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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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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죽음이야말로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든든한 밧줄일때가 있다. 죽음이 인간을 가장 인간으로 살게 하는 저울 저편의 추일 때가 있다. 그 여자는 그걸 안다. 자신의 경험으로. 사람이 얼마나 모질면 제 목숨을 스스로 끊을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 p.165 --2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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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왜 그렇게 심각하게 공포에 질렸을까. 몇 가지 이유를 짚어 본다. 늘 버겁고 무서웠던 선배, 이미 한 체례 어깨에 얼굴을 비벼 얼어붙게 한 선배, 그 후 독수리의 날개 그림자처럼 나타나던 선배, 그의 존재는 두려움일수 밖에 없다. 더구나 그 여자는 신사임당식 여성교육을 받다가 시골에서 올라온 열아홉살이다. 키가 작고 몸무게는 38킬로그램이고, 늘 혼자 책만 읽으며 자라서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세상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았다면, 주먹의 힘이라도 좀 강했다면, 그토록 겁에 질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라이 앞에서 토끼가 겁에 질릴 때, 토끼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이 약자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 여자도 그랬을 것이다.
--- p.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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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주름살 하나하나에는 얼마나 많은 말 못할 어려움들이 깃들어 있을까
작가 김형경의 자전 장편소설
"그 여자를 키운 것은 8할의 친구나 2할의 문학과 음악이 아니라 세월이었다고. 바위에 끊임없이 부딪치는 파도처럼, 그 ?자를 향해 몰아쳐 오던 세월이었다." 작가 김형경씨의 장편소설 "세월"이 출간되었다. 이 소설은 1억원 고료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김형경씨가 자신의 파란많은 체험을 바탕으로, '그 여자'김형경을 키운 10할의 세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 10할의 세월은 화자(話者)인 '그 여자'가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을 거쳐 '그 여자'가 되기까지, '그 여자'를 탁마시킨 도저한 상실의 세월을 일컫는다. '그 여자'는 작가가 작가와 작품 사이의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장편인 "세월"은 작가가 30여년 동안 안으로만 삭이고 있던 '봉인된 시간'의 안쪽을 송두리째 뒤집어 보인 것. '그 여자'의 어머니 이야기와 아버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진 '유난스러웠던 가족사며 성장기', 지금도 '그 여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성폭행을 낱낱이 털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적잖은 파문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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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의 세월, 그 '봉인된 시간'의 피봉을 뜯다!
'그 여자'가 강릉, 수원, 강릉, 서울, 여수, 경기도, 다시 서울을 무대로 집 없는 민달팽이처럼 떠돌아다니게된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외도로부터 비롯된다. 그 불화의 여진 속에는 부모의 별거로 하숙집에 맡겨진 두 남매가 있고, 위인전과 세계문학전집이 있고, 하숙과 자취생활이 있고, 선생님과 학교가 있다. 그리고 성장통과 첫사랑, '잿빛 바바리'의 뒷모습과 '그 남자'의 충혈된 눈빛, '그 남자'로부터의 성폭행과 7년동안의 고통, 사회와의 타협과 세상 속으로의 진입, 통 속의 안팎과 남성 이데올로기, 자신을 얽매고 있던 자의식과 도덕적 강박관념들, 그 모든 것을 잃고도 '그 여자'가 끝끝내 버리지 않은 문학과 관해, 열한 살 이후 계속되어온 상실의 기억들을 퍼내고 있다.
이 소설은 외형상, 화자인 '그 여자'가 산 위로 올라갔다가 지난날을 회상하고, 하산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그 산은, 한 계집아이가 어른이 되기 위해 '어금니를 물면서 상실감을 참고, 입술을 깨물며, 모든 회한과 굴욕'을 참으며, 그렇게 넘어온 고난의 산이다. 작가는 이같은 이야기를 하나의 물방울이 상류에서 하류로 나아가 마침내 드넓은 바다와 마나는 상황 속에 밀도있게 배치시킨다. 이 소설의 흥미로움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예컨대 하나의 물방울이 시원지를 떠나 하류로 흘러 흘러 마침내 바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곧 화자가 '그 아이'에서 '그 여학생'을 거쳐 '그 여자'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이자 세월의 도저한 의미를 깨닫는 수행(修行)의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 여자는 지금, 하나의 작은 물방울이다" 이 소설은 먼저 물방울에 불과한 '그 여자'가 '그 아이'라고 부르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시작한다. '그 여자'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그 여자', 남동생, 그리고 두 명의 어린 동생으로 구성된 단란한 가정이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불행이 찾아든다. "어느 날 모든 게 달라졌다. 어머니가 아프고 아버지가 회사를 그만 두었다." 어머니가 왜 아픈지, 아버지가 왜 아픈지 모른 채, '그 여자'와 남동생의 삶은 이 알 수 없는 불화의 틈 바구니에 낀다. 자상하고 감정적인 아버지와 이상주의자이자 이성적이며 서사적인 어머니 사이에 생긴 불화는 아버지의 외도 때문이었고, 결국 부모의 별거로 어린 두 동생은 어머니에게, '그 여자'와 남동생은 아버지의 손에 맡겨진 채 무수한 하숙집과 자취방을 전전한다. 열두살 때부터 시작된 이런 생활은, 부모의 불화로부터 기인한 자폐적 태도를 보다 강화시키며, '그 아이'로 하여금 세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기보다는 세상을 상처나 혼란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 시절, 이미 스슬를 달래기 위해 혼자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공상에 빠져들던 '그 아이'는 서서히 개천으로 나아가 '그 여학생'으로 성장, 세상살이의 힘겨움에 눈뜬다. 예컨대, 아버지가 친척집이라고 소개하며 자신을 맡긴 그 집이 실은 돈을 받고 보살펴주는 하숙집임을 알았을 때, 그리고 중학교 시절 친구 보경이와 만남과 이별, 동생의 자퇴 앞에 망연자실하던 '그 여학생'은 점차 세계에 대한 적의를 다지면서 누에고치처럼 단단한 자의식의 굴레를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