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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한국어판 저자 서문 들어가는 글 1장. 위기의 전주곡 1부. 레토릭의 역할 : Yes 끌어내기 2장. 고농축우라늄을 둘러싼 대립 3장. 부시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누구인가? 4장. 다자 틀 만들기 2부. 6자회담의 기원 5장. 워싱턴과 서울, 불화 6장. 6자회담 참여국들 3부. 6자회담 7장. 6자회담의 성적표 8장. 제4,5 차 회담, 잘못된 출발인가 낙관주의의 원인인가 9장. 결과와 책임 10장. 미사일, 핵무기 그리고 회담 11장. 평양과 양자회담, 그 기록 12장. 상설 안보 포럼의 수립 맺음말 부록 1. 김계관에게 보내는 프리처드의 편지 부록 2. 다가오는 3자 대화의 목표와 주제, 목적에 대한 개략적 메모 부록 3. 크리스토퍼 힐의 성명 부록 4. 북한의 핵 프로그램에 관한 보고서 부록 5. 합의문 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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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관계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경험 부족은 부시 대통령이 2001년 2월 김대중 대통령에게 처음 전화를 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났다.……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할 필요성을 대통령에게 말하기 시작하자, 대통령은 손으로 전화기의 송화구를 막으면서 “이자가 누구야? 이렇게 순진하다니 믿을 수 없군”이라고 말했다.……그날 저녁에 대통령에게 ‘이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더 심층적인 보고서를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밤 11시경에 백악관으로 돌아가서 보고서를 썼다.---p.94 북한, ‘악의 축’이 되다 대통령의 기본적인 생각은 사담 후세인과 김정일이 똑같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인민을 고문하는 실패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런 서술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책 결정에서는 부적절한 기본 가정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책이 김정일을 타도하는 것이라는 대통령의 말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 기록되고 있음을 알고 북한의 정권 교체가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명확하게 선언한 것을 취소했다. 다 말해놓고서, 그는 만약 북한이 붕괴한다면 한국이 부담해야 할 엄청난 비용에 관련된 보고를 이해하게 되었고, 북한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했다고 털어놓았다.---p.95~96 북한, 협상 테이블에 핵무기를 내놓다 강석주가 HEU(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인정하면서, 그 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북한이 핵무기 생산을 위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지적했을 때, 그는 그것을 인정했다.……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평양이 우라늄에 기반한 핵무기보다 더욱 발전한 무기를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생화학무기, 플루토늄에 기반한 핵무기 혹은 다른 무엇을 밝힌 것이라고 이해했다. 강석주는 비꼬는 투로 덧붙였다. “우리는 악의 축의 일원이고, 당신들은 신사다. 이것이 우리의 관계다. 우리는 신사처럼 논의할 수 없다. 미국의 압력으로 우리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다면, 그때 우리는 유고슬라비아나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결국 죽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p.76~77 부적절한 후보에 강한 희망을 걸다 1997년의 클린턴 행정부와는 달리, 부시 행정부는 2002년에 시작된 대통령 선거 기간에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를 선호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김대중 정부와 사이좋게 일하고 싶었겠지만, 그들이 북한에 대한 자신들의 근본주의적 접근을 2년 동안 대놓고 반대했을 때 그것은 결코 짧은 악몽이 아니었다. 그 모든 실제적인 의도 때문에 부시 행정부는 2003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했고, 그런 후에 한미 관계에 정당한 관심을 갖기로 했다. 이회창은 워싱턴의 모든 내부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고, 2002년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공개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과 워싱턴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보면, 워싱턴의 환영은 이회창에게는 정치적으로 죽음의 입맞춤이었다. 이회창은 선거에 졌다.---p.121 강경파들의 이탈, 부시 2기 대북 정책의 전환 부시 대통령의 핵심 강경파 지지자들이 떠나자 남은 것은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귀에다 대고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고 속삭이던 속 좁은 자들의 재잘거림 없이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부시 대통령과 실질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와 단 둘이 있거나 최소한 해당 주제에 관해 그와 대화를 나눴던 마지막 사람이 함께 있을 때라는 것이었다. 모든 강경파들이 떠나자, 대통령은 과거 정책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p.17 잃어버린 8년, 북한은 핵보유국이 될 것인가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겠다고 한 부시 행정부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실패했다. 북한은 핵시설을 재가동하는 데 성공했고, 상당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고, 핵무기를 보유했다고 공개 선언했고, 일정한 계산에 의해 미국을 외교적으로 이겼고, 미사일 프로그램을 발전시켰고, 한미 간 정책적 접근의 차이를 활용했다. 부시 행정부 대부분의 관리들이 북한을 다루는 데 미숙했다는 점과, 부시 행정부가 공언한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 목표와 북한 정권의 교체라는 희망 사이의 불일치를 정책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급기야 북한은 국제사회의 통일된 반응을 무시하고 핵 실험을 감행했다. 그 결과 지금 미국은 2001년 부시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보다 덜 안전해졌고 한국과의 동맹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을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p.231~2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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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의 전개
북한의 핵 개발 한국전쟁 이후 북한은 미국의 핵 공격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억지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과 기술 협정을 맺고 핵 개발을 시작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핵 개발에 대응하기 위해 독자적인 개발에 나섰으나 기술적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1980년대 들어 북한은 전력용 핵발전소 건설에 집중했다. 1980년대 후반 냉전의 해체로 주변 안보가 불리해지자 북한은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에 나선다. 1차 북핵 위기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을 핵사찰한 결과 북한이 신고한 플로토늄의 양과 조사 결과가 불일치했다. IAEA는 미신고된 영변 핵시설에 대한 특별 사찰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북한이 한미 공동 군사훈련에 대해 반발하면서 북한은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과 1994년 IAEA를 탈퇴한다. 이후 북한과 미국의 관계는 전쟁 직전 상황까지 갈 만큼 악화되었다(1차 북핵 위기).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건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 합의(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 미국의 경수로형 원자로 발전소 2기 건립, 중유 지원, 정치·경제적 관계 정상화)를 발표한다. 1995년 3월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기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설립되고 2000년 경수로가 착공된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6 ·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고, 조명록 차수와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상호 방문이 이루어진다. 부시 정부 등장과 2차 북핵 위기 2001년 부시 대통령의 취임 후 북미 관계가 악화된다. 2002년 10월 미국대표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강석주 제1부상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인하자 미국은 북미 기본합의문 파기를 발표하고(제2차 북핵 위기), 경수로 건설은 중단된다. 같은 해 북한은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한다. 북핵 다자회담 2003년 중국의 외교적 중재로 북한과 미국, 중국의 베이징 3자회담이 열린다. 이후 한국, 일본, 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이 개최되는데, 미국의 대북 직접 대화 거부로 인해 6자회담은 휴회와 재개를 반복한다. 2005년 9월 개최된 제4차 6자회담에서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 계획 포기를 담은 9 ·19 공동성명이 채택된다. 북한의 핵 실험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이 북한 자금의 돈세탁처로 지목되고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의혹이 불거지면서 북미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다. BDA 북한 계좌가 폐쇄되고 대북 거래가 중단되자 2006년 7월 북한은 미사일 6발을 발사하고 10월 9일에는 핵 실험을 단행한다. 2 ·13합의 이후 2007년 회담을 재개한 북한과 미국은 2월 13일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에 합의한다. 미국의 BDA 문제 해결, 북한의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과 폐쇄, 북미 관계 정상화 등이 합의문에 담겼다. 북한의 시리아 핵 개발 관련 의혹이 제기되면서 북미 양자회담이 소강상태에 이른다. 2008년 3월 13일 북미 제네바 회담이 열렸으나 핵 신고 합의에 실패했고 4월 8일 북미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핵 프로그램 신고 문제가 합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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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부시의 실패한 외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 책은 단지 미국의 전직 외교관이 미국의 외교 정책을 회고한 기록에 그치지 않는다. 이 책은 10년 만에 집권한 한국의 보수 정권이 새로운 남북 관계를 수립하는 데 있어 반드시 귀담아 들어야 할 제안을 담고 있다. 새 정부 들어 남북한 사이에 거칠고 불필요한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이 책에 묘사된 부시 집권 초기 미국과 북한 사이에 오간 말싸움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북한이 핵을 폐기한 후에만 경제적 지원이나 대화가 가능하다고 전제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틀인 ‘비핵 ·개방 ·3000’ 역시 협상이나 대화, 상응 조치 제공을 통한 핵 문제 타결 가능성을 배제한 부시의 초기 대북 정책과 유사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험 요소와 불확실성을 없애고 지난 10년간 애써 마련한 남북한 화해 분위기를 지속하기 위해 새 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부시의 ‘실패한 외교’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부시, 북미 관계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다 클린턴 정부 말기 미국의 대북 정책은 한국, 일본과의 긴밀한 협력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고, IAEA의 사찰로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동결되었으며, 북한과의 직접 대화를 통해 제네바 기본합의의 준수 여부와 미사일을 관리할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과 남북한 정상회담, 북미 고위급 관료(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조명록 차수)들의 상호 방문과 회담에 이어 클린턴-김정일 정상회담이 실현 직전까지 논의될 만큼 북미 관계는 어느 때보다도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2001년 집권한 부시는 기존의 대북 정책을 점검한 후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실패’라고 선언하고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모두 배제하는, 이른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신을 핵심 기조로 삼았다.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 점검 결과는 동맹국들과의 조율을 거치지도 않은 채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고 이후 북한과 미국은 거친 설전을 벌이게 된다. 협상 무대 뒤 네오콘들의 보이지 않는 손 부시 정부의 대북 정책을 강경한 기조로 만든 이들은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 등 행정부 내 외교 ·안보 라인에 포진된 네오콘들이다. 이들은 ‘악의 축’ 북한 정권을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을 내건다. ‘도덕적 순수성’으로 무장한 채 일체의 포용 전략을 배제한 대북 정책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대북 온건론자인 파월 국무장관은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을 계승하려 했지만 네오콘들의 저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는 강경파들과 부딪히고 현실감 없는 정책에 절망한 프리처드의 경험담이 나와 있다. 그는 6자회담이 시작되는 과정에서 직책상 자신이 협상 대표가 되어야 함에도 네오콘들의 방해로 소외되자 사표를 던지게 된다. 부시 2기 들어 보다 온건한 방향으로 대북 정책이 변화된 계기도 행정부 내 대북 강경파들의 퇴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북미 관계의 패러다임, 무시-교착-위기-협상 부시 행정부는 일관된 대북 로드맵을 갖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북한을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는 부시의 대북 정책은 2002년 북한이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시인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미국은 중유 선적을 중단하고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기에 이른다. 북한도 이에 맞서 동결된 영변 핵시설을 가동하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한다. 중국의 외교적 중재로 어렵사리 마련된 6자회담은 수차례 결렬되고 마침내 2006년 10월 북한은 핵 실험을 감행한다. 부시의 재선 이후 중간 선거에서 패배한 공화당은 전면적인 외교 정책의 수정이 필요함을 깨닫고 보다 적극적인 북미 양자 접촉에 나섰다. 이처럼 부시 행정부는 북한에 대해 별다른 철학이나 정책 없이 무관심하다가 관계가 악화되고 위기를 맞아서야 비로소 협상에 나서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집권 8년을 허비한 결과를 낳았다. 부시의 대북 외교는 왜 실패했는가? (1) 도덕적 접근과 말의 비용 부시의 외교는 왜 실패했을까? 우선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도덕적 접근과 말의 비용을 들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악의 축’, ‘폭정의 전초 기지’ 등 북한을 규정하는 부시와 핵심 관료들의 말은 단순한 정치적 레토릭에 그치지 않았고 실제로 협상 교착의 원인이 되었다. 나날이 험악해지는 레토릭이 북미 양국의 언론과 성명을 통해 쏟아져 나왔고 북한은 테러 지원국이라는 ‘모자’를 쓰고 회담에 나설 수 없다고 반발했다. 또한 ‘나쁜 행동에는 보상하지 않는다’는 부시 행정부의 도덕적 대북 접근은 초기 북미 협상 자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었다. 2007년 이후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 전환은 바로 도덕적 접근의 포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인권 문제를 포함한 ‘북한 문제’에서 ‘북핵 문제’로 정책의 우선순위가 전환되고, 마침내 도덕이 아니라 현실로 돌아오면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 (2) 양자 대화 거부 부시 행정부가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거부함으로써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의 주변국이 함께 참여하는 6자회담이라는 새로운 회담 형태가 등장한다. 6자회담은 우여곡절 끝에 2003년 8월부터 시작되었지만, 핵심적 의제는 6자회담 중에 진행된 북미 직접대화를 통해 논의되었다. 수차례 교착된 6자회담은 부시 집권 2기 미국이 북한과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한 후에야 비로소 순조롭게 굴러갈 수 있었다. 저자는 양자 대화를 완강하게 거부한 부시 집권 1기를 북한의 핵 보유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실패한 ‘잃어버린 기회’였다고 평가한다.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관한 무관심은 결국 북한의 핵 보유 과정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무능으로 드러났다. (3) 한미 동맹의 약화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정책은 김대중 정부의 ‘포용정책’과도 충돌했다. 저자가 직접 목격한 부시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첫 번째 전화 통화에서 알 수 있듯이, 부시는 북한은 물론 주요 동맹국이자 대북 정책의 또 다른 한 축이 되어야 할 한국에 대해서도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프리처드는 부시의 무지함에 충격을 받고 대통령의 요청으로 한국 정치와 남북한 관계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역할에 대한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남북한이 정상회담을 통해 화해 분위기를 마련했지만 부시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2002년 한국 대선에서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진 이회창을 지지한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부시 정부 말기, 북핵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클린턴 행정부 말기 북한은 핵시설을 동결한 상태였다. 부시는 이 상태를 물려받았으나 오히려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기와 다량의 핵물질을 갖게 했다. 지금도 북한과 미국은 양자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기껏해야 북한의 핵 신고와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경제적 대가 제공이 가능한 정도다. 따라서 부시 임기 내에 북핵 폐기가 불가능할 것임은 분명하다. 결과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8년의 시간을 허비한 것은 분명 ‘실패한 외교’라 할 수 있다. 대북 실용주의와 상호주의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는 부시 행정부 8년의 사례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비현실적인 원칙만을 강조하고 타협과 협상을 거부하는 태도로는 많은 기회를 놓쳐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