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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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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존재감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떤 모임에 가든 여자들이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앞뒤 안 가리고 경쟁자가 될 터였다. 모든 여자들 속에 내재하고 있는 여성성이 도발하도록 파동을 보내는 것은 아마도 그가 지닌 독특한 분위기 때문인 것 같았다. 페티그루도 그 파동을 느꼈다. 그녀는 거기에 반응했고 도저히 거부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의 여성적 감수성이 그녀를 단숨에 배반하면서 그녀의 마음속에 만일 그가 라포스에게 해준 것과 같은 키스를 자신에게 해준다면 자기 인생을 십 년은 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라포스의 젊음과 아름다움과 매력이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페티그루는 그 정도로 어리석은 여자는 아니었다. --- p. 57
하지만 그렇게 끝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떤 곳에서 좀더 머무르기를 이토록 간절하게 바랐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차마 이 유쾌하고 걱정 없는 태평스러운 분위기를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비록 잠시 그녀를 소쿠리 비행기 태우면서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그녀를 대단한 사람인 양 떠받드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도 말이다. 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닉의 매력 앞에서 정에 약한 라포스의 방어 능력이 과연 무너져 내릴지, 마이클은 또 누구고 어떻게 생긴 사람일지 전혀 모르는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낼 수 있단 말인가?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비롯된 눈물로 눈이 따끔따끔해지는 게 느껴졌다. --- p. 91 그녀는 필사적으로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기만 기도했다. 라포스네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새로운 .모험을 알리는 나팔소리였다. 이 집은 푸줏간 주인이나 빵 굽는 사람이나 촛대를 만드는 사람이 문을 두드리는 여느 가정집과는 달랐다. 라포스네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한 바탕 소동이자, 극적인 사건이자 해결해야 할 새로운 위기였다 오오, 하느님께서 한 번만 더 자비를 베푸시어 이곳에 더 머무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게 하시기를……. 그리하여 나머지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하루 동안만 볼 수 있게 해주시기를……. 그러면 나중에 늙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따분한 여생을 오늘 이 완벽한 하루를 회상하고 되새기며 즐겁게 보낼 수 있을 텐데……. --- p. 91 지금 나누고 있는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페티그루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상태를 즐기고 있었다. 정신적인 도취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제까지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뒤바리와 나누는 대화의 기묘함이 그녀의 뼛속까지 짜릿한 기쁨을 안겨주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그녀와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생각해보라.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들은 마음을 활짝 열고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녀도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들이 페티그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놀라운 방식이 그녀를 세포 하나하나까지 짜릿한 기쁨으로 떨게 만들었다. 아니, 놀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그 한 마디로 그녀도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투는 또 어떤지! 그녀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황당한 논리에, 모든 문장이 하나같이 사람을 금방 취하게 만드는 칵테일처럼 들렸다. 그들이 내뱉는 모든 말이 그녀에게 자신이 교양 있고 세련된 사람이라는 뿌듯한 만족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뚫고나가는 자신의 태도라니! 그녀가 그 방면으로 완전히 초짜라는 사실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리라. --- pp. 114~115 “제 눈썹이랑,” 뒤바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속눈썹은 연한 갈색이에요. 눈썹은 뽑아내고 새로 그린 거예요. 속눈썹은 짙지 않은 주제에 짧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새로 심었죠. 검정색에 길고 컬이 있는 걸로요.” “꼭 거짓말 같군요.” 페티그루가 중얼거리면서 마침내 뒤바리의 두 눈이 왜 그렇게 놀랄 만큼 아름다운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생기 없고 어정쩡한 얼굴색은 그 얼간이 같은 색깔이랑 딱 어울리는 거예요. 그런데 저한테는 옅은 크림색이 훨씬 나을 것 같더라고요.” “정말로 그러네요.” 페티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코가 문제였어요. 그 점에서는 당신이 나보다 나아요. 하지만 맥코믹은 아주 훌륭한 외과 의사거든요. 나한테 새로운 코를 만들어주었죠.” “말도 안 돼.” 페티그루가 신음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뭐니 뭐니 해도 이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어요.” 뒤바리가 털어놓았다. “치열이 고르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50파운드로 해결 봤죠.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페티그루가 의자 뒤로 기대앉았다. “믿을 수가 없군요. 정말로 믿겨지지 않네요.” 페티그루가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p. 125 “애초에 생각했던 대로의 당신이에요.” 라포스가 용기를 북돋웠다. 그런 다음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야말로 성스러운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페티그루의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경탄을 보내는 걸로 그 순간을 기념했다. 페티그루는 거울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쓰러지지 않기 위해 의자 등을 꽉 붙잡았다.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아찔한 기분이었다. 전혀 다른 여자가 거울 속에 서 있었다. 유행의 첨단을 걷는 여자가 균형 잡히고, 세련되고 완벽한 모습으로, 어디 한 군데 허술하지 않은 품위 있는 자태로 그 안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여자였다. 분명히 젊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분명 늙은 것도 아니었다. 하긴 누가 나이를 따지려 들까? 아무도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저토록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한테 누가 그러겠는가? 드레스의 화려한 검정색 벨벳이 너무도 깊고 그윽하게 반짝이는 바람에 마치 화려한 색깔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예술가가 그것을 창조해냈다. 드레스는 그걸 입은 사람을 대담하면서도 정숙하게 보이게 하는 화려하고 멋진 디자인이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담함인지 정숙함인지 알아내고 싶다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것이었다. --- p. 155 “당신은 그럴 수 있습니까?” 조가 물었다. “그럴 수 있다니요?” “나와 연애할 수 있으시냐고요.” 페티그루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기뻐서 몸부림을 칠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이 거의 짓궂은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이게 바로 연애질이군.’ 페티그루가 기뻐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즐거움을 누리기까지 왜 이토록 오래 기다렸을까? “저는 젊은 처녀가 아닙니다.” 페티그루가 교묘하게 말을 받았다. “아하!” 조가 방심하지 않고 있다가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그러실 수 있다는?” “아마도.” --- pp. 305~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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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숨겨진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영국의 여류작가 위니프레드 왓슨의 매혹적인 여자소설이다. 연애 한 번 못해본 고지식하고 가난한 노처녀가 우연히 겪는 하루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고 있다. ‘여자는 일생에 두 번째의 기회를 갖는다.’라고 했던가. 그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통해 주인공 페티그루는 마흔이 되도록 잊고 있었던 여자들 간의 우정, 자기 자신의 숨겨진 재능과 욕망을 발견하고 180도 달라진 인생의 첫날을 맞는다.
우리나라에는 처음 소개되는 위니프레드 왓슨은 1935년에서 1943년 사이에 단 6권의 소설을 냈는데 첫 소설『산꼭대기 Fell top』(1935)부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작가가 가장 좋아한다는『미스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 Miss Pettigrew Lives for a Day』(1938)는 당시 미국, 프랑스, 독일에서 전격 출간되면서 널리 사랑을 받았다. 작가의 절필과 함께 독자들에게 잊혔던 이 소설은 2000년 페르세포네 출판사에서 클래식 시리즈로 재출간하면서 페티그루의 어느 특별한 하루처럼, 94세가 된 작가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처럼 르네상스를 맞는다. 2008년 초에는 또 메이저 영화사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에이미 애덤스를 캐스팅해 영화화하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어째서 30년대 소설이 새삼스레 독자와 영화 관객들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는 것일까. 무엇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로 조금도 낯설지 않은 까닭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가로지르며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이른바 고전 소설로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30년대 판 ‘신데렐라’이며 ‘섹스 앤 더 시티’라고 평가되는 이 책은 유쾌 발랄하고 천진한 여자들이 펼치는 기분 좋은 웃음과 상큼한 감동, 그리고 누구든 책을 잡으면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재기 넘치는 이야기꾼의 시원한 문장과 스토리에 어쩔 수 없이 몰입되는 휴식 같은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