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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저자 서문
현대 중국을 이끌어 온 두 도시 근대와 함께 시작된 두 도시의 경쟁 1. 중국의 북방과 남방 : 동서에서 남북으로 / 베이징성과 상하이시 / 20세기 초의 거대한 변화 2. 경파와 해파의 대치 : 대상하이의 등장과 해파 문화 / 경파의 탄생과 경미의 성숙 이끈 베이핑 시기 / 경파와 해파의 대논쟁 혁명이 바꿔 놓은 도시 풍경 3. 신베이징의 빛과 그림자 : 거대한 베이징성의 죽음 / 북방의 특대도시 신베이징의 탄생 / 신비하고 우아한 과거의 공간 사합원 / 고도의 풍모를 지켜라 / 신베이징의 두 얼굴, 후퉁과 대원 4. 문화대혁명 시기의 베이징과 상하이 : 폭풍의 중심이 된 베이징 / 상하이방의 결집과 극좌문화의 창궐 / 시민 문화와 혁명 문화의 충돌과 저항 5. 상하이의 소시민 : 대상하이의 침몰과 부상하는 광둥 / 상하이 시민의 적응과 변질 / 명작이 더는 나오지 않는 상하이 문화 / 토끼굴 속의 상하이 중산계급 6. 베이징의 신세대 : ‘세대’의 탄생과 청년 문화 / 홍위병의 요람이 된 학교와 대원 / 하방 지식 청년과 1970년대의 지하 문화 / 베이징 청년 지식인 계층의 성장 두 도시 사람들 7. 호방한 베이징인 :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 / 상하이인이 본 베이징인 / 정치를 좋아하는 베이징인 / 라오베이징인과 신베이징인의 공존 / 달변과 유머를 즐기는 베이징인 / 의협과 신의를 중시하는 호방함과 소탈함 / 베이징인의 원형은 사내대장부 8. 똑똑한 상하이인 : 베이징인이 본 상하이인 / 특수한 환경에서 생겨난 상하이인의 원형 / 상하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똑똑하다 / 비판이나 논쟁보다 실용과 실속을 / 완벽과 정밀을 추구하는 합리적 태도 / 규칙과 규범에 따라 작동하는 공동생활 / 상품경제가 낳은 세속화와 개인 이익의 존중 / 외래문화에 관용적인 국제 이민 도시 9. 상하이 여성과 베이징 여성 : 수줍은 상하이 아가씨, 정열적인 베이징 아가씨 / 살림 잘하는 상하이 아내, 당당한 베이징 아내 / 현모양처와 철의 여인을 뛰어넘어 시장경제 속에서 질주하는 두 도시 10. 20세기 말의 새로운 국면 : 광둥발 경제의 신북벌 / 문화의 세대교체와 베이징의 신경미 문화 / 해파 문화의 부활과 되살아난 상하이의 자부심 / 베이징과 상하이의 역전 11. 갈림길에 선 베이징 : 보다 높이 보다 빨리 / 중국의 맨해튼 만들기 / 사라지는 고도, 훼손된 도시 /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베이징 12. 상하이 신천지 : 동방의 파리, 신천지 상하이 / 잃어버린 문화의 왕좌 / 사라져가는 옛상하이를 찾아서 / 모범생 신화를 넘어 저자와의 대화 - 양둥핑 교수가 말하는 21세기의 베이징과 상하이 역자 후기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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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특징과 의미
10년 넘게 중국 본토에서 중국인이 인정한 중국을 설명하는 최고의 스테디셀러 『중국의 두 얼굴』은 초판이 나온 이래 10년이 넘도록 중국 서점가의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개정판이 나오면서 다시 언론과 서점가의 주목을 받으며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 책이 이처럼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책만큼 풍부한 사례들을 제시하며 도시 문화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시도한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 도시문화, 지역문화 출판물 붐을 일으킨 기폭제 역할 이 책은 베이징과 상하이 두 도시 사람들의 특성을 유형화하고 깊숙이 해부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베이징인-상하이인, 남방-북방의 핵심적인 특성을 꼭꼭 집어내는 저자의 솜씨에, 단편적으로 차이점을 인식하고 있던 중국인들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즉 이 책은 문화의 큰 테두리 안에서 거론할 수 있는 베이징과 상하이 두 도시의 운명, 도시의 문화, 도시의 사람들과 같은 테마를 한 데 모아 서술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중국에서 도시 문화나 지역 문화에 대한 출판물이 붐을 이룬 것은 사실 이 책 『중국의 두 얼굴』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중국인들이 찾아 읽는 안내서 『중국의 두 얼굴』은 베이징이나 상하이에 와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안내서 역할까지 할 정도로 중국 독자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중국 문화에 대한 스테디 셀러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두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가 겪은 20세기 후반기의 변천사를 다루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저술들은 대개가 1949년 이전까지를 다뤘기 때문에 신중국 성립 이후 도시의 변천, 특히 문화대혁명이 도시의 운명에 미친 영향 등은 담아내지 못했다. 이 책은 이러한 공백을 메운 셈이다. 이 책의 개요 중국의 핵심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를 통해 중국의 현재와 미래의 운명을 가늠해 본다 『중국의 두 얼굴』은 ‘똑똑한’, ‘합리적인’, ‘실속있는’, ‘세련된’, ‘서구적인’ 등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도시 상하이와 ‘호방한’, ‘신의를 중요시하는’, ‘정치적인’, ‘이상적인’, ‘대범한’, 이미지로 표현되는 베이징의 특징과 차이를 중국 정치·경제·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심도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2000년을 보고 싶으면 시안(西安)에 가세요. 중국의 500년을 보고 싶으면 베이징에, 중국의 100년을 보고 싶으면 상하이에, 중국의 최근 10년을 보고 싶으면 광둥(廣東)에 가세요.” 이 노래는 시간과 공간 양면에서 중국의 도시의 표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각각 황허(黃河), 창장(長江), 주장(珠江)에서 나고 자란 도시 베이징, 상하이, 광둥은 격동하는 중국 문화사 속에서 세 개의 문화를 대표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북방에서는 제왕장상(帝王將相), 영웅호걸, 열사열녀가 많이 등장했고, 남방에는 문사재원(文士才媛), 변사막료(辯士幕僚)가 많았다. 이러한 특성은 베이징의 경극(京劇)과 상하이의 호극(?劇)의 주인공들을 보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경극의 주인공은 천하를 주름잡는 영웅호걸이 다수이고, 호극의 경우는 미남미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두 얼굴』은 베이징과 상하이에 대한 이야기다. 베이징 사람과 상하이 사람 각각에 대해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양자를 비교해가며 두 도시 특유의 문화적 전통과 배경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펼쳐 보인다. 1920-30년대 상하이-베이징 문인들의 라이벌 의식, 사회주의 혁명기에 대처하는 두 도시 사람들의 태도,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한 데 묶이면서도 은근히 드러나곤 하는 출신지역의 특성,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의 흐름을 타고자 하는 아우성 등등. 여기 등장하는 인간 군상은 이름난 학자나 예술가, 정치가뾔부터, 저녁거리를 걱정하며 좁은 골목에서 맞닥뜨리는 소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시대의 이정표가 된 시편이 인용되는가 하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간 유행어들로 한 시대를 증언하기도 한다. 근대까지 수천 년 동안, 문화는 대체로 북방에서 남방으로 전달되었다. 그 뒤로 온난하고 풍요로운 강남(江南)의 땅이 화북(華北)을 대신해 문화 발전의 주인공을 맡았다. 20세기 70년대 말부터는 더욱 더 남하하여, 홍콩에 가까운 광둥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 개혁·개방의 대조류 속에서 문화 발전의 주인공이 됐다. 그중에서도 북방과 남방의 대표 주자라 할 베이징과 상하이는 역사, 문화, 전통,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풍속까지도 완전히 다르다. 1930년대에 벌어졌던 ‘경파-해파 논쟁’(베이징의 문화계 대가들이 상하이 문인들을 ‘해파’라고 부르며 조롱한 데 대해 상하이 문화계가 반격하면서 시작된 논쟁)을 비롯해 두 도시 사람들은 서로에 대한 미묘한 경쟁과 견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8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는 중심으로 군림해 온 수도 베이징, 그리고 1843년 개항 후 독특한 지리적 역사적 환경의 영향으로 세련되고 모던한 이미지를 고수해온 상하이. 청 왕조 몰락 이후의 혼란기와 1949년 사회주의 혁명, 1960년대 문화대혁명, 1980년대 개혁·개방 등 20세기의 대격변을 거치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두 도시 이야기에 흠뻑 젖어 보자. 『중국의 두 얼굴』 자세히 읽기 ① 북방과 남방을 대표하는 두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 상하이인과 베이징인 각각의 특성을 보면 전형적인 남북 두 지역의 문화가 묻어난다. 이 둘의 제일 큰 차이는 남방 사람과 북방 사람의 차이이다. 서로 다른 사회 문화적 전통, 그리고 유전적 요인 등에 의해 체격, 심리, 생리 등 여러 면에서 기본적인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북방 사람은 주로 중원(中原)과 화북(華北) 지역에 거주했는데,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하며, 성격이 호방하고 열정적이다. 그들의 행동 양식은 일반적으로 견실하고 보수적이다. 그들은 영웅호걸을 노래하는 경극(京劇)을 좋아한다. 음식은 면류(麵類) 위주이며, 대파, 마늘, 고추 등 매운 것을 좋아한다. 또 일반적으로 북방 유목 민족과 몽고인의 피가 흐른다고 알려져 있다. 린위탕(林語堂)은 그들을 ‘자연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은 자신들 종족의 활력을 상실하지 않았다. 그들은 중국에서 역대로 지방을 할거하는 왕국을 세워왔다. 그들은 전쟁과 모험을 다룬 중국의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의 소재를 제공했다”라고 말했다. 한편, 장쑤(江蘇), 저장(浙江) 일대에 거주하는 남방 사람은 북방 사람에 비해 몸집이 왜소한 편이지만, 민첩하고 몸놀림이 빠르다. 성격은 온화하고 처세를 잘 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 미묘한 움직임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표현하는 남방극을 좋아한다. 쌀이 주식이며, 단 것을 좋아한다. 또 그들이 생활하는 강남의 도시들은 풍요로운 상업 시가지라서, 예부터 ‘백화가 만발하는 번영의 땅, 온난하고 다정한 유복한 고장’이라 일컬어졌다. 이곳에는 ‘문사(文士)와 재원(才媛) 사이의 사랑의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 광둥(廣東), 광시(廣西) 일대의 화남(華南) 사람들은 몸집이 더욱 작은데, 여기에는 후난(湖南)의 초(楚) 지역 사람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중국 문화의 전통과 고대 원주민의 혈통이 섞인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 그들은 활동적이며 모험 정신이 강하고, 뱀을 비롯하여 각종 하등동물들을 잘 먹는다. ② 800년을 군림해 온 수도 베이징 이야기 중국 북방의 도시는 제각각 내세울 만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 이들 도시에는 수십 년 전까지도 오래되고 귀중한 성벽과 성문이 남아 있었다. 베이징은 800년 전부터 전 중국을 지배하는 중심으로 군림해 온 수도로서, 이 땅에는 황허(黃河) 유역에서 기원하는 5000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중화 문명이 응집되어 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관청과 수많은 학술 기관이 늘어서 있고, 정객, 관료, 문인들이 대를 이어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베이징은 시민 문화 속에 있는 상하이에 비해 엘리트 문화의 전당으로 불린다. 그러나 1911년 청 왕조의 붕괴로부터 1949년 공산당의 중국의 성립에 이르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중국의 수도는 창장(長江) 하류에 있는 난징이었다. 베이징은 ‘베이핑(北平)’으로 개명되었고, 더 이상 수도가 아니었다. 이 베이핑 시대에 제국의 수도로서의 위세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그 대신에 관용과 유머로 가득 찬 서민 문화가 발달했다. 한편 베이징의 엘리트 문화인들은 황제 치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는 했으나, 여전히 정치 지향적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을 앞장서 추진했고, 유구한 고도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신해혁명으로 중단된 수도 베이징의 영광은 1949년 공산당이 혁명에 승리하면서 새롭게 되살아났다. 중국인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800년 동안이나 줄곧 ‘중심’이었던 베이징에 귀속감을 느꼈고, 안정된 역사의 계승이 그곳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베이징은 ‘붉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 ‘위대한 수도’로 일컬어졌다. 베이징은 이제까지 주로 정치,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이에 더해 경제, 과학 기술, 교통, 통신 등까지도 모여드는 중심이 되었고, 거대한 만능형 도시가 됐다. 베이징은 밀집한 마천루, 종횡으로 교차하는 육교, 그리고 수도철강, 연산화학 등 거대기업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관광객들은 오히려 쇠락(衰落)해 버린 뒷골목 ‘후퉁(胡同)’과 전통 주거 양식 ‘사합원(四合院)’을 순례하며 과거 800년이나 지속된 고도의 흔적을 느끼고, 하루가 다르게 진행되는 수도 건설 속에 사라져 가는 고도의 마지막 그림자를 열심히 눈에 담아 두고자 한다. 베이징의 성벽과 패루(牌樓), 다관(茶館), 사찰들과 더불어 겸손, 예의, 온후함을 미덕으로 여기던 ‘라오(老)베이징인’과, 과거 베이징의 도시 문화의 무대였던 후퉁 및 사합원, 그리고 거기서 길러진 문화는 도시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나 버렸다. 이제 후퉁 안에서 정치의 풍운과 문화 사조가 다시 나올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대신에 간부와 지식인을 위주로 하는 ‘신(新)베이징인’은 주로 ‘대원(大院)’에 살았다. 건국 당시 베이징에 이주해 온 공산당, 정부, 군 등은 성(省) 정부급 기관마다 하나씩 광활한 부지를 높은 벽으로 둘러싸고 그 안에다 사무실을 비롯하여 주택, 병원, 상점 등을 두루 갖추었다. 이 때문에 베이징의 대원은 단순한 ‘넓은 정원’이라는 의미를 넘어, ‘일과 생활의 장’을 의미하는 베이징의 독특한 말이 됐다. 대원 안에서 신베이징인들은 새로운 엘리트 문화를 만들어 냈다. 대원 문화는 혁명 문화라고 불리기도 한다. 거대한 정치권력과 문화적 에너지를 갖춘 대원 문화는 무대의 중심에 자리 잡았고, 오늘날 베이징 도시 문화의 주역이 됐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이 궤도에 오른 1970년대 말부터 중국의 중요한 사상, 문화, 이론 등은 거의 다 베이징의 대원에서 생겨났다. 온갖 새로운 예술의 모색과 문화 창조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현대 중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세대의 베이징인들은 이 시기부터 중국 문화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대원에서 태어나고 자라, 1950년대에는 ‘홍령건(紅領巾:목에 붉은 스카프를 두른 소년선봉대를 가리킨다)’, 60년대에는 ‘홍위병(紅衛兵)’, 그리고 70년대에는 ‘지식 청년(知識靑年:문화대혁명 기간 중 농촌으로 강제 이주된 도시 청년. 지청(知靑)으로 줄여 부르곤 한다)’을 경험했다. 이렇게 공통적인 인생 경험을 가진 그들은 ‘제3세대’라 불린다. 1980년대에 이들은 중국 문화를 이끄는 ‘제3세대 학자’, ‘제4세대 화가’, ‘제5세대 영화감독’ 등으로 성장했다. ③ 드라마틱한 반전을 거듭한 상하이 이야기 우뚝 솟은 궁전들과 함께 8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도(古都) 베이징과 비교할 때, 상하이는 서태평양에 면한 모던한 도시다. 상하이는 베이징 사람들이 보기에 어딘지 기이한 데가 있는 ‘마도(魔都)’로서, 혈통을 알 수 없는 혼혈아와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상하이 지역에는 원(元) 왕조가 베이징에 수도를 정한 지 14년 뒤인 1291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현(縣)이 설치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인근의 쑤저우(蘇州)였기에 상하이는 ‘작은 쑤저우’라 불리곤 했는데, 그 무렵 상하이 사람들은 이렇게 불리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고, 상하이는 19세기 중반 개항을 맞기까지 거의 무명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상하이는 1843년 11월 7일 개항과 동시에 비로소 남방의 항구도시와 근대도시 경쟁을 벌이게 된다. 1860년대에 상하이의 대외무역액은 중국에서 가장 일찍 개항한 광저우(廣州)를 추월해 전국 1위에 올랐고, 상하이는 이 영예를 1986년까지 120년 동안 줄곧 지켰다. 청말(淸末)부터 상하이에서는 근대 시민 문화가 일어났고, 이색적인 ‘해파 문화’가 여기서 탄생했다. 이민(移民)이 가장 많은 국제적 대도시 상하이는 중국의 지식인이 가장 많이 모이는 도시이기도 해서 각종 신앙과 주의를 내건 정당과 단체가 모여들었다. 다양한 학설, 이론, 사조, 관념을 제창하는 신문과 도서가 출판되었고, 서로 다른 풍격과 유파의 문학, 미술, 음악, 연극 등이 번영했다. 근대 중국의 한 세대의 정치, 상공업, 문화, 예술의 엘리트가 여기서 길러졌다. 상하이의 운명은 매우 드라마틱하다. 1949년 이후로 상하이는 태평양을 굽어보는 국제 대도시에서 폐쇄적인 대륙의 공업단지일 뿐이었다. 상하이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솥’이라 불렸고, 해파는 자산계급의 풍조 또는 개인주의와 동의어가 되어 버렸다. 1950년대에 상하이는 ‘혁명의 대상’이 되었고, ‘자본주의와 싸우는 최전선’으로 변했다. 당시 상하이 사람들은 동쪽 끝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서부터 서쪽 끝 신장(新疆)의 사막에 이르는 변경 지역에 동원되었는데, 그 목적은 자본주의화 되어버린 상하이인을 노동 개조하여 사회주의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사회 개조와 계급투쟁 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속에서 상하이는 1960년대부터 다시금 ‘혁명의 대상’에서 사회주의의 최우수 표본, 계획경제의 모범생이 되었고, 극좌파 문화인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상하이는 일변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발상지가 되었고, 반대로 ‘위대한 수도’ 베이징은 ‘자산계급 총사령부’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상하이는 가장 먼저 역사적 대변혁의 출발점에 서곤 했지만,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인 1980년대 들어서는 중국이 문화 재생을 위한 장려한 대행진을 벌이는 것과 달리 과거와 같은 왕성한 활력이나 시대 조류를 이끌 만한 힘을 보여 주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상하이라는 과거의 ‘절세의 미녀’는 결국 자신의 낙오된 모습을 숨길 수 없게 되었고, 상하이는 ‘쇠약해진 거인’, ‘빛바랜 사진’ 등으로 불리게 됐다. 푸둥지구 개발이 시작된 1990년대는 상하이라는 도시 역사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푸둥지구 개발을 계기로 대상하이는 놀랄 만한 속도로 새로운 시대로 돌입했다.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하게 접해온 도시 분위기, 시각적 이미지, 질서, 안전, 생활 리듬, 심리적 밸런스 등이 하룻밤 새에 깨져 버리는 경험을 했다. 상하이는 하나의 커다란 공사 현장이 되어 버렸고, 땅이란 땅은 죄다 파헤쳐졌다. 그 속에서 상하이인의 왕성한 물욕, 제때 기회를 잡아 돈을 버는 유전자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상하이인들이 무엇보다 철저하게 자각한 것, 그것은 바로 주식이었다. 주식으로 거대한 부를 얻은 양바이완(楊百萬)이라는 사람은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지의 상인들과 사업가들은 이제 상하이가 ‘중국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됐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사람들은 분명 부지런히 일하고 있으며, 한동안 묻혀 있던 상하이인 특유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다시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던 상하이 사람들도 이제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④ 중국의 북방과 남방 오늘의 상하이와 베이징의 관계에는 유구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중원(中原)에서 발원한 북방 문명은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그 중심지가 서쪽의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으로부터 동쪽으로 이동, 최종적으로는 황허(黃河)의 하류 유역인 지금의 베이징 땅에 도달했다. 동시에 선진적 북방 문화는 남하하여, 창장(長江) 유역과 주장(珠江) 삼각주를 개발했다. 근대에 들어 남북이 충돌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번영한 남방은 새로운 경제 중심지가 됐을 뿐만 아니라, 서양 문화를 앞서 받아들였다. 농경 사회의 전통적 도시와 대비되는 근대도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들 광저우(廣州)와 상하이 등은 정치와 문화의 중심이었던 북방의 도시와 대립하며 새로운 사회혁명의 발원지가 됐다. ‘혁명의 남방’과 ‘보수의 북방’이라는 대립과 충돌은, 20세기 중국의 역사 속에서 줄곧 나타났다. ⑤ 경파와 해파의 대치 1930년대에 벌어진 ‘경파-해파 논쟁’은 베이징의 문화계 대가들이 상하이 문인들을 ‘해파’라고 부르며 조롱한 데 대해 상하이 문화계가 반격하면서 시작된 논쟁이었다. 경파 문화와 해파 문화의 대립과 충돌은 문학사적인 의미를 넘어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경파 문화를 형용하는 말에 ‘귀족적’, ‘고상함’, ‘엄숙함’, ‘전통적’, ‘아카데미즘’, ‘정치색 짙은’ 등이 있다면, 해파 문화를 형용하는 말에는 ‘세속적’, ‘대중적’, ‘오락적’, ‘공리주의’, ‘상업화’, ‘모던’, ‘식민지적’ 등이 있다. ⑥ 신베이징의 빛과 그림자 건국 후 베이징은 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상세한 도시계획을 세우고 단행했다. 역대 왕조가 베이징 중앙부에 세운 베이징성과 성내의 궁전과 제단과 어원(御苑), 백성들의 거주지 등 옛 건축물은 수십 년 동안 차례로 무너져 갔고, 성벽이 있던 자리에 대신 들어선 것은 제2순환도로와 입체교차로, 그리고 전국에서 처음 건설한 지하철 등이다. 베이징은 혁명과 행정의 강력한 힘을 동원하여 전국의 문화 자원을 끌어들였다. 수도는 이제 교육, 과학, 기술, 매스 미디어, 출판, 문학, 예술, 철학, 사회과학 등 모든 문화 분야의 기구와 인재가 집중된 중심이 되었다. 도시 면적의 팽창과 인구의 증가는 물, 흙 등 자연 자원의 심각한 부족을 초래해 도시 기능의 정비는 뒤처졌고, 환경은 악화 일로에 처했다. 도시 자원의 배치 및 지역 공간의 불균형은 천안문을 중심으로 한 도심부에 무거운 부담을 안겨 주었다. 베이징의 1인당 수자원 보급량은 전국 평균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았고, 환경의 질을 평가하는 지표가 되는 조류 생태계의 변화로 1960년 베이징 지구에 있던 352종의 조류는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세기 동안 베이징이 잃어버린 옛 모습은 돈을 얼마를 들여도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이다. ⑦ 문화대혁명 시기의 베이징과 상하이 1966년부터 10년 동안의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베이징은 명실공히 혁명의 중심이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경파 지식인들이 ‘예술이 정치의 선전 도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섰다가 ‘구(舊)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우파’로 낙인 찍혔다. 1960년대부터 혁명투쟁의 창끝은 중간파나 우파에서 그치지 않고, 좌파 문화인, 공산당원 문화인에게까지 겨눠졌고 누구나 전전긍긍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문혁 기간 동안 중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경미 소설’의 대가 라오서는 자살했고, 고도(古都)의 수호자였던 량쓰청은 병사했다. 베이징성도 사라져 버렸다. 중국 문화사의 흐름은 ‘문화대혁명’에 의해 완전히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상하이는 자본주의 경제의 첨병이었다는 이유로 건국 이후 줄곧 ‘자산계급의 가마솥’이라고 묘사되었다. 상하이는 ‘혁명의 대상’이었고, ‘자본주의와 투쟁하는 최전선’이었다. 이런 끊임없는 정치 투쟁 속에서 상하이는 ‘신체제의 모범생’, ‘계획경제의 표본’으로 대변신했고, 결국은 문화대혁명의 발원지가 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상하이와 베이징의 성격과 지위는 극적으로 역전되어, 과거 자본주의의 대명사였던 상하이는 순식간에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발상지로 다부지게 성장했다. 상하이에 있던 ‘전국 자산계급의 사령부’는 이제 베이징의 몫이 되어 버렸다. 상하이는 ‘문혁’에 크게 공헌했고, 문혁 속에서 상하이는 극좌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⑧ 상하이의 소시민 일찍이 자유경제를 구가해 온 대상하이는 신중국 성립 이후 계획경제라는 체제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고 상하이 사람들은 금세 신체제에 적응해서 신속하면서도 부드럽게 계획경제로 전환해 갔다. 이제 상하이 사람들은 “굶는 사람은 없지만, 돈을 버는 사람도 없는” 환경 속에서 생존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실업과 해고의 걱정도 없어졌다. 옛 상하이의 노동자들에겐 자본주의 제도와 시장경제 환경 속에서 부지런함, 검소함, 강한 책임감, 일에 몰두하는 태도, 어려운 일도 마다 않는 정신, 건강한 직업 도덕 등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 속에서 길러진 생활 습관과 행동 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획경제 아래에서, ‘철밥통(鐵飯碗)’, ‘한솥밥(大鍋飯)’ 방식에 길들여진 신상하이인들은 전혀 다른 행동 방식을 만들어 갔다. 20세기 초 상하이는 중국에서 가장 활기찬 도시, 소비?대중문화?오락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광둥(廣東)이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하고 베이징이 눈에 띄게 변해 가는 동안, 대상하이라는 과거의 위세는 퇴색해서 상하이는 ‘빛바랜 사진’에 비유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상하이는 더 이상 과거의 ‘해파 문화’처럼 독자적인 유파를 만들어 낸다거나, 기념비적인 작품을 창작하여 국내외를 떠들썩하게 하는 일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소시민의 공기가 충만했던 상하이는 1990년대 개혁?개방의 혜택을 입어 다시금 경제발전을 이루게 되고, 급속한 변화는 다시금 도시의 활기와 자신감을 되찾게 했으나 숨가쁘게 변하는 도시화와 국적 모를 건축물들 사이에서 정체성 찾기를 과제로 남겨 두고 있다. ⑨ 베이징의 신세대 1950년대에 ‘신중국의 꽃봉오리’로 추어올려졌고, 1960년대에는 천하를 주름잡는 ‘홍위병 전사’였으며, 1970년대에는 농촌의 학생이 되어 가난한 농민에게서 가르침을 구하는 ‘하방(下放) 청년’이었던 세대는 ‘홍위병 운동’, ‘농촌 하방운동’, ‘4?5 천안문 사건’ 등을 거치며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파란만장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들의 독특한 생활 경험과 인생 체험은 오히려 개인의 귀중한 자산이 되었고, 이러한 독특한 생활 경험과 인생 체험을 한 세대가 공유하면서 그 의의는 개인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체험이 되어, 하나의 사회 역사적 현상을 만들어 냈다. 1970년대 말부터 전국의 농촌에서 도시로 돌아온 수천만의 하방 지식 청년들은 회의하는 세대, 사고하는 세대, 황폐한 세대, 방황하는 세대, 실패한 세대 등으로 불린다. 이들 신세대 청년은 1978년부터 베이징의 번화가인 시단(西單)에 모여 정치의 민주화를 외치면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참신한 예술 기법으로 시, 소설, 회화, 영상 작품을 창작했고, 시단 거리의 벽에 덕지덕지 붙여 ‘발표’했다. 사회 각 영역에서 맹렬한 기세로 ‘새로운 패자(覇者)’로 대두한 그들은 문학계와 미술계에서는 ‘제4세대 작가?화가’, 영화계에서는 ‘제5세대 감독’으로 불리며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음악계에서는 80년대 중반 재능 넘치는 청년 작곡가들이 혜성같이 등장했고, 베이징의 지식 이론계에서도 청년 지식인들이 부상했다. ⑩ 호방한 베이징인 베이징 사람들은, 정치를 직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까지도, 다들 정치를 매우 좋아한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관심과 정치적 활동은 언제나 집단 행위, 집단 이익, 집단 가치를 지향한다. 베이징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서도 이러한 특성을 그대로 발휘하여, 집회를 열고, 조직을 만들고, 선언을 발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단체의 힘을 써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상하이 사람들의 우월감이 상하이시의 경제적 지위와 유행을 주도하는 센스와 교육 수준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베이징 사람들의 우월감은 주로 베이징이라는 정치 중심의 지위에서 왔다. ⑪ 똑똑한 상하이인 상하이인을 한마디로 설명해 보라면, ‘대(大)상하이의 소(小)시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상하이인은 서양 문화, 도시 사회, 조계 제도, 강남(江南)의 풍토 등 많은 요소들로부터 생겨난 인간형이다. 상하이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똑똑함’이다. 똑똑함은 상하이인들이 지난 100년 동안 상업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마해 온 생존의 지혜이다. 상하이인은 실속을 차리는 동시에 합리적이기도 해서 그들은 효율, 질, 아름다움, 편리함, 실용적인 면, 쾌적함, 정교함 등을 추구한다. 상품경제는 세속화를 낳았고, 필연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게 되었다. 상하이인은 자신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의 생활 방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따지고 들지 않는다. ⑫ 상하이 여성과 베이징 여성 상하이 여성들에겐 어딘지 유혹적인 데가 있다. 그녀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근면한 생활 습관, 생존의 지혜, 사람을 대하는 요령, 여성이라는 강한 의식 등을 갖고 있었다. 다른 지역 여성들에 비해 여성스러운 행동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상하이 사람은 여성에 대해 ‘디아(?)’라는 말을 곧잘 쓴다. ‘디아’란 애교 있고 사랑스럽다는 뉘앙스를 갖는 칭찬의 말이다. 그 모습에는 연약하고 사랑스런 모습,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지난 2000년의 세월 동안 강남 지역에서 형성되어온 것이다. 가냘프고 온화하면서 정숙한 ‘가인(佳人)’의 풍모를 지닌 여성을 추구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디아’는 한편으로, 근대 이후 상업화된 도시 생활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고, 또한 대도시의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상하이 여성들이 단련하고 체득한 것이기도 하다. 베이징 여성은 북방 특유의 ‘호방함’을 갖고 있다. 남성의 눈을 끌기 위한 과장된 애교는 베이징에서 통하지 않는다. 남녀 간의 교제 시에도 그녀들은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상대를 대하곤 했다. 베이징에서 상하이 여성들처럼 부끄러움을 탔다가는, 귀엽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전형적인 베이징 여성은 매사에 대범하다. 그녀들은 미워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거침없이 행동하고 웬만한 일에는 긴장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베이징에서는 연약한 여성을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상하이 여성과 비교하면 그녀들은 경제관념, 즉 이익 계산의 관념이 떨어지는 편이다. 또 베이징 여성은 고상한 감정과 도의, 순수한 우정과 애정을 중시한다. 그녀들은 실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귀한 집 아가씨와 가난한 집 청년의 연애와 같은 로맨스가 현실에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⑬ 20세기 말의 새로운 국면 1980년대부터 광둥은 기적적인 경제 발전을 일궈냈다. 1986년 광둥성 국제무역 총액은 130년 만에 상하이를 넘어서 전국 1위가 되었다. ‘남풍’이 강하게 부는 20세기 말의 중국에서 광둥발(發) 지역 문화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광둥 사람들은 상대를 더 이상 ‘동지(同志)’라고 부르지 않고, 남성이라면 ‘선생(先生)’, 여성이라면 ‘샤오지에(小姐)’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호칭은 이내 중국 전역에 퍼졌고, 또 전국에서 ‘정통 광둥 요리’, ‘광둥 출신 주방장’을 내건 광둥요리 식당이 우후죽순으로 앞다퉈 문을 열었다. 도시 생활 혁명, 소비 혁명, 부엌 혁명, 화장실 혁명과 더불어 큰 거실과 작은 침실을 갖춘 합리적인 주택 설계 등도 광둥에서 비롯되었고, 보디빌딩 콘테스트, 패션쇼, 미인 대회, 주식 투자 붐 등도 광둥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베이징인 및 상하이인과 비교했을 때, 광둥 사람들은 줄곧 ‘졸부’라는 이미지를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베이징과 상하이에 비해 광둥에 문화적인 축적이 빈약하다는 점과 관계가 있다. 전형적인 베이징인은 ‘정치인+문화인’이라 할 수 있고, 전형적인 상하이인은 ‘해파 문화’에 ‘상(商)’과 ‘학(學)’의 양단이 있다는 점에서 ‘상인+문화인’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광둥 문화는 ‘상(商)’ 한 가지밖에는 없기 때문에 전형적인 광둥인은 ‘적나라한 상인’이라 보게 된다. 이 때문에 광둥에서는 바로바로 팔리는 대중 통속 문화가 손쉽게 사회의 주류 문화가 되어 왔다. 한편 1980년대 후반 베이징에서는 새로운 세대, 즉 제4세대 예술가들이 요란하게 무대에 올랐다. 미국의 팝아트 사조를 자연스레 따르게 된 제4세대 예술가들의 근대주의 지향은 필연적으로 이제까지의 엘리트 문화나 선배들이 좋아하던 지식인들의 우아한 문화를 무너뜨렸다. 젊은 그들은 사회의 권위를 체현하고 있는 경찰, 아버지, 노인, 학자들을 조롱하고, 일, 공부, 결혼, 가정, 도덕을 경멸했다. 앞선 제3세대가 회의(懷疑), 자성(自省), 비판 등의 태도로 파괴한 전통을 회복하고자 했다면, 제4세대는 냉소, 권태, 방랑 등의 자세로 전통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제3세대가 지식인들의 고급문화를 확립했다면, 제4세대는 록 음악으로부터 신경미 소설까지, 팝아트, 대중 유행 문화를 확립했다. 상하이의 부흥은 1990년 4월 중공 중앙 및 국무원이 정식으로 상하이 푸둥(浦東) 지구를 개발하고 개방한다고 선언하면서 시작되었다. 대상하이는 놀랄 만한 속도로 새로운 시대로 돌입했고,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익숙하게 접해온 도시 분위기, 시각적 이미지, 질서, 안전, 생활 리듬, 심리적 밸런스 등이 하룻밤 새에 깨져 버리는 경험을 했다. 상하이는 하나의 커다란 공사 현장이 되어 버렸고, 땅이란 땅은 죄다 파헤쳐졌다. 그 속에서 상하이인의 왕성한 물욕, 제때 기회를 잡아 돈을 버는 유전자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계 각지의 상인들과 사업가들은 이제 상하이가 ‘중국 제일의 상업 도시’가 됐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사람들은 분명 부지런히 일하고 있으며, 한동안 묻혀 있던 상하이인 특유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다시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과거 지나칠 정도로 검소했던 상하이 사람들도 이제 멋을 부리기 시작했다. ⑭ 갈림길에 선 베이징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베이징에서 벌어지는 도시의 비대화와 초대형 개발은 심각하다. 도시화는 ‘속도위반’을 하고 있으며, 점점 그 무게중심을 잃어가고 있다. 도시는 고도 경쟁, 도시 미화의 미명 아래 어떤 개성이나 예술성, 기능성도 그곳에서 찾아볼 수 없이 마구잡이식 잔디 개발은 수자원 낭비와 생물 다양성을 파괴하고 있다. 베이징 시내 중심부에서 벌어지는 고도 경쟁은 한 편의 비극이다. 국제적 대도시로 거듭나고자 하는 베이징은 GDP, 고층 빌딩, 자가용 등으로 말미암아 분명 크고 위풍당당하지만, 한편 심각한 ‘도시병’도 앓고 있다.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 상업의 열기는 뜨겁고, 부동산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도로는 정체되고 공기는 오염되었으며 수자원은 고갈 위기에 처해 있다. 시내 평균 차량 속도는 떨어졌고, 베이징은 세계에서 자동차 배기가스 오염이 가장 심각한 도시이다. 오늘날 라오베이징인의 일상생활을 보고자 한다면, 베이징의 명물 후퉁(胡同)과 사합원(四合院)을 돌아보고 싶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이다. 지난 몇 년 사이, 철거와 개발을 밀어붙이는 불도저에 맞서 후퉁과 사합원 보호에 나선 민간단체들의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학자, 지식인들도 고도의 풍모를 지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을 끊임없이 호소했지만, 이러한 노력들도 개발의 열기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 민간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이후 보호 대상으로 지정된 사합원 가운데 50여 곳이 ‘합법적’으로 철거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 역사 문물의 이름을 가진 채 사라진 옛 거주 지역은 70곳이 넘는다. 후퉁을 넓혀 자동차 도로를 만들고, 사합원을 헐고 그 자리에 쇼핑몰을 짓는 풍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⑮ 상하이 신천지 오랜 침체기를 지나, ‘공화국의 맏아들’ 상하이가 생기를 되찾고 있다. 수천 수백의 고층 건물들이 우뚝우뚝 들어선 푸둥(浦東) 지구는 마치 마술의 현장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와이탄, 상하이 금융지구, 아시아 최고의 진마오(金茂)빌딩 등이 자리잡은 가운데 상점의 쇼윈도는 파리와 뉴욕의 패션을 그대로 갖다놓은 듯하다. 이렇게 점점 더 웅장하고 화려한 건설이 추구되는 가운데, 상하이의 도시 특색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새로운 상하이의 참신함, 유미주의, 그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의 변화는 사람들에게 매우 강렬한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가짜라는 것이다. 신천지는 상하이가 아니다. 이곳은 외국인이 보는 상하이이고, 동시에 상하이인이 와서 외국을 보는 곳이다. 신천지는 전통과 현대, 중국과 서양을 한데 모아놓은 하나의 ‘문화적 상상’일 뿐이며, 거짓 고전주의이고, 홍콩식의 속된 곳이라고 비판받고 있다. 영혼이 없이 그저 시끌벅적한 장소에 불과하며, 돈을 내고 분위기를 사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심지어 이곳은 ‘상하이의 상처’라는 원성이 나올 정도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짜가 헐린 자리에 가짜가 들어왔으며, 위조품들을 세워놓은 꼴이라고 지적하곤 한다. 베이징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상하이에서도 고유의 멋을 음미하고자 한다면 일부러 찾아다녀야 하는 지경이 됐다. 전통적인 거리와 주거지들이 철거되는 모습을 보는 상하이 시민들은 한편으로 반기고, 또 한편으로 두려워한다. 그들은 거주 조건이 개선되기를 원하면서도, 기존의 생활환경을 잃어버리고 교외로 이주해야 한다는 데 대한 상실감에 빠져 있다. 새로운 거주지에서 고급 주택의 안락함을 누릴 수는 있지만, 도시 서민들의 일상생활의 네트워크는 단절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된 심리 속에 상하이의 옛 거리는 이제 사진 속에서나 느낄 수 있을 뿐이고, 과연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높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