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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반전 개선 행진 천국에서 지상에서 블랙홀 해피엔드 옮긴이의 말 |
Ephraim Kis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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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에프라임 키숀, 80 즈음에도 여전한 익살
에프라임 키숀은 이미 오래전에 풍자 소설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예술비평서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로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스라엘 작가다. 좀 잘나가는 독자들―미학자 진중권, 소설가 성석제, 뮤지션 이적―은 여러 지면에서 키숀을 좋아한다고 공공연히 밝혔을 정도다. 이번에 마음산책에서 펴낸 『행운아 54』(원제 : Der Gluckspilz)는 작가가 세상을 뜨기 두 해 전인 2003년에 발표한 신작 장편소설이다. 당시 키숀은 여든 즈음이었고, 이 소설은 그의 유작이 되었다. 여든 즈음은 웬만한 작가라면 기력이 쇠해서 한번 내려놓은 펜을 다시 들 수 없을 때다. 하지만 키숀은 히브리어 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세계적인 풍자 작가답게 나이를 잊고, 자신의 신작을 기다리던 독자들을 위해 펜을 들었다. 그는 『행운아 54』에서 자신의 건재함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개를 위한 스테이크』와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에 충만하던 작가 특유의 유머―고만고만한 일상을 기막힌 이야깃거리로 만드는―와 풍자―명성에 현혹되는 대중심리와 매스미디어의 추악한 면을 까발리는―가 이 소설에도 그대로 이어지며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은 것이다. 50권이 넘게 책을 펴내며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노대가가 죽기 전까지 자기만의 ‘익살스러운 아우라’를 잃지 않으며 독자들을 웃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바로 이웃에 사는 ‘고개 숙인 남자’의 이야기, 참 답답하지만! 그간 남들에게 별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비쳤다며, 훌륭한 인물도 못 되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는 인간도 아니라고 고백하는 한 남자가 있다. 언제나 ‘그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다던, 그러나 작은 키에다 돈도 능력도 없어 세련되고 섹시한 여자들을 결코 가질 수 없었다고 하는 아저씨. 기껏 아동극에 당나귀 역으로나 출연하며 입에 풀칠을 하다가 그 일마저도 끊겨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백수. 참으로 별 볼일 없는 『행운아 54』의 주인공이다. ‘칼 뮐러’라고 불리는 이 삼류배우는 머리카락까지 급속도로 빠지고 있다. 오죽하면 스무 해가 넘도록 같이 살아온 아내(사립학교 교사) 힐데와 딸이, ‘칼’이 없는 자리에서 이런 대화를 다 할까.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딸 베네딕티나가 말했다. “오로지 우리 아빠 같은 멍청이만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제 어떻게 한대, 엄마?” “나도 몰라. 적어도 너라도 정상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단다. 니네 아빠는 단 한 번도, 자기가 맡은 배역의 단 한 문장도 제대로 해내지를 못했어. 하지만 전에도 늘 그랬지.” “도대체 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한 거야?” “불쌍한 남자한테 빠져버린 거지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럴 수가 있단다.” (38쪽) 그야말로 전형적인 고개 숙인 남자다. 더구나 칼 뮐러는 (고개 숙인 남자라서 그러하겠으나) 소심하고, 아내 의존적이고,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다. 그런 그는 오늘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파악하려 (윗집에 사는 정체가 의심스러운 심리상담가가 전해준) 『남편과 남성들의 상식』을 들추어 보고, 집 안에 처박힌 채로 성적性的 판타지에 사로잡혀 포르노 잡지를 뒤적거린다. 그 인생의 한 방, ‘54 = 갑오’를 잡은 행운아의 모험담 한데 이런 ‘찌질이’에게도 ‘인생의 한 방’이 있었으니! “때로 운명은 우리에게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설 만한 놀라움을 선사한다”고 했던 그의 말과도 같게! 어느 날 칼 뮐러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행운이 찾아온다. 여자 밝힘쟁이에다 짠돌이인 유명 영화제작자가 〈열정의 회오리〉라는 TV 미니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오로지 제작비를 줄일 속셈으로 그를 캐스팅한 것이다.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대사가 거의 없는 배역이었기 때문에 무명배우를 캐스팅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 그런데 주연을 맡은 스타 배우가 일면 근사해 보이는 그 역을 맡겠다고 마구 우기는 바람에 칼은 그와 배역을 바꿔 갑자기 주연으로 승격하고,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벌이며 첫 회를 촬영한다. 점입가경으로, TV 미니시리즈의 첫 회가 방영되자 저명한 비평가가 신문에 긴 리뷰를 실어 칼 뮐러를 극찬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때 엉뚱하게도 ‘카밀로 로이드 로마노프’라는 예명을 얻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칼은 그 뒤로 대단한 명성과 최고의 미인이 따르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도 잠시 기자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생활이 왜곡, 폭로되면서 하룻밤의 슈퍼스타 칼은 끝없이 추락하고…… 숨 막히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다시 날아오른 칼과 그의 가족은 해피엔드에 안착하게 되는데……. 행운아가 되던 해에 칼 뮐러의 나이는 ‘54’였다. 하지만 그 ‘54’는 인생이 기울어가는 5학년 4반의 ‘54’가 아니었다. 화투판에서 ‘섰다’의 족보로 치자면 한 끗발 하는 ‘갑오’(패 2장의 합이 9가 되는 경우)였던 셈이다. 받은 패마다 좋지 않아 내리 잃기만 하던 ‘꾼’이 일거에 본전까지 되찾으며 큰판을 쓸어버렸다고나 할까. 복에 겨운 이 행운아가 55세에 이르러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 바로 『행운아 54』다. 그러나 나는 아무 일도 안 했습니다. 난 그저 운이 좋았어요. 나는 단지 인생이라는 로또에서 ‘위로상’을 받은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게 그다지 자랑스러워할 일은 못 되지요. 그보다 내가 자랑스러운 것은, (…) 이제는 나의 내면의 진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291쪽) ‘인생이라는 로또’에서 뜻하지 않게 대박을 맞고, 덩달아 새로운 자아상自我像―미인을 애인으로 둔 돈 많은 한량―까지 확립하며 뭇 남성들의 로망을 이룬 칼 뮐러. 인생 쓴맛이 지겨워 달달한 즐거움이 필요한 독자라면, 특히 되는 일이 없다며 ‘깊은 우울’에 빠져 있는 독자라면 한번 읽어보아야 할 소설이다. 인생 역전의 황홀한 판타지, 그 자체만으로도 신나지 않은가. 마냥 따분한 우리에게도 언제 ‘카를로 로이드 로마노프’ 같은 로또가 한 방 터질지 모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