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감사의 글
서문 _ 오늘날의 죄 제1부 이론 제1장 약해진 죄의 힘과 위상 제2장 속죄의 피로 제2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죄, 피로의 희생자들 제3장 가톨릭의 수음과 현대 과학 제4장 동정은 죄인가 제3부 현대의 죄 제5장 새로 등장한 죄 제6장 우리 선대들의 죄; 차별 철폐 조치의 허와 실 제4부 결 론 제7장 최선책은 무엇인가 에필로그 주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찾아보기 |
서순승의 다른 상품
|
오늘날 미국인들은 민족적·인종적 다양성은 지지하지만 도덕적 다양성 앞에서는 주춤한다. 다양한 인종들의 가치를 선언하는 것과 낙태, 동성혼 또는 국가 보건 정책에서 자신들과 뜻이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존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p.14
2001년 9월 11일 이후 서구 사회는 유대인,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훨씬 더 종교적이 되었다. 조직화된 종교가 화려하게 귀환하면서, 적어도 앞으로 수십 년 동안은 죄에 대해 엄중한 세상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뭔가 희망이 보인다 싶은 순간 엉뚱한 것들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다. 말하자면 케케묵은 죄들이 마치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구태의연한 방법을 동원하여 과학과 새로운 감성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p.20 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한다. 과학과 의학 연구가 발달하면서 어떤 특정한 행위와 태도가 죄의 오명을 벗기도 한다. 가톨릭교회와 수음의 관계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수음을 금지하는 종교 단체는 시험관 수정(IVF, In Vitro Fertilization)의 이점을 스스로 포기할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혼전) 성교에 대한 엄격한 기준도 마련하기 어렵다. 수음을 금지하는 종교 단체라면 당연히 줄기세포 연구라는 말만 들어도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 칠 것이다. 이런 연구가 기적처럼 생명을 구해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 고리대금업이나 수음이 그렇듯이, 머지않아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반대 의견들도 세인의 관심사에서 멀어질 것이 분명하다. ---p.22 바실리우스(379년 사망)는 신에게 부여받은,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오용을 죄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그의 정의가 우리와 우리 자신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와 신의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잠재력”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p.36 신은 믿지 않으면서 죄를 믿을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사람의 속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감정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 여러분이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 왜 여러분은 믿음을 갖지 않는가? 당연히 신은 죄를 지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신은 어떤 사람들의 믿음은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베일 속에 숨겨져 있다. 신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 그러므로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갖게 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거부하는지, 그 이유에 관해서는 오직 신 자신만이 답을 줄 수 있다. ---p.71 갈수록 죄가 가벼워지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죄가 약화되고 격하되는 것은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죄와 친숙해졌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옛날에도 입소문이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매일, 아니 매 시간마다 범죄에 관련된 뉴스를 쏟아내는 오늘날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죄의 피로가 점차 속죄의 피로로 이어졌다. 뭔가 아주 심각한 잘못을 일단 저지르고 나면 아무리 노력해도 원상복귀가 어려울 것이라는 회의주의가, 속죄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 세계”의 “냉정하고 냉혹한 진실”에 대한 체념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p.126 물질 보존의 법칙에 따르면 정상적인 환경에서 물질은 창조되지도, 파괴되지도 않는다. 물론 위치는 바뀔 수 있지만, 결코 사라지는 법은 없다. 비록 많은 신학자들이 신은 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만약 마음을 바꾼다면 신이 판단착오를 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하지만 신은 결코 판단착오를 할 수 없다), 죄도 물질과 유사하다는 점에 주목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과학을 통해서 우리는 정액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깨닫게 되었다. 정액 속에는 축소 인간과 같은 존재가 살고 있지 않다. 따라서 수음은 신학자들(그리고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식으로 인간적 존재를 죽이는 행위가 아니다. ---p.178 순결의 문제를 결혼 첫날밤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결혼을 통해서 배우자에게만 충실한 사람으로 거듭난 한때의 섹스 베테랑(이 경우 엄청난 의지력과 사랑의 힘이 요구된다)이 결혼식 날까지 순결을 지켰다가 나중에 외도의 길로 빠져드는 사람보다 더 많은 갈채를 받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물론 동정은 그 자체로 아주 바람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명문 대학에 입학하고도 유급하거나 중퇴하는 학생이 있듯이 동정 그 자체가 도덕적 보증 수표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204 현대적인 죄들을 잠시만 살펴봐도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사실이 금세 확인된다. 십계명과 일곱 가지 대죄의 규정이 죄에 대한 일종의 헌장과 같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기서 언급된 열일곱 가지 죄는 온갖 종류의 다른 죄들에 대한 “원재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 등장한 죄들을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혹시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p.212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 대략 3퍼센트, 약 900만 명은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200만 명 이상이 아동 및 청소년들이다. 조증에서 울증을 오가는 극단적인 변화 양상 때문에 종종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라고도 불리는 조울증은 대략 230만 명을 괴롭히면서 젊은 여성의 사망 원인 2위, 그리고 젊은 남성의 사망 원인 3위를 차지하고 있다. ---p.225 천사에 비유되던 아이들도 프로이트의 회의주의를 비켜 갈 수 없었다.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에서 프로이트는 성적 “본능(instinct)”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본능은 한동안 한쪽 부모에 대한 성적 욕망의 형태를 띠다가 성인이 되면 다시 열정 또는 야망으로 전이되는데, 이러한 성적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는 데 실패한 사람은 결국 신경성 질환으로 고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오늘날 아동 성희롱에 해당되는 행위에 대해 세인의 관심을 일깨워준 선구자였다. ---p.231 차별 철폐 조치는 단순히 죄의 피로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죄에 대한 조종(弔鐘)일지도 모른다. 죄의 피로가 없다면 차별 철폐 조치와 같은 정책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경우에, 칸트의 주장과는 달리 도덕률들이 상충하면서 저울추가 죄에 대한 공포 쪽으로, 다시 말해 인종 차별주의의 한 형태로서 차별 철폐 조치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기울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p.289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죄의 개념이 갈수록 정교하게 재정립되어가고 있는 작금의 추세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판관으로서의 우리는, 과학의 발전과 점점 더 많은 교육 기회가 허용되는 현실을 마냥 즐거워할 수만은 없다. 누구나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다른 사람들의 도덕적 결함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처벌을 받아들이는 데는 더욱 인색해지게 마련이다. 죄의 관념이 희박한 오늘날에는 무거운 죄와 가벼운 죄를 구분하는 선을 모래 위에 긋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대죄와 같은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가 그 실체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도 못한 개인적인 갈등들만 난무하고 있기 때문이다. ---p.299 예술, 사회, 역사, 전쟁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죄가 진화한다고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미국 헌법에 대한 해석이 바뀌듯이, 성경에 대한 해석 또한 바뀔 수 있다. 예술가들은 회화, 사진,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서 죄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갱신하라고 강요하면서, 서구 문화를 변화시킨다. 비록 피곤에 지쳐 갈수록 그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죄가 서구 문화를 이끌고 있다. 화폐 위조자, 신용 카드 사기꾼, 명의 도용범, 성적으로 문란한 정치가, 십대들을 노리는 인터넷 사냥꾼 등 수없는 신종 죄인들이 우리의 지적 노력을 자극한다. ---p.330 |
|
“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한다”
죄는 마치 생물체이기라도 하듯 시대에 따라 진화한다! 죄의 피로는 곧 속죄의 피로이다! 죄의식이 강타한 2008년 -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죄란 무엇인가? 죄의 진화와 죄의 피로 얼마 전 한 중년의 남성이 초등학교 여학생들을 성폭행 및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전 국민을 경악과 공포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는 희대의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나기도 했고 미국에서 한인 3세가 총기난사를 저질러 우리의 잠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보다 몇 년 더 앞서,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어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사건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이러한 사건들은 어쩌다 외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알고 있었을 뿐, 우리로서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인명경시 풍조에 모두 아연실색했다. 이제 죄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에 심각성과 절실함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러한 죄의 변화에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 책은 지극히 미국적인 사고방식으로 ‘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존 포트만은 종교학 박사답게 미국인의 죄의식을 종교의 역사에서 풀어낸다. 그는 근래 들어 종교가 새삼 이슈로 부각되면서 죄에 대한 인식도 다시 중요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계기는 2001년의 9·11 테러를 꼽고 있다. 말하자면, 미국인은 이미 9·11로 해서 우리가 2008년도 벽두에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포트만은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 그는 담담한 어투로 “9·11 테러 사건은 미국의 게으른 세대에게 알카에다(Al Qaeda)의 뻔뻔스러운 범죄 행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물을 방법을 찾으라고 강요했다.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임무였는데, 여기에 죄가 유용한 키워드로 작용했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의 적들도 미국인들을 향해 동일한 무기를 들이댔다는 점이다. 이런 인식은 상당수 미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입장을 더욱더 공고히 하도록 부추겼다”고 말한다. 포트만은 죄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 그것은 옛날에도 있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한 때는 심각한 죄로 여겨졌던 고리대금업 등의 죄가 오늘날에는 어느 정도 용인을 받고 있으며, 옛날에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행위나 제도―예를 들면 노예제도―들이 오늘날에는 범죄로 치부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죄는 일상 속에 자연스레 흘러들면서 그 범주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죄의 진화’이고, 그러한 모호함 때문에 단호히 그 범주를 결정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곧 ‘죄의 피로’이다. 기독교의 죄와 세속의 죄 포트만은 “신은 믿지 않으면서 죄를 믿을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전혀 모르는 누군가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사람의 속마음도 모르면서 어떻게 감정을 건드릴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죄를 신에다 결부시킨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는 정말 죄를 믿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무신론자가 자기의 행위를 비추어 보곤 하는 ‘양심의 거울’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냐고 포트만에게 반문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는 한 개인의 의지는 너무나 약해서 죄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간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은 당연히 기독교의 신이다―이 책에서는 기독교 외에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중요한 3대 종교로 꼽고 있으나, 실제로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유대교에 관한 내용은 아주 적고 이슬람교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리처드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이야기하듯이 미국에서 무신론자는 유대인의 숫자와 비슷할 정도로 적고―그는 비록 그 정도면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했지만―대부분은 개신교이거나 가톨릭교에 속해 있으며 그 밖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극소수인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이 죄를 관장한다는 포트만의 관념은 신학적이기 보다는 미국적인 관습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범죄를 다루는 미국 영화에서 우리는 증인이 법정에 출두하여 『성서』에 손을 얹고 서약하는 광경을 흔히 보게 되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는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확고한 종교적 입장을 내세우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의 죄도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기 마련이라는 그의 주장을 보면, 거의 무신론자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가톨릭 신자의 경우 오늘날까지도 피임이나 혼전관계, 수음 등의 행위가 죄에 해당한다는 교리에 얽매어 살고 있다는 점을 신랄하게 공박하기도 한다. 죄와 구원 그리고 잼보니 효과 포트만은 “바실리우스(379년 사망)는 신에게 부여받은,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의 오용을 죄라고 규정했다. 이것이 죄에 대한 가장 적절한 정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그의 정의가 우리와 우리 자신들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와 신의 관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관계,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잠재력’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죄를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신은 죄를 직접 주관하지는 않는다. 즉, 인간에게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만을 부여했을 뿐 나머지는 그 개인의 몫인 것이다. 신에게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이 죄를 짓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첫 대답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서 시작된다. 즉,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죄의 심리학으로 이어진다. 즉, 여기에는 초인적인 힘을 가진 뱀(사탄)과 지옥에 대한 공포, 신께 죄를 지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데 대한 의식 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종교에서 속죄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유대교와 가톨릭교는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반면, 개신교에서는 용서라는 개념조차 거부한다. 이러한 차이는 같은 뿌리를 둔 종교 내에서 종파적 문화의 차이로까지 발전하는데, 그 중심 주제는 먼저,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스스럼없이 죄를 짓다가 마지막에 속죄하면 되므로 죄를 더욱 조장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와, 만약 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 한다면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이므로 속죄하기는커녕 더욱 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낳게 된다. 이러한 딜레마 때문에 초기에는 속죄의 문제가 잼보니(Zamboni, 얼음판의 스케이트자국을 말끔히 없애주는 정빙기)효과를 연상할 정도로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졌다. 하지만 죄가 약화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용서는 이제 더 이상 죄의 면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용서는 ‘어서 와서 후딱 해치우고 가라!’는 식의 진의는 감춘, 가면 속의 결단이다. 그리고 그런 결단의 배경에는 원한을 품고서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극히 현실적인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고 포트만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오늘날의 죄 오늘날의 죄는 과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즉 과학이 발전하면서 예전에는 죄에 머물러 있던 개념들이 정상적인 개념으로 변화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종파든 과학의 발전을 주시해야 하고 서로 간에 진지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포트만은 그 대표적인 예로 ‘수음’을 들고 있다. 가톨릭교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수음을 금지 목록에 올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액 속에 아주 작은 사람이 들어 있다는 오해 때문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동정이다. 즉 사랑과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은 모든 성적 접촉은 죄라는 관념이다. 부부 사이의 정절이 훼손되거나 혼전 성경험 등은 과거에는 심각한 죄였으나 이제는 보편화되어가는 사회 현상이므로 그에 대한 유연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끝으로 환경 파괴, 인간의 잠재력을 막는 사회 구조, 비만, 우울증, 아동 학대, 아내 학대, 성희롱, 유대인 대학살의 부인, 동성애 공포증, 할례, 인종 차별, 배타적인 종교관, 음주 운전 등 예전에는 정상적이었으나 오늘날 새로 죄가된 행위들, 그리고 흑인을 노예로 가혹하게 부려먹었던 백인 선조들의 죄를 물려받아 오늘날 그 후손이 벌을 대신 받는 차별 철폐 조치의 부당성에 관한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