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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1 낯선 곳으로 낯선 곳으로 피쉬 앤 칩스와의 인연 영어로 헤엄치기 내 친구 랠리 자전거 허니써클 홍차 한 잔의 여유 혼자 떠난 여행 사과나무집 하숙생들 2 다시 낯선 곳으로 다시 낯선 곳으로 킹 가족이 되다 팬케익 데이 토요일의 노천시장 선데이 런치 펍에서 쉬어 가기 템즈 강 뱃놀이 크리스마스 3 위크 나인 블루스 위크 나인 블루스 단련과 휴식 웰 드레싱 로맨스 안개 블루벨 숲 산책 사중주 음악회 기숙사 풍경 4 영국 사람들 영국 사람들 상류계층 사람들 잉글리쉬 가든 병상의 수선화 바이버의 날 다시 보물 찾기 에필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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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지리를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상태에서 지도도, 동행도 없이 나는 호기심에 차 생소한 거리를 둘러보며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는 문이 굳게 닫힌 집들만 이어질 뿐, 한참을 걸어도 상점이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어두워질 무렵 주택가 골목길에 불 밝히고 모여 있는 몇 개의 상점들을 겨우 발견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었는지 전혀 감각이 없었다. 그날 발길이 그쪽으로 닿았던 것은 또 하나의 행운이었다. 낯선 땅 어디에도 사람이 있고 친구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런던에 이어 또다시 확인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 pp.18~19 한국말을 아예 접어두고 영어만 생각하고 생각하며 살리라고 각오하고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퍼뜩 물고기가 물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이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 목까지 차올라 오는 것이었다. 책을 읽다가도, 토론을 하다가도,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어쩐지 안개가 낀 것같이 답답한 느낌이 들곤 했다. --- pp.25~26 얼마나 달렸을까. 눈을 떠보니 정지해 있던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복을 입은 직원이 승객 한 사람씩 기차표를 검사하며 다가온다. 그는 내가 내민 표를 보더니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는다. 콧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그의 악센트는 지독하게 강한 지역 사투리였다. 그는 이 기차가 하리치로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럴 리가 없다.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그에게 물었지만, 빠르고 투박한 그의 말씨는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 p.62 예로부터 정이 많은 민족이라던 우리는 이제 점차 집들이나 생일잔치 때마저도 집에서 음식을 차리는 일에 부담을 느끼며 사는데, 낯선 이에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깍쟁이로 알려진 보수적인 영국 사람들은 사적인 공간을 일상적으로 개방하며 살고 있으니, 문화적 습관이나 모순은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 것인가 보다. --- pp.106~107 할 일은 끝이 없고 해를 마지막 본 게 언제였나 싶게 을씨년스러운 날이 계속되면 학교 생활은 정말 지루하다. 그나마 생활에 작은 탄력을 주는 특별한 행사나 사건도 별로 없는 채 10주로 채워지는 학기 종반쯤에 접어들면, 학생들은 막바지 언덕을 힘겹게 오르기라도 하듯 지친 표정들이다. 게다가 연일 비바람이라도 계속 몰아치면 우울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런 학기말의 따분함을 학생들은 ‘위크 나인 블루스(week nine blues)’라 부른다. --- p.151 첫해의 학업은 단거리 달리기와 같았다. 많은 독서량에다 빡빡한 강의와 세미나, 에세이 등, 한꺼번에 많은 것을 끌어안고 달렸다. 학생들은 허덕이며 코스를 따라갔고, 나도 수없이 밤샘을 했다. 달고 치면 맞아야지 별수 없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위기 대처 능력이 뛰어난 한국인 학생들은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숨이 차도 대개 따라가게 마련인데, 문제는 지적 능력보다도 공부의 요령과 체력이었다. 이 두 가지가 없으면 낙오하지 않고 결국 목적 지점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고생을 한다. 그러니 체력의 뒷받침은 완주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열쇠였다. --- p.161 안개가 짙을 때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도 어렵다. 자동차와 자전거는 헤드라이트를 켠 채 엉금엉금 기어다니고, 말 그대로 한 발짝 앞도 보이지 않아 사람들은 더듬거리며 걸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날은 나무도 집도 거리도 사라지고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안개밖에 없다. 색이라고는 온통 무채색뿐인데, 그런 길을 걷고 있자면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천지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두려움이 한순간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때는 길도 나무도 옷도, 이슬비를 맞은 듯 안개에 흠뻑 젖는다. 추운 겨울에 안개가 짙게 깔리면 밤새 공기가 얼어붙어 다음날 아침에는 대지가 두터운 서리를 흠뻑 뒤집어쓴다. 영국의 안개는 어떤 때는 정말 지독하다. --- p.181 전화를 끊고 환자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병실에 돌아와 누워서 생각했다.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 생의 길고 짧은 차이는 있지만, 언젠가는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온다. 어차피 가야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는가가 중요하지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죽으면 안 되는, 기어코 더 살아야만 할 명백한 이유가 내게 있는가. 잠시 거기서 머뭇거리며 답을 찾았지만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 p.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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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 어디에도 사람이 있고 친구가 기다린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기대 반, 두려움 반이다. 낯선 곳이 언제나 안전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만남이 있고 그 만남은 무성한 관계를 드리운다는 점에서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또 다른 도전이자 즐거움이다. 더욱이 일정 기간 남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일종의 여행과 같아서 끝없는 호기심을 채울 수가 있다. 나아가 자신을 좀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자아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삼십을 갓 넘긴 나이에 잘 나가던 방송국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영국 유학길에 올랐던 성공회대 유동주 교수의 유학 생활을 담은 <지구 반대편에서 3650일>은 이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문화와의 만남을 쓴 것. 잠시 스치듯 머문 것이 아니라 10여 년 동안 그곳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부하고 생활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겪은 것들을 따뜻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적어 내려갔다. 낯선 이국땅에서 자신과 홀로 대면하며 학업에 열중하고 이웃들과 밀도 있는 관계를 맺었던 그의 글에서는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이 담겨 있다. 낯선 땅 어디에 간다 해도 사람이 있고 친구가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인한 것도 이때. 저자가 맨 처음 살았던 곳은 런던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나오는 인구 30만의 아담한 도시 레스터. 흙과 자연이 일상생활 가까이 있고, 공동체적 삶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곳이었다. 그 후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러프버러로 옮겼으나 그곳 역시 작고 조용한 곳이어서 대도시 생활에 지쳐 있던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두 곳 다 레스터셔 주에 속했는데, 그곳에 오래 살면서 구석구석 샅샅이 누비고 다닌 통에 그 지역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 그곳에 잠시 온 어느 한국인 교수는 그에게 ‘셔보(shire寶)’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을 정도였다. 학업은 외롭고도 긴 마라톤과도 같다 그가 처음 맞닥뜨린 것은 무엇보다 몸에 아직 배지 않은 영어와 그네들의 문화. 승강기를 엘리베이터라는 말 대신 리프트(lift)라고 부르는 것이나 건물의 1층을 지상층(ground floor)이라고 부르며 2층부터 1층으로 치는 방식도 어색하고, 미닫이(push)와 여닫이(pull) 표시는 아직 영어가 자동으로 척척 입력되지 않아 머릿속에서 매번 뜸을 들여야 하니, 밀 때도 막히고 당길 때도 막히곤 한 것. 뿐만 아니라 읽고 쓰는 속도가 아무래도 느려 영어권 학생들보다 공부하는 데 몇 배나 시간을 투자해야 했으니 공평치 않은 기분도 들고 스물네 시간 긴장하며 살아야 했으므로 “물고기가 물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이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지 않는 듯한 느낌이 목까지 차올라” 왔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어를 하나 아는 것은 곧 또 하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것과 같다”면서 “그 안에서 서투른 몸짓으로 헤엄치며 다니다 보면 여기저기 구석구석에서 반짝이는 보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학업을 외롭고도 긴 마라톤에 비유하면서 서양 학생들은 공부하다 능률이 안 오르면 책을 덮고 산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충전하는 지혜를 일찍 터득한 반면, 자신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공부하니 그네들보다 배 이상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밤낮으로 매달리다 결국 몸이 견디지 못해 자꾸 아팠다면서 일과 휴식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휴식의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산책과 수영 그리고 자전거타기. 영국 사회와 문화의 한 단면 볼 수 있어 이 책은 영국 사회와 문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낯선 이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 깍쟁이로 알려진 보수적인 영국 사람들이 사적인 공간을 일상적으로 개방하는 일이나 전통을 아끼고 존중해 새것보다는 오래된 물건을, 새로운 방식보다 구식을, 새로운 모델보다 전통적 디자인을 좋아하고, 뿌리 깊은 계층 사회지만 상류 계층을 가늠하는 기준이 돈이나 권력, 학력이 아니라는 것, 그 밖에 유난히 홍차를 즐기는 영국 사람들의 차 문화와 선데이 런치, 팬케익 데이 등 영국 사회와 문화를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읽을거리가 많다. 유학 시절 영국 통신원으로 한국 방송에 영국 사회와 문화계 소식을 알려 주었던 저자의 섬세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시선이 드러나는 대목. 느리게 살아가는 여유,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는 섬세함에 눈뜨게 해 저자는 “영국 생활이 느리게 살아가는 여유,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는 섬세함에 눈뜨게 해주었다”면서 인생에는 일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고단한 일임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밀도 있는 관계를 맺고, 자신과 홀로 대면하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을 감사하게 여긴다. 그가 이 책을 내는 것은 학생들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런 일도 있다는 것을 들려주기 위해서이다. 영국에도 물론 빛과 그늘이 있고 또 예전과 여러모로 달라졌지만,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영국을 소개하기보다 저자의 삶의 일부가 되어 있는 따뜻한 기억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자는 10여 년의 유학 생활을 통해 “삶이란 결국 끌어안기와 내려놓기, 채움과 비움의 끊임없는 교차”라는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