던졌지만, 그보다 혜장은 다산의 '곤초육설坤初六說에 감복하여 엎드려 절을 한 후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게 됩니다. 이때 혜장의 나이 34세, 다산은 44세로 10년 차이가 납니다. 아무튼 그날 이후 다산에 대한 혜장의 정성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극진합니다. 혜장은 다음해부터는 곡우 전후해서 참새 혀끝만큼 자란 차나무 잎을 다산과 함께 따서 잎을 찌고 볶아 엽차葉茶를 만들고 병차餠茶를 만드는데, 그것은 세시의 즐거움으로 유배지 다산에게는 휴식이며 동시 행락이기도 합니다. 그 차를 잊지 못해 다산은 혜장에게 차를 요청하는 [걸명소]를 지어 보냅니다. 전해 듣건대 바위틈에 좋은 차나무 있다 들었소. 차나무는 나라 소유이니 육우(陸羽)의 차 맛 좀 누릴 수 없겠소 병을 낫게 해주기만 바랄 뿐 쌓아놓고 두고두고 먹을 욕심 없다오. (중략) 나그네는 근래 차 버러지가 되어버렸으니 겸하여 약으로 삼고 있소 차 가운데 묘한 법은 보내주신 육우 다경 3편을 통달케 하였으니 병든 큰 누에는 마침내 노동(盧同)도 남긴 일곱째 잔을 마르게 하였소 정력이 쇠퇴했다 하나 기모경의 말은 잊지 않았고 막힘을 풀고 흉터를 없애기 위해서는 이차황의 차 마시는 버릇을 얻었소 아아, 윤택할진저, 아침에 달이는 차는 흰 구름이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듯하고 낮잠에서 깨어나 달이는 차는 밝은 달이 푸른 물에 잔잔히 부서지는 듯하오. 다연(茶 )에 차 갈 때면 잔구슬처럼 휘날리는 옥가루들 산골의 등잔불로서는 좋은 것 가리기 아득해도 자줏빛 어린 차순 향내 그윽하고 불 일어 새 샘물 길어다 들에서 달이는 차의 맛은 신령께 바치는 백포의 맛과 같소 꽃청자 홍옥다관을 쓰던 노공의 호사스러움 따를 길 없고 돌솥 푸른 연기의 검소함은 한비자에 미치지 못하나 물 끓이는 흥취를 게눈 고기눈에 비기던 옛 선비들의 취미만 부질없이 즐기는 사이, 용단봉병 등 왕실에서 보내주신 진귀한 차는 바닥이 났소 이에 나물캐기와 땔감을 채취할 수 없게 마음이 병드니 부끄러움 무릅쓰고 차 보내주시는 정다움 비는 바이오. 듣건대 죽은 뒤 고해의 다리 건너는 데 가장 큰 시주는 명산의 고액이 뭉친 차 한 줌 몰래 보내주시는 일이라 하오 목마르게 바라는 이 염원, 부디 물리치지 말고 베품 주소서. 한편, 조선조 성리학에 치우쳐 다문화까지도 불교문화라 해서 칠천계급에 몰아때려 다문화를 말살시키고 있을 때 추사는 차에 정통한 달인이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초의에게 달려갑니다. 추사는 역관의 자격으로 중국 연경에서 이미 승설다를 맛본 후 차에 깊이 빠져들었던 터라 차를 하는 스님에 대한 호기심은 더했을 법합니다. 승가사에서 추사와 초의, 두 사람은 첫 대면을 하게 되는데 은은한 빛깔로 우러난 차를 앞에 두고 그 향을 마시면서 그들은 첫눈에 서로에게 끌리지요. 어느덧 새벽 독경 소리가 들릴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이란…….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끌리게 했을까요?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연경의 석학들과도 맞대화할 수 있는 유학자 추사와 불경의 깊고 높은 경지를 깨우친 초의이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긴밀한 것은 바로 차茶로 인하여 맺은 연緣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지고, 다산이 혜장에게 청했던 것처럼 추사도 차가 떨어지면 초의에게 서찰을 보내 차 보내기를 간청합니다. 처음의 간청은 나중 협박이 되어 서찰을 받아쥔 초의에게 너털웃음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초의 안녕하신가? 호남팔고 초의선사 보고 싶으이. 보고 싶어 간밤엔 눈곱이 다 끼었나니. 그 청량하고 고고한 모습 한 번 보기 원하나니……. 그러나 불사에 바쁘신 몸 어찌 욕심 내겠는가. 원컨대 초의가 만든 차라도 보내주시면 초의 대하듯 '초의 차' 만지고 어르고 혀끝으로 음미하리니……. 이보시게, 일지암 토굴 민대머리. 부처님을 모시는 몸이 그토록 신통력이 없는가. 꼭 말을 해야 아시겠는가. '초의 차' 떨어져 '초의 차' 못 마시니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느니, 그러니 '초의 차' 보내지 않으시면 내 당장 말을 몰아 일지암으로 향하여 차밭을 모두 밟아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의 차'에 중독시킨 죄값 응당 그대의 몫이려니……. 추사의 그런 글을 받으면서 초의는 잿빛 장삼자락이 펄럭이도록 온몸을 흔들어 웃어젖히며 답서를 보냅니다. 어허허, '초의 차'에 환장헌 사람이구먼. 마치 양귀비에 중독된 사람맨키로 분별 읎이 글을 쓰셨구먼. 천하에 추사도 '초의 차' 읎으면 맥 못 쓰고 꼬랑지 팩 꺾이고 마는구먼. 그렇습니다, 이렇듯 인연은 보이지 않는 힘이며 희망이지요.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이들의 만남에는 반드시 차茶가 있었습니다. 그 차의 향기에 실려 남도는 예향藝香과 예기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