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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과 증언
대화에 앞서 아우슈비츠에서의 만남 정치 폭력의 시대 체험 개념의 어둠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위안부' 들 역사를 거스르다 '과거의 극복' 이라는 폭력 부정론 테제 하라 타미키의 절망 자연적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여 가해 책임을 자발적으로 떠맡기를 2. 애도와 심판 대화에 앞서 '자국의 죽은 자'와 '타국의 죽은 자' '철저 조작'을 거부하는 감정의 뿌리 자국의 죽은 자를 '무의미'하게 애도한다 것의 '의미' '의로운 전쟁'에서 살육당한 아시아의 타자 공적인 애도를 논하는 관점 보편적 장소에서 만나기 위하여 3. 책임과 주체 대화에 앞서 '수치'의 감각 타자의 승인이 자기를 성립시킨다 '무한 책임'과 '유한 책임' "인간으로서 수치스럽다"는 말의 무게 혈통주의를 넘어서 "역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는 것 온존되는 일본 국가의 연속성 국민 국가 비판론의 약점 '현실주의'의 함정 말려들었다는 것에 대한 책임 추기 4. 단절과 연대 대화에 앞서 '회개의 세계화' 에 저항하는 일본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관 '탈정의' 론의 만연 유고 폭격에서 드러난 문제 단절선을 넘어서기 위하여 5. 상황, 그 이후 '보통' 인가 '보편' 인가 헌법 제1조 문제 '국가를 위한 죽음' 이란 일본의 사법의 벽 비판적 구상력의 필요성 역자 후기 참고 문헌 |
徐京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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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그렇습니다. 개인의 얼굴과 이름이 있는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증언의 구체적 사실을 검증하는 문제도 있겠지만, 증인이라는 주체를 인간으로서 인지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부정론'은 증인을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최악의 인종 차별주의입니다. 자기들은 싫었다, 강제로 끌려간 것이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만도 160명, 아시아에서 몇천 명의 살아 있는 증인이 나타나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데도, "위안부 씨. 일본을 위해 일해 줘서 고맙소" 하는 따위의 만화를 그립니다. 피해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또 그것을 다수의 일본인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증인 개개인을 다시 한 번 죽이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1990년대라는 시대에 나타난 '위안부' 라는 주체적인 존재를 계속해서 자기 중심적인 개념에만 가둬 둔 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다카하시 역설적인 일입니다만, '증언의 시대' 가 '부정론의 시대'로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예를 들자면, 비젠탈, 레비, 아렌트가 얘기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들이 한창 벌어지던 당시에 이미 증인의 목소리를 말살하려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부정론은 나치즘이 벌였던 기억 파괴 기도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분명한 동기는 반 유대주의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위안부'였던 이들을 비롯하여 커밍아웃한 피해자들을 개인, 인간으로서 인지하지 못하고 또 그 목소리에 직면할 수 없다는 것은 예전의 제국주의적 멘탈리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전후 50년 동안 극복되지 못해 왔던 그 부분이 날카로운 고발에 의해 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것은 아닌지요? --- p.3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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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그렇습니다. 개인의 얼굴과 이름이 있는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 증언의 구체적 사실을 검증하는 문제도 있겠지만, 증인이라는 주체를 인간으로서 인지할 것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부정론'은 증인을 인간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최악의 인종 차별주의입니다. 자기들은 싫었다, 강제로 끌려간 것이었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만도 160명, 아시아에서 몇천 명의 살아 있는 증인이 나타나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데도, "위안부 씨. 일본을 위해 일해 줘서 고맙소" 하는 따위의 만화를 그립니다. 피해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또 그것을 다수의 일본인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증인 개개인을 다시 한 번 죽이는 것과 똑같은 행위입니다. 1990년대라는 시대에 나타난 '위안부' 라는 주체적인 존재를 계속해서 자기 중심적인 개념에만 가둬 둔 채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다카하시 역설적인 일입니다만, '증언의 시대' 가 '부정론의 시대'로 되어 버리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예를 들자면, 비젠탈, 레비, 아렌트가 얘기하고 있듯이, 그러한 일들이 한창 벌어지던 당시에 이미 증인의 목소리를 말살하려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부정론은 나치즘이 벌였던 기억 파괴 기도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분명한 동기는 반 유대주의입니다. 일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위안부'였던 이들을 비롯하여 커밍아웃한 피해자들을 개인, 인간으로서 인지하지 못하고 또 그 목소리에 직면할 수 없다는 것은 예전의 제국주의적 멘탈리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전후 50년 동안 극복되지 못해 왔던 그 부분이 날카로운 고발에 의해 조건 반사처럼 튀어나온 것은 아닌지요? --- p.39~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