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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전보
2부 유언 해설_ 글쓰기를 통한 트라우마 극복하기_ 조현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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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들은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 상속받은 집에 그냥 눌러앉아 엄청나게 많은 유산을 어떤 일이 있어도 날리지 않고 확고하게 지키는 것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식구들은 모두 자기도 모르는 새 타성에 젖게 만드는 소유지의 속성에 물들어 갔으며, 소유지와 한통속이 되어 끔찍하고 구역질나는 모습으로 변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 p.32
수세기 전부터 인간은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졸업장이나 타이틀을 보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카페에서 후버 씨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후버 박사를 만나는 것이며, 마이어 씨와 식사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석사 엔지니어 마이어 씨와 식사하러 가는 것이다. 인간이 아니라 석사 엔지니어가 될 경우, 단순히 뮐러 여사가 아니라 변호사 뮐러 씨의 부인이 될 경우 비로소 그들은 목표를 달성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사무실에서 아가씨를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이 우수한 졸업장을 고용한다. --- p.63 우리는 사진이라는 악마 같은 발명품을 이용함으로써 수백만에서 수십억이나 되는 두 사람의 표정 중에서 일순간의 표정만 포착했던 거야, 그리고 비웃는 표정을 포착한 바로 그 순간 때문에 평생 동안 사진에 찍힌 두 사람을 비난해 대지. --- p.184 형의 걸음걸이, 자세, 목소리는 점점 더 아버지를 빼닮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의 자세, 걸음걸이, 목소리 그리고 결국엔 자연스레 아버지와 똑같은 정신 상태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맏아들은 애초부터 집안의 가장으로 결정되었으며 곧 그리 되고 말 것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시간문제일 뿐이다. … 부모님은 요하네스에게서 소망하던 자식을 얻은 셈이다. … 형은 부모님이 항상 원하던 이상적인 아들에 차츰 가까워졌고, 그것도 내가 이런 이상형에서 멀어지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부모님을 닮아 갔다. --- p.271 이 시대에 존재하는 자는 모두 이 시대의 주주들이다. --- p.280 시류에 부응한 생각은 언제나 시대에 부적절한 생각이다. 시대에 적절한 생각은, 실제로 시대에 적절한 생각인 경우라면, 언제나 당대를 앞지른다. --- p.282 물론 오만은 자신을 경멸하고 이로 인해 참기 힘든 주위를 극복하는 데 적절한 수단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만하지 않다면 패배할 것이며, 또한 오만은 보통 때, 그러니까 오만하지 않을 때의 우리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세계에 저항하는 권력 수단일 따름이다. 이 세계는 우리를 위해 어떠한 배려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만을 이용해 먼저 선수를 쳐야 하며, 잡아먹히기 전 아직 우리 자신을 구할 수 있을 때 오만을 부려야 한다. --- p.332 언제나 하는 말처럼 민주주의 국가라고 떠들어 대지만, 실은 가공스럽고 비굴하며 수치심을 모르는 국가이고, 자신의 가공스러움과 비굴함, 수치심을 모르는 철면피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함을 대외적으로 자랑하기까지 한다. 살인마에게 터무니없는 연금을 송금하고 공로 훈장을 떠안기면서, 셰어마이어와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국가가 도대체 무슨 국가란 말인가, 나는 의문스러웠다. --- p.341 독일 사람들이 시인의 군주로 재단하고 재봉해 만든 귀족 괴테, 철학적인 들상추를 미끼로 곤충과 아포리즘을 낚는 수집가인 소시민 괴테 … 철학적인 소시민 괴테, 낙천주의자 괴테 … 광석에 번호를 매겨 분류하는 자, 점성가, 독일 사람들에게 영혼의 잼을 다목적용으로 가정용 용기에다 담아 주는, 엄지손가락을 빠는 철학적 인사 괴테. 자명한 이치를 책으로 묶어 코타 출판사를 통해 최고의 정신적 자산으로 판매하고 교사들로 하여금 귀에 못이 박이도록 이를 주입시키게 하는 괴테. 수백 년간 독일 정신을 팔아먹으면서 예의 그 부지런함으로 … 평균적 수준의 독일인들에게 의지했던 괴테. 철학적으로 사람들을 꾀는 바이마르의 피리 부는 사나이 괴테 … 괴테는 일용품으로 사용되는 독일인이며, 그들, 독일 사람들은 약처럼 괴테를 복용하면서 그 효과를, 치유력을 믿는다 … 괴테는 근본적으로 독일인들의 치료사이며 정신 치료를 목적으로 한 최초의 독일 호메오파티 치료사라고 했다. 말하자면 온 독일 국민이 괴테를 복용하면 건강해진다고 느낀다. 그러나 민간 요법 치료사들이 모두 돌팔이듯이 괴테는 가짜이며, 괴테의 시와 철학은 독일인들이 가장 하기 좋아하는 엉터리 거짓말입니다. --- p.440 세기의 전환기에 이르면 사유하는 것으로, 사유하는 것을 통해 존재해 온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며, 사유하는 인간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단 한 가지, 이 세기가 끝나기 전에 자살하라는 것입니다. --- p.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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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냉소적인 문학 수업이자 가장 잔혹한 유언장, 『소멸』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수상록에서 인용한 짧은 구절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 ‘나’가 제자 감베티에게 행하는 문학 수업이기도 하다. 베른하르트의 작품에는 다른 작가와 작품들이 많이 인용되는 것이 특징인데 『소멸』에는 무려 49명의 작가와 22개의 작품이 등장한다. 게다가 주인공의 직업 자체가 독일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프란츠 요셉 무라우는 단순히 특정 작가와 작품에 대해 언급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베른하르트의 책읽기가 독자의 책읽기와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장치라 할 수 있다. ■ 죽음을 통해 완성된 베른하르트의 문학 세계 베른하르트의 소설은 베른하르트의 삶 그 자체이다. 제국주의가 여러 대륙을 침략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이 세계를 휩쓰는 동안 유럽을 비롯한 많은 서구 국가의 작가들-소위 지식인으로 분류되거나 자처한-은 대부분 문학적 망명을 택했다. 그들은 어떻든 자기의 근거인 조국과 맞닥뜨려 모순과 회의를 깨뜨리기보다 경계에서, 제3의 지점에서 관조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베른하르트는 조국 오스트리아의 테두리 안에서 끊임없이 기득권과 갈등하고 반목하면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고 작품을 통해 진실을 해부하고 고발하며 기꺼이 맞닥뜨렸다. 오스트리아 정치권의 무수한 비판과 오해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집요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조국을 가차 없이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베른하르트와 조국 오스트리아의 반목은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 공증인을 통해 남긴 유언을 통해 잘 드러난다. “내가 쓴 것은 모두 저작권법의 유효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국경 내에서 공연되고 인쇄되거나 낭독되는 것을 금한다.” 이 유언은 소설 『소멸』의 결말처럼 삶과 죽음을 통해 어떤 허위도 극복하려는 베른하르트의 삶(죽음)을 완성하는 것이자 굳은 의지로 읽힌다. 자신의 조국이, 어쩌면 베른하르트 작품의 모태이자 거름을 제공했던 조국이 자신의 작품을 하나도 활용할 수 없도록 한 유언으로 베른하르트의 작품 세계는 완성된 것이다. 이는 조국에 대한 짓궂은 보복이자 가장 냉혹한 애정이다. 조국 오스트리아를 정직하게, 객관적으로 보았다는 이유로 기소당한 베른하르트는 이제 조국이 자신의 저작권을 침범할 수밖에 없는 거장으로, 고소하는 피의자로, 조국과 개인을 희극적인 관계로 역전시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