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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_ 어느 대륙의 발견: 프리드리히 헤어
서문_ 오스트리아 문화사와 정신사의 문제점과 목표 제1부 합스부르크 관료 체계 타성 대 개혁 1. 바로크에서 비더마이어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원부터 섭리에 대한 바로크적 예정론까지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원천인 요제프주의 후기 사고방식의 토양이 된 비더마이어 문화 유대인의 지적 우위: 종족의 전통과 민족 차별에 내린 뿌리 2. 오래 지속된 허약함: 안전사회와 그 카산드라들 프란츠 요제프 황제: 산업화하는 세계 속의 비더마이어 군주 귀족정치와 하위 귀족: 개혁을 가로막는 특권 3. 관료들의 제국 구시대적 관료주의의 부패에 대항한 의지 평화군의 불확실한 축복 국교와 반교권주의자들의 불편한 관계 루에거의 시정사회주의 학교와 대학: 전통에의 몰입과 천재 교육 빈의 여명: 경제적 파산 속의 지적 쇄신 4. 관료로 활동한 경제학자들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칼 프리브람의 용어 경제적 욕망에 대한 카를 멩거의 심리학적 이론 프리드리히 비저: 혼합경제학의 변호자 요제프 슘페터: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상속권을 빼앗긴 상속인 국민경제학의 오스트리아 학파와 요제핀 관료주의와의 유사점 5. 법학자 국가의 권위는 법학자에 의해서 지지받고 도전받는다 오이겐 에를리히: 지역적 관습의 옹호자 안톤 멩거: 사법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판가 한스 그로스: 과학적인 범죄 규명의 선구자 한스 켈젠의 ‘순수 법학’: 이론적으로는 엄격하나 정치적으로 불충분함 6.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 빅토르 아들러: 오스트리아 사회주의의 조직자 오토 바우어: 이론가의 전술상의 오류 카를 레너: 조정자였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 막스 아들러: 칸트와 마르크스의 종합 제2부: 빈의 유미주의 7. 향락주의자와 문예 기고가들 유미주의 영향하에서의 사교와 성 카페와 문예비평에서 번창한 대화 예술가와 대중 사이의 애증 8. 음악가와 음악 비평가들 왈츠와 오페레타: 정치적 무기를 대체한 외설 한스릭: 유미주의자, 음악의 절대군주 박해받은 네 명의 개혁자들: 브루크너, 볼프, 말러, 쇤베르크 9. 조형예술의 총아들 한스 마카르트: 장식적 시대의 문화 영웅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모더니즘에 직면한 유미주의 지테, 바그너, 로스: 링슈트라세의 건축과 그 비판자들 빈 예술사학파 10. 유미주의의 비판자들 로자 마이레더: 여성의 역할에 정통했던 사람 오토 바이닝거: 여성 증오와 자기 증오 사이의 천재 제3부 실증주의와 인상주의: 희한한 공생 11. 죽음에 대한 열광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죽음 무상함의 상징으로서의 죽음 마지막 도피처로서의 죽음: 오스트리아 지식인들의 자살 12. 과학철학자들 에른스트 마흐: 철학과 심리학을 물리학으로 환원시킨 인물 루트비히 볼츠만: 모순적인 가설들의 상호 보족성에 대하여 모리츠 슐릭: 빈학파의 창시자이자 비판자 오토 노이라트: 만능 천재의 사라짐 13. 언어철학자들 프리츠 마우트너: 언어 숭배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신이 배제된 신비주의에 이르기까지 아돌프 슈퇴어: 언어를 바탕으로 이뤄진 철학 비판 리하르트 발레: 헤르바르트적 문구에 대항한 치유 허무주의 카를 크라우스와 언어 숭배: 사진처럼 각인된 기억의 저주 비트겐슈타인의 완전주의: 유토피아주의자인 동시에 치유 허무주의자 14. 대화의 철학자들 마르틴 부버: 심미적 신비주의에서부터 나너 관계에 이르기까지 에브너의 성령론: 글쓰기에 우선하는 말하기 15. 프로이트와 의학 프로이트 생애의 개관 빈 의대의 치유 허무주의 프로이트 옹호자들이 적수가 되다: 브뤼케, 마이네르트, 크라프트에빙, 브로이어, 플리스 16. 프로이트와 빈 빈에 대한 프로이트의 사랑과 미움의 감정: 정신분석학과 그 주변 환경 사이의 유사성 프로이드에게 있어 종교와 죽음 정신분석학에 대한 빈 지식인의 저항과 그 원인들 17.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 가부장으로서의 프로이트: 교조주의의 수호자 그리고 분리주의자의 과녁 시민적 정신치료: 아들러의 자기실현적 예언들 오토 랑크: 유미주의로부터 정신분석학의 자아 창조로 제3부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자 18. 프라하의 마르치온주의자들 뵈멘의 체코인과 독일인들 간의 분쇄 전쟁 프라하 독일인들의 세계 몰락관 19. 라이프니츠의 조화론 베른하르트 볼차노: 명제들의 확실한 객관성에 관하여 라이프니츠의 비전을 혁신시킨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 프리드리히 헤르바르트: 한 독일 사상가가 오스트리아에서 거둔 승리 로베르트 치머만의 포괄적 예술 이론 20. 프란츠 브렌타노와 그의 추종자들 지향성 이론을 통해 브렌타노가 행한 심리학과 윤리학의 개혁 마이농: 볼차노와 브렌타노의 중도에서 후설의 현상학: 브렌타노와 볼차노의 종합 크리스티안 에렌펠스 혹은 잊혀진 다양성 21. 라이프니츠 전통의 마지막 대표자들 포퍼린코이스: 뵈멘의 한 발명가를 통해 본 계몽의 낙관론 오트마르 슈판: 전체주의적 사상의 대가 헤르만 브로흐: 라이프니츠 형이상학을 위한 사투 22. 귀족 개혁자들 베르타 주트너: 격렬한 반전주의 여성 쿠덴호브칼레르기: 통일된 유럽을 위한 투쟁에 나타난 세계주의 23. 라이프니츠의 전통을 뒤엎은 사회적 다윈주의자들 루트비히 굼플로비치: 선동자에서 홉스주의자로 구스타프 라첸호퍼: 정치학으로서의 사회학 빈에서의 휴스턴 체임벌린: 인종 순수주의의 옹호자 제4부: 헝가리의 환영 숭배 24. 헝가리의 지식인과 제도들 헝가리의 정치사회 구조 부다페스트의 근대화 소망 충족에 대한 재능 헝가리의 국적 문제 25. 헝가리 출신 유토피스트 헤르츨: 천재적 임기응변가 헤르츠카: 년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 노르다우: 환멸의 유토피아 26. 지식사회학헝가리의 평범한 진리 게오르크 루카치의 변증법: 형식과 삶 카를 만하임: 루카치의 자국을 따라간 범상대주의자 27. 헝가리의 심리분석학자와 영화비평가들 산도르 페렌치와 리포트 촌디: 소망의 꿈과 마적 사고의 숭배자 마법적 사고와 인상주의의 예술형식으로서의 영화 제5부 현대의 예언자 28. 즐거운 종말론 기술의 비판자 창의성을 촉진하는 이중 의미 오스트리아의 정신적 업적 역자 후기: 아, 오스트리아! 미주 인명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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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장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나?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사상가 중 누가 후세에 가장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자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로이트에게 주어진다. 20세기의 그 어떤 사상가도 오스트리아인이건 아니건, 프로이트만큼 우리 시대의 의식에 깊이 파고들어간 사람은 없으며, 경제적·사회적·정신적 삶의 모든 관점에 있어서 그토록 확고한 관점을 피력한 사람은 없다. 심리분석이 어디에서나 응용되고 있는 것은, 인상주의 색깔을 띤 일종의 실증주의가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세계관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수많은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던 두번째 운동은 부버의 대화의 철학이다. 그것 역시 심리의 여러 차원을 구분함으로써 실증주의와 인상주의를 결합시키고 있다. 세번째는 오스트리아문학이 떠맡았던 상상력에 대한 경외심이다. 카프카, 무질, 로트와 같은 여러 부류의 소설가들은 관료주의와 대중의 편협성에 저항했고 상상력의 독자성을 선언했다. 반기독교론자들과 치유 허무주의자들은 기술과 야만화를 배척하고 전체주의적 행동을 예견하며 고발했다. 프랑스나 미국의 작가들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작가들은 치유보다는 처방에 더욱 많은 힘을 쏟았다. 그들이 제시한 미래상이 오늘날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은 접어두더라도, 오스트리아인들은 거의 모든 사고 영역에 있어서 중요한 혁신을 이뤄놓았다. 철학에 있어서 논리적 실증주의와 언어분석은 빈으로부터 모든 영어권 대학들로 파급됐다. 브렌타노는 인식론, 심리학, 윤리학에 새로운 시각을 열었고, 또 후설의 현상학은 독자적인 학파를 형성했다. 법 이론에 있어서 켈젠의 실증주의는 그 영역의 문제들을 새롭게 제시했고, 경제 이론에 있어서 멩거와 그의 제자들은 한계이용 분석의 바탕을 정립했다. 사회 이론에 있어서 루카치와 더불어 만하임은 지식사회학이라는 이름의 이론을 도입했다. 지식사회학은 후세의 연구가들에 의해 다듬어짐으로써, 제도화된 어떤 질서로부터 스스로 예외라고 자칭하는 개혁주의자들을 포용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소중한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헝가리의 이론가들은 이 사회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 개혁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심리 분석과 마찬가지로 지식사회학 역시 엄격한 체계로 상대주의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혁명적 영향력에 있어서 프로이트, 후설, 비트겐슈타인, 켈젠, 또는 노이라트에 버금갈 만한 철학자나 사회 이론가를 배출한 나라는 없다. 모든 상황을 고려할 때 오늘날 비록 유럽인과 미국인 대부분이 50년 전 그들의 조상보다 더 좋은 상황에 처해 있지만, 오스트리아의 창조적 사고를 평가하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오스트리아의 소멸을 되돌이킬 수 없는 충격으로 느낄 것임에 틀림없다. ---pp639~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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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에서는 지도적인 경제학자와 법이론가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을 촉구하는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합스부르크제국이 관료주의에 의해 지탱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제2부에서는 빈의 카페, 극장, 콘서트홀이 얼마나 창의성과 자족감의 온상 역할을 했던가를 살펴본다. 제3부에서는 빈 인상주의로 알려져 있는 세기말의 세계관을 다룬다. 그것은 무상함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실증주의적 학문과 더불어 마흐, 비트겐슈타인, 부버, 프로이트와 같은 개척자들을 만들어냈던 세계관이기도 하다. 제4부에서는 뵈멘 지방의 독일인에게서 꽃피웠던 세계 조화의 미래상을 기술하고 있다. 이들 예언자 중 철학자들은 라이프니츠적 믿음을 신봉했으며, 그것의 붕괴 위기는 카프카나 말러 같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5부에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와는 달리 헝가리에서 희망적 사고가 얼마나 정치적 행동주의를 촉구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루카치나 만하임 같은 참여 지식인들은 지식의 사회학을 체계화한 한편, 헤르츨이나 노르다우 같은 헝가리인들은 정치적 시온주의를 창시했다. 제6부에서는 기술에 대한 적대감, 또는 양극적인 대립에 대한 기쁨 등과 같이 오스트리아인의 사고에 스며 있던 여러 가지 정신들을 조명하고 있다. - 존스턴은 이 책을 쓴 시점(1972년)에서 “앞으로 20년 후에는 과연 어떤 사상가들이 새로운 인식을 제공해주게 될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그는 이에 대한 답으로써, “과거 20년간에 대한 정확한 연구는 이론화 작업의 르네상스에 대한 소박한 기대를 갖게 해줄 것”이라며 오스트리아인들 덕택으로 통합적 사고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에 희망을 걸고 있다. 이미 하우저, 폴라니, 하이예크, 베르탈란피, 포퍼, 곰브리치는 폭넓은 종합적 사상과 더불어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들의 지평과 혜안은 오늘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할 정도로 훌륭하지만, 사실 세기말 오스트리아에서 그 정도 업적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변화가 우리의 일상이 돼버린 지금,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변형을 이해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라고 자신할 만큼 오스트리아인들처럼 삶을 총체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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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대한 지성들의 면모
19세기와 20세기 유럽사 서술을 장악한 독일의 역사가들에게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예들은 “소아병적인 사람들”로 취급되었다. 1854년에 설립된 오스트리아 역사편찬연구소는 이미 일찍이 오스트리아 전체 역사를 밝힌다는 과제로부터 멀어졌다. 19세기, 20세기에 일방적으로 제국사와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문제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독일인의 민족주의적 의미를 뒷받침하는 데 보조 학문으로 이해되었던 오스트리아의 독문학과 마찬가지로, 정신문화의 대륙인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미국인 저자의 폭넓은 시야를 통해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 빅토르 아들러, 오토 바우어, 카를 레너, 막스 아들러와 위대한 법률가·사회학자·정치학자들, 즉 카를 프리브람, 카를 멩어, 요제프 슘페터, 오이겐 에를리히, 안톤 멩거, 한스 그로스, 한스 켈젠 등이 자태를 드러낸다. 이를 기초로 저자는 저널리스트와 음악비평가들, 그리고 박해 속에서 새로운 음악을 파급시킨 브루크너, 볼프, 말러, 쇤베르크뿐만 아니라(오스트리아 내부의 전문가라면 이들을 열거해놓은 것을 보고 놀라 물러설 것이다) 마카르트,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빈의 링슈트라세 건축가이자 비평가인 지테, 바그너, 로스 그리고 빈의 예술사학파를 모두 망라하고 있다. 오늘날 앵글로색슨계 서양에서 로자 마이레더는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프라하와 빈을 중심으로 한 도나우제국에서 유대인의 비극적인 자기 증오의 대변자였던 오토 바이닝거는 죽음을 통한 매혹의 파노라마에 이르는 이정표를 제시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10, 1927, 1970년경 오스트리아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자살은 빈의 풍토에서,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몰락의 실험실’에서 민감하고 창조적인 인간이 자신의 삶과 자신의 작품을 완성으로 이끄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보여주는 표징이었다. 존스턴은 오스트리아라는 정신대륙에서 인본주의의 어두운 면에 대한 혜안으로 “빈 그룹”의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 모리츠 슐릭, 오토 노이라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프리츠 마우트너, 아돌프 슈퇴어, 리하르트 발레, 카를 크라우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서 한 세대동안 철학적 성찰을 이끌어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사상가들에게 관심을 쏟는다. 다음으로는 마르틴 부버와 페르디난트 에브너에 대한 장이 매우 읽을 만하다. 부버는 점차 유태인의, 하시드적 신비주의에 빠져들며, 빈 대학에서 자격을 박탈당한 페르디난트 에브너는 키에르케고르와 오늘날을 잇는 기독교적 실존주의 사상가가 된다. 이어서 저자는 빈에서 야유와 모함을 받았던, 그리고 오늘날에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작가이자 사상가, 신학자이자 의사이며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 그리고 최초의 그의 반대자들에게 관한 두 편의 에세이를 싣고 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빈을 떠나 보헤미아 지역과 부다페스트로 눈을 돌린다. 볼차노, 프란츠 브렌타노, 마이농 같은 보헤미아 지역의 사상가들은 후설로 이어진다. 하이데거의 스승이자 오늘날 프랑스어권에서(구조주의자들에게뿐만 아니라) 여러 각도로 새롭게 언급되고 있는 에드문트 후설이 라이프니츠의 영향 아래 있던 보헤미아의 정신권에 뿌리를 두고 점차 빈과 그라츠로 명성을 떨쳐나간 사실이 여기에 처음으로 기술되고 있다. 문화사 · 정신사 서술의 원칙 역사 연구에서 정신사만큼 모순된 연구방법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야도 없을 것이다.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존스턴은 정신사 내에서 세 가지의 분야를 구분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그것을 이념사, 사상가의 사회학, 그리고 참여 지식인들의 사회학이다. 정신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첫째 분야는, 개인이나 사회와는 별도로 이념 자체의 서술에 그 본질을 두고 있다. 수학과 철학은 진술의 동기가 되는 이유를 고려하지 않은 채 한 인간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들 중, 예를 들어 볼차노 와 후설은 사회적 경계를 극복한 논리적 엄격성을 보여준다. 카를 프리브람이나 루돌프 아이슬러와 같은 많은 오스트리아인들은 모든 시대나 환경에 초시간적 본질의 그물을 드리우고 있는 이념사적 카테고리들을 만들어냈다. 이 학자들은, 합스부르크제국의 사회가 아무리 그들의 플라톤주의를 형성하는 데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모든 형태의 정신사에 있어서 이념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했다. 매번 사상가들의 주요 명제 인용 및 증거 제시 저자는 중요한 철학자나 사회이론가를 서술할 때마다 그들의 주요 명제를 인용할 뿐만 아니라 그가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논쟁자들의 논조를 밝혀내기 위해 필자는 반대론자는 물론 찬성론자들의 견해를 대비시켜 비교해 보이고 있다. 어느 사상가의 주요 논점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정신사를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 이론가들을 사회에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사상가의 사회학’의 영역에서는 환경이 한 개인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연구하고 ‘참여 지식인들의 사회학’의 영역에서는 사상가들이 환경을 어떻게 변화시키고자 하는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전자는 사상가를 사회적 영향의 수용자로서, 그리고 후자는 사상가를 사회적 영향의 원조로서 다루고 있다. 사상가의 미시사회학은 지식인이 그의 가까운 환경, 특히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 동안에 체험한 영향을 연구한다. 부모의 가정, 학교, 교회, 그리고 후에 군복무, 직업, 취미생활에서 얻은 인상들은 어떤 가능성들은 북돋고 또 어떤 가능성들은 막아버림으로써 한 인간의 사고의 방향을 결정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외견상 비종교적으로 보이는 사상가의 창의성 속에는 흔히 신학의 여운이 남아 있음을 밝히고 있다. 비록 세속화된 오스트리아의 사상가라도 그들은 소년 시절에 모두 기독교적 또는 유대교적 사고를 몸 안에 받아들였고 그것으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반대로 거시사회학은 하나의 도시 전체 또는 국가를 관통하고 있는 조류들을 연구한다. 관료주의, 산업주의, 민족주의, 그리고 반유대주의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 것이었다. 그래서 특히 프로이트와 비트겐슈타인은 유미주의나 향수, 숭배, 그리고 치유보다 진단을 선호하는 빈 사람들의 전통으로 기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프로이트가 그의 사회와 어떤 식으로 얽혀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를 교육시킨 사람들과 연구소에 대한 미시사회학이 요구된다. 그다음에는 그의 마음을 끌기도 했고 그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던 예의 빈 사람들의 성향에 대한 거시사회학이 요구된다. 소설가들, 특히 로베르트 무질이나 요제프 로트처럼 문명비평가로 활약하던 소설가들은 그러한 경향들을 매우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회고록이나 자서전들이 남기고 있는 증언, 그리고 뒤따른 환경에 대해 개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하는 실제의 연대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연구 대상인 사상가들의 관점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으면 미시사회학이든 거시사회학이든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을 넘어 더욱 섬세하게 그다음은 ‘사상가의 사회학’의 하부 분야인 ‘참여 지식인들의 사회학’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확고하게 반정치적인 인물들이 넘칠 정도로 많이 있었기 때문에, 참여 지식인들의 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을 보다 폭넓은 사상가들의 사회학과 분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①마르크스주의적 사회학은 마르크스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노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더 분노한다. 사상가가 자신과 사회와의 관계를 오로지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는 가정은 정신사에 있어서 사회학의 의미를 축소시킨다. ②막스 셸러와 후기 베르너 슈타르크는 이념이 사회를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문제와 마르크스가 강조하고 있는 이념적 사고의 자세를 구분함으로써 깨어진 균형을 다시 복구시켰다. 지식 사회학의 두 유형(①과 ②)을 이념사와 연결시키려는 저자의 노력은, 이 세 가지 연구방법들이 서로 다른 결과를 낳게 한다는 데에 확신을 준다. 사상가의 사회학이 창의성의 비밀을 해명할 수는 없다. 어떤 환경이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간에 후설과 같은 거목은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이 미래상의 추구를 위해 투쟁할 것이다. 미시사회학이 극도로 명상적인 철학자들에게 적용될 경우 그것은 창조적인 인간에 대해서보다는 모방자들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어떤 학술용어가 어느 시대에 어느 대학이나 교회의 연속성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를 밝힘으로써 그것은 해석의 오류를 예방할 수 있다. 거시사회학은 뵈멘의 개혁가톨릭주의라는 지역적 현상이 어떻게 라이프니츠를 계속 고집하도록 했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을 해준다. 사회적 변화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정반대되는 관점에서 사회적 분석을 촉구한다. 거의 모든 이념은 그것의 주창자가 사회에 내세우고 있는 특정한 불만들을 반영한다. 그러한 스펙트럼의 한가운데에, 빈 인상주의에 가까웠던 작가, 철학자, 그리고 심리분석가들이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단호하게 모든 정치적인 것을 거부했다고 하더라도 개혁주의자들은 수많은 환경이나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그토록 다양한 환경을 포괄하고 있었으므로 사상가의 사회학은 풍부한 인식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러한 연구를 통해서 다양성의 배경이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지적 다양성이 사라질 위기에 있는 시대에 불과 두 세대 전의 사회적 조건들이 얼마만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통합적 사고를 꽃피우는 데에 기여했는가를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 이 위대한 인류의 지적유산은 연구되지 못했나? -<언어>와 <선입견>, <좁아진 시야> 그리고 <히틀러> 오스트리아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왜 오스트리아의 광채가 망각 속에 빠지거나 심지어 악명 속에 빠지게 되었는가에 대해 놀라워하며 자문하다. 그들의 우아함은 경박함으로, 멜랑콜리는 제스처로, 기분이 넘치는 것은 원칙의 결핍으로, 명백한 창작의 경쾌함은 피상적인 것으로, 유례없이 재치 있는 말솜씨는 하나의 열등한 형식으로……그들의 건설적인 면들 즉 관용·호의·독립성·창의성 등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역사가와 문예학자들조차 독일적인 것에 대해 글을 쓰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비스마르크 제국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렇게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리적 단일체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실체로 살아남은 반면 유일하게 붕괴되버린 나라가 바로 오스트리아다. 특히 동강이가 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자신들이 바로 사라져버린 제국의 후예라고 주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리적 장애 외에도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사용되던 언어의 수효가 많았던 사실은 또다른 어려움이 되고 있다. 체코어, 폴란드어, 또는 마자르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역사가들은 뵈멘, 갈리시아, 또는 헝가리 연구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는 독일어만 할 줄 아는 학자도 이 공간의 문화를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길을 막는다. 독일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있어서일종의 교양어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정신사에 눈을 돌리는 역사가에게서 용기를 빼앗아 가는 또다른 장애물들이 있다. 첫째, 독일어의 복잡성을 단순히 정신적 혼란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영어권 및 프랑스어권 학자들의 오만함과, 독일어를 잘하는 사람들조차 고전에 대한 교육이 거의 결핍돼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상황이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연구에 몸을 바쳤을지도 모를 수많은 유대인들이 히틀러에 의한 민족 박해로 인해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경우 일단 합스부르크제국의 역사연구에 손을 대는 순간 흔히 그것의 우월성을 간과하거나 아니면, 오류를 너무 앞세우는 경향에 빠지기 일쑤이다. 끝으로, 특히 미국에서는, 전문화로 인해 연구가 분산됨으로써 역사의 다양성이 구시대적인 것으로 간주돼버리고 있다. 놀랄 만한 다양성을 지닌 프로이트, 노이라트, 또는 비트겐슈타인마저도 오늘날 비전문적이라고 평가절하될 위기에 있을지 모른다. 오늘날의 연구가는 교육이나 경쟁에 의해 너무도 시야가 좁아져 있어서, 제한된 시야에서 해석을 하는 것에 그친다. 철학자들은 빈에 있던 비트겐슈타인의 선각자들을 기억해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며, 심리분석사가들은 프로이트의 스승이자 생체학자인 브뤼케가 프로이트 못지않게 다양한 면을 지니고 있었음을 망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