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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재 고구려 유물 1
일제 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재검토와 關東地域 소재 고구려 유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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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논문편
일제강점기 고구려 유적 조사 연구 재검토Ⅰ_1913년까지 평양 주변에서 이루어진 조사를 중심으로
1945年以前の高句麗壁墉古墳の調査Ⅰ
1945년 이전의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 연구 Ⅰ

2. 유물편
도쿄대학
도쿄박물관
도쿄예술대학
와코대학
릿쿄대학
사이타마대학

3. 유물설명
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유물
도쿄대학 건축학연구실 소장 고구려 벽화 모사도
도쿄대학 문학부 소장 유물
도쿄예술대학 소장 유물
도쿄예술대학 소장 벽화 모사도
도쿄예술대학 소장 와전 유물
와코대학 소장 유물
릿쿄대학 소장 유물
사이타마대학 소장 유물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07월 04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규격외
ISBN13
9788961870658

책 속으로

고구려 고분 굴착이 국권이 강탈된 1910년에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근대에 가장 먼저 고구려 고분을 굴착한 사람은 강서군수였던 이우영(李宇榮)으로, 1904년 강서에 있는 고구려 무덤을 굴착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우영은 당시 대묘와 중묘를 굴착했는데, 이 사실을 확인한 것은 강서에 주둔하던 일본군 오타 후쿠조(太田福藏)이다. 오타는 1905년부터 일본군 제15사단 제58연대 제3대대에 배속되어 위생병으로 평양에 머물렀는데, 강서에도 8개월간 파견되었다. 군수 이우영이 이전에 강서 고분을 굴착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오타는 부대장을 설득하고 이우영 군수의 허락을 받아 동료군인과 자신이 가르치던 조선인 학생들을 동원하여 1906년 11월 26일 굴착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굴착 시작한지 3일 만에 고분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석실 안으로 들어갈 때 현지인들을 대동하였는데, 이는 무덤의 굴착을 금기시하는 당시 조선 사회의 분위기를 의식한 행동이며, 대한제국의 국권이 형식적으로나마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석실 안에서 유물은 찾을 수 없었고, 네 벽면과 천장에 벽화가 있어 이를 확인하고 스케치하였다. 강점기 초기에 고구려 고분을 포함한 각종 ‘고적 조사’를 주도한 세키노가 오타의 스케치를 확인한 것은 1911년 12월이었다. 당시 제대 후 도쿄미술학교에 복학한 오타는 강의를 나왔던 세키노에게 그 스케치를 보여주었고, 세키노는 이를 고구려 고분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강서 삼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는 계기였다. 그 후 1906년에 강서에 주재하던 일본인 오카무라 코이치(岡村幸一)가 군수와 접촉하여 자비로 강서 대묘와 중묘를 굴착하고 벽화무덤을 확인하였는데, 이때 출토된 석비의 파편을 오카무라가 가져갔다고 한다. 오카무라가 군수 이우영과 접촉하여 강서 고분을 굴착했다는 것은, 1904년의 굴착도 이우영이 단독으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조상 무덤의 굴착을 금기시하던 조선 사회에서 그것도 동네에서 조망이 좋은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고분을 조선인 군수가 단독으로 파헤쳤을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이 마을의 고분을 예로부터 왕후묘로 판단하여 군수가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마도 당시 개성과 강화도에서 일어난 이주 일본인 주도의 고분 도굴과 관련이 깊으며, 일본인들의 이같은 요구에 이우영이 협조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1904년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해로, 고분이 위치하는 강서지역은 진남포에 상륙한 일본군이 평양으로 진군하는 길목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즉, 고구려 고분의 굴착행위는 강제병합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으며 조선 사람을 대동하고 임의로 굴착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남한에서 한국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고구려 고분이 북한이나 중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한 실측이나 조사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 고구려 고분은 이미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이미 대부분 조사되었습니다. 다만 조사 후 정식으로 보고된 예가 거의 없어 지금까지도 개별 고분의 조사 경과와 조사자, 조사 내용에 대한 이해가 크게 부족한 실정이다. 본 책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고구려 고분 조사 후에 제출된 『조선고적도보』Ⅱ의 사진과 당시 일본학계에 보고된 논문과 강연회 원고, 세키노 다다스의 원본 야장 등을 종합하여 우선 1913년도까지 평양 부근에서 조사된 개별 고구려 고분의 조사 경과와 총독부에서 파견나갔던 이와이 기수가 그린 고구려 고분의 측량도와 내부 실측도, 오타와 오바 쓰네키치가 그린 고분벽화의 모사를 참고로 그 실체를 파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본 자료는 그 자체로도 자료로서의 의미가 크기 때문에 이를 고분별로 정리하여 소개하였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우선 1910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고분의 조사를 담당한 조사단의 성격이 분명해지고 전반적인 조사 흐름과 방법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진만 공개되었던 사동 고분의 조사 내용을 파악하였고, 매산리 고분군은 알려진 2기만이 아니라 원래 5기가 조사되었음을 새롭게 밝히며 여태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고구려 고분 3기의 구조와 내용을 미공개 야장 자료와 함께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강동(江東)의 대표적인 고구려 고분인 한왕묘에서는 원래 보고된 것보다 훨씬 많은 기와 유물이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되어 소장되었음을 밝혀냈고, 이를 조사하여 개별 기와 유물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정리를 통해 일제강점기 초기 ‘고적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과 진행 풍경이 비교적 선명하게 복원되었습니다. 고적 조사를 수행하는 세키노에게 고구려 고분의 정보를 전 것은 당시 평양에 거류하던 많은 일본인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지역의 유지였습니다. 군인 신분으로 강서 대묘와 중묘를 굴착한 오타는 물론 당시 고구려 고분에 관심을 가지던 많은 일본인들 대부분이 사전 절차 없이 여러 고구려 고분을 굴착한 정황도 드러났습니다. 고구려 고분 조사에 동원된 조선인 인부들은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머리에 흰색 두건을 씌웠습니다. 한왕묘의 발굴에서는 인부가 매몰되자 작업 중의 조선 인부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귀가하는 정황이 드러나는데, 당시 조선인의 일반적인 고분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구려 고분은 1913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사되었습니다. 해방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조사된 수많은 고구려 고분 역시 보고서가 제출되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인 재검토 작업을 통해서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총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 책을 통해 고구려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강점당하는 동안 그들에 의해 발굴되었던 아픈 사실을 직면하게 되지만, 그들이 조사한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그 우수성을 깨다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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