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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
양장
최완수
대원사 200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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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부 불상의 기원, 인도
불상에 대한 의문
불교의 출현 배경
불교미술의 시원
아쇼카왕의 기념주
불상 불표현의 시대
불상이 출현하다
초기의 불상
불타가 타고난
대인상(大人相)
상투 트는 풍습
육계(肉)의 출현
나발(螺髮)이 이루어지는 과정
황홀한 아름다움 보여 주는 다울라트 출토 불입상
마투라 불상의 출현
성인식(成人式)과 소라상투
소라상투가 육계(肉)로
나발(螺髮)의 생성(生成)
신비로운 굽타 불상
마투라 양식의 최후
나신(裸身)과 같은 사르나드 불상
녹야원(鹿野苑)의 「처음 법륜을 굴리는 불좌상」

2부 비단길을 따라, 중국
중국에 전해지는 불교
비단길을 따라온 불상
중국에 출현한 초기 간다라 양식의 불보살상
착융(融)의 불상 조성
양식화의 진행
자기회복(自己回復)의 길
불교의 다양한 발전
삼엄한 관중(關中) 문화 전통
업도파(都派) 불상 양식
장안파 불상 양식
양주파(凉州派) 불상 양식
병령사석굴
강남파(江南派) 불상 양식
통일 양식의 출현
가혹(苛酷)한 폐불(廢佛)
복불(復佛)의 환희(歡喜)
운강석굴(雲岡石窟)
포복식 불의(袍服式佛衣)의 출현
의복까지 중국화된 불상

3부 법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한국
법수(法水)는 동쪽으로 흐르고
고구려의 성장
모용(慕容)씨와 힘겨루기
고국원왕과 모용황
동수(冬壽)의 무덤
고구려의 불교 전래 배경
광개토대왕의 웅비(雄飛)
동시에 출현한 두 마리의 용
석가문(釋迦文) 불제자(佛弟子) 모용진(慕容鎭)
내실(內實)을 다지는 장수왕
제해권을 빼앗긴 해상왕국
예산사면석불(禮山四面石佛)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신라의 불교 수용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
경주남산불곡(佛谷)선정불좌상(禪定佛坐像)
연가(延嘉)7년명불입상
진흥왕은 찰제리종(刹帝利種)의 참된 뼈대(眞骨)
미륵보살은 누구인가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저자 소개 1

崔完秀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이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19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서울대 미대 회화과 및 대학원(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 연속), 연세대(1976년부터 2015년까지 39년 연속)?이화여대?동국대?중앙대?용인대?국민대 및 대학원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추사집(秋史集)』(1976), 『김추사연구초(金秋史硏究艸)』(1976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연구의 일인자이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19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동안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서울대 미대 회화과 및 대학원(1975년부터 1992년까지 17년 연속), 연세대(1976년부터 2015년까지 39년 연속)?이화여대?동국대?중앙대?용인대?국민대 및 대학원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추사집(秋史集)』(1976), 『김추사연구초(金秋史硏究艸)』(1976), 『그림과 글씨』(1978), 『불상연구(佛像硏究)』(1984), 『겸재(謙齋) 정선(鄭敾)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1993), 『명찰순례(名刹巡禮)』(전 3권, 1994), 『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전 2권, 1998), 『조선왕조 충의열전』(1998),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1999),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전 3권, 2007), 『겸재(謙齋) 정선(鄭敾)』(전 3권, 2009), 『추사집(秋史集)』(2014), 『추사 명품(秋史 名品)』(2017), 『겸재의 한양 진경』(2004년 초판, 2018년 전면 개정판)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 「간다라 불의고(佛衣攷)」, 「석가불정도설(釋迦佛幀圖說)」, 「겸재(謙齋) 정선(鄭敾)」, 「겸재진경산수화고(謙齋眞景山水畵考)」, 「추사실기(秋史實紀)」, 「추사서파고(秋史書派考)」, 「비파서고(碑派書考)」, 「한국서예사강(韓國書藝史綱)」, 「추사(秋史)일파(一派)의 글씨와 그림」,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평전(評傳)」, 「우암(尤庵) 당시의 그림과 글씨」, 「고덕면지총사(古德面誌總史)」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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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최완수(崔完秀)
1942년 충남 예산 출생.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한바 있다. 현재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자 서울대학교 인문대 국사학과,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 및 대학원,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동국대학교,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佛像硏究』, 『謙齋鄭敾眞景山水畵』, 『그림과 글씨』, 『秋史集』, 『金秋史硏究艸』, 『명찰순례 1?2?3』, 『진경시대』(공저), 『조선왕조 충의열전』,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등이 있으며, 주요 논문으로는 「珠考」, 「간다라 佛衣攷」, 「釋迦佛幀圖說」, 「謙齋鄭敾」, 「謙齋眞景山水畵考」, 「秋史實紀」, 「秋史書派考」, 「碑派書考」, 「韓國書藝史綱」 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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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2년 10월 31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14쪽 | 1181g | 188*254*30mm
ISBN13
9788936909727

책 속으로

이「포복삼존불입상」도 가장 정비된 포복불 양식을 대표하는 좋은 예이다. 두 어깨를 덮어 내리며 일정한 간격의 층잔을 이루어 나가면서 새의 날개 깃처럼 좌우로 벌려 나간 의벽의 표현은 날개를 편 걷한 새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데, 왼쪽 어깨와 팔뚝 너머로 넘겨져 가닥가닥 날리는 깃털 같은 옷자락의 어지러운 표현과 오른쪽 어깨를 덮어내린 승가리가 오른팔둑에 의해 들리면서 새의 접은 날개인 듯 표현된 소매 모양이 어찌 그리 대칭으로 느껴져 군제미를 이루어 놓는지!
아마 승가리 밑에서 층을 이루며 2단으로 전개되는 승기지와 니원승의 옷주름이 같은 기세로 좌우로 뻗쳐나가면서 철저하게 균제성을 유지하는 것과 연결되는데서 오는 느낌이리라. 치마와 내의의 표현을 2단으로 구분지어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이름과 실제는 일치되어야 한다는 철저한 중국식 표현 의식이라 할 것이며, 같은 간격의 층진 옷주름과 팔뚝을 적당한 높이로 들게 하여 이루어 놓은 소매 형태로 황제의 곤룡포를 상징하게 한 표현 기법 역시 중국미술을 지배해 온 상징주의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치마끈은 분명히 신대의 표현으로 가슴에 맺어져 배꼽 아래 허벅지 사이로 드리워져 있으며, 내의의 옷깃 역시 중국식 옷깃 모양으로 오른쪽으로 여며져 있다. 이런 균제성, 완벽성, 상징성은 결국 권위주의적 표현 의식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니, 태무제 이래 절대화되기 시작한 제권의 현황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하겠다.
얼굴을 훨씬 둥글넓적하게 변하고 목은 가늘며 체구는 빈약해져 초기 탁발씨들의 야성적 아름다움이 많이 감퇴되고 있으나 대신 한식의 세련미가 두드러지고 있다. 머리칼의 표현은 이미 16동 주존인 「시무외포복불입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위 오만자형이라 할 수 있는 소용돌이무늬의 상징적 표현으로 신비화시킴으로써 종래 얕은 음각선에 의한 가는 머리칼이나 삭발이 가지던 소극적인 의미를 청산하는 듯 하다.
좌우로 감실 밖에 두 구의 보살상이 시립해 있는데, 이 역시 천의의 표현이 양쪽 어깨 위에서 날개처럼 벌어지고 아래로 내려온 두가닥은 허벅지 사이에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중국식 여자 의복에서 보이는 피건의 표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보살상은 철저한 대칭을 이루어 균제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좌우에 협시한 회중은 아직 철저한 대칭으로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높게 상투를 틀어 올린 천인, 삭발한 비구, 머리칼이 곤두선 귀신들이 뒤섞여 있고 그 자세도 각양각색이어서 혹은 호궤합장하며 혹은 어떤 몸짓을 하는 자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이는 청법회중을 각종 형태의 자유로운 자세로 표현하던 인도식 조각 전통을 아직 완전히 불식하지 못해, 균제의 법칙이 철저히 적용되지 않은 단계의 양식 기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해야 하겠다.
이와 동일한 양식의 「포복삼존불입상」이 6동 4벽의 상층에 3구씩 모두 12구가 조각되어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로부터 포복식 불의는 남중국을 비롯한 전중국으로 확산되고 곧바로 우리에게도 전해와서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서 조성되는 거의 모든 불상이 이런 포복식 불상 양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 p.184~185

출판사 리뷰

이 책의 기획의도
어느 사찰에나 불상은 있다. 그렇게 많은 불상들이 있고 또 흔히 볼 수 있지만 불상은 불교의 예배 대상으로 바라볼 뿐 깊이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상에 인류의 역사가, 특히 인도대륙과 중국대륙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동방의 역사가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되면 분명 불상이 달리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미술사에서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큼 막중막대하여 조각사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는 이 불상은 대체 언제 어떻게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을까. 이 책은 유달리 탐미적인 열 살 소년의 엉뚱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황금빛 나는 인물상의 잘생긴 얼굴에 왜, 머리에는 작은 고둥껍질 같은 것을 다닥다닥 붙여 놓았을까??
이 소년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이자 간송학파의 으뜸어른 최완수 선생이다.
1966년 간송미술관에 자리를 잡은 최완수 선생은 밤새워 대장경을 읽으며 이상한 부처님 머리가 어째서 지금과 같이 만들어지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는 일에 몰두한다. 결국 이 일은 불상의 출현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하고 불상 출현의 이해는 불교의 성립과 발전 과정을 모르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로 화갑을 맞은 선생은 30여 년 동안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불상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져 우리에게 전해져 왔는가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하여 우리 불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가는 일의 길잡이 노릇을 자청하였다.

필자는 지난 30년 동안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등을 중심으로 한국미술사와 동양미술사 및 한국미술의 이해와 동양미술의 이해 등 강의를 통해 매 학기 수백 명을 대상으로 기억상실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쳐 왔다. 미술품을 통해 우리 역사를 바로 보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되찾은 수재들이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해 나가게 되자 이 강의 내용을 언론 매체를 통해 일반에게도 전파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중략)
우리 미술사 속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불교미술사를 주제로 택해 불교미술품의 양식 변화 과정을 추적하며 그에 반영된 우리 역사 전개 과정을 사실대로 밝혀 나가는 작업이었다. 독자들의 공감과 격려 속에서 (신동아에) 장장 30회를 연재하니 인도의 불교미술 발생으로부터 고려 초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불교미술의 중심인 불상 얘기가 주축이 되었지만 탑파나 동종, 부도, 탑비 등 불교미술 전반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언급하였고 그와 관련된 이념 배경이나 역사 사실을 가능한 한 사실대로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필자의 40년 공부가 모두 이 속에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의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의 주요 내용
1부 불상의 기원, 인도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 이후 약 600년 동안 부처님의 모습은 어디에도 표현되지 않았다.불타의 전기를 소재로 그려내는 불전도(佛傳圖)에서 불타를 빈자리(空座)나 발자국 등 상징표현으로만 처리했을 뿐이다.
600년이 지난 서력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쿠샨제국의 중심지인 간다라 지방에서 대승(大乘)불교가 일어나자 서북인도의 간다라와 중인도의 마투라 양대 지역에서는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세계무역을 주도하는 상업제국으로 번영을 누리던 쿠샨제국에서 불교가 점차 세계성을 띠어가면서 불보살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타력(他力)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중생들을 모두 큰 수레(大乘)에 태우고 깨달음의 경지에 함께 도달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이들이 보살이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은 보살의 초월적인 능력에 귀의하게 되니 이로부터 불보살이 예배 대상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인격 신상을 출현시킨 그리스 문화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 결과로 간다라 지역에 300여 년 동안 뿌리내리고 있었으니 불보살상이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승불교 이념이 쿠샨제국을 가득 채워 가는 동안 불상은 점차 예배 대상으로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제2부 비단길을 따라, 중국
대승불교가 쿠샨제국에 가득 차고 넘쳐 중국으로 흘러갈 때는 불상이 예배의 주대상으로 신앙의 구심점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중국 최초의 전도승이었던 가섭마등(迦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도 ?42장경(四十二章經)?과 석가불입상을 백마 등에 싣고 왔던 것이다.
불경과 불상을 처음 접한 후한 명제(明帝, 58~75년)는 우선 불상을 본떠 만든 뒤 남궁(南宮)의 청량대(淸凉臺)와 개양문(開陽門) 위에 봉안하고 자신의 수릉(壽陵)인 현절릉(顯節陵) 안에도 모셔 놓았다 한다. 이처럼 중국 불교는 처음부터 불상을 예배대상으로 삼는 불교로 출발하게 되었다.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쿠샨제국의 중심지였던 간다라 지방에서 떠나 왔을 터이니 이들이 모시고 온 불상은 당연히 간다라 초기 불상 양식을 보였을 것이다. 이로부터 전도승들이 계속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중국인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후한이 멸망기에 접어들어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기 시작하는 2세기 후기부터다. 그러나 간다라 초기 불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이 불상 양식은 이후 장인들의 몰이해와 모방의 반복을 거치면서 극단적인 퇴영화(退化) 현상을 보인다.
중국에도 불교가 들어온 지 20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불교를 본격적으로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어난다. 이는 중화로서의 자존의식이 세계 어느 민족보다 강했던 한족(漢族)이 400년 치세이념이던 유교가 더 이상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없는데다 이를 대치할 만한 새로운 이념이 나타나지 않아 전에 없던 사상적 공백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 위에 야만족이라고 무시하던 북방의 호족(胡族)에게 무력으로 유린되어 참담한 굴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한 현실에서 심리적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귀의처가 절대로 필요하였다는 시대적 여건도 크게 작용하였던 듯하다.
이런 때를 맞이하여 불도징(佛圖澄, 232~348년)과 그의 수제자 석도안(釋道安, 314~385년)은 불경을 번역하고 교단을 중국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불상 역시 인도풍을 탈피하고 점차 황인종 용모로 옮아가게 된다.

제3부 법수는 동쪽으로 흐르고, 한국
법수가 중국 대륙에 충만하였고, 다시 동토(東土)인 우리나라로 흘러넘치게 되었다. 도안에게 깊이 귀의하고 있던 전진(前秦) 황제 부견(符堅, 338~385년)은 소수림왕 2년(372) 고구려에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 및 불경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불교를 전해준다. 그리고 뒤이어 동왕(同王) 4년에는 아도(阿道)가 다시 왔는데 고구려에서는 이들을 위해 동왕 5년에 각각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살게 하니 이것이 우리나라 불교 전파의 시초라 한다.
이들은 모두 도안의 명령을 받고 해동전도(海東傳道)의 큰 책임을 수행하고자 온 전도승이었므로 둘 다 도안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져온 불상은 당시 중국에서 흔히 만들어지고 있던 양식화된 간다라불상 형태의 전통적인 것이거나 중국화된 신형일 수 있겠는데, 아무래도 처음 전해주는 불교 개척지에 신형을 보내는 모험은 하지 않았을 터이니 간다라식의 구형(舊形)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로써 우리나라에 처음 전래된 불상은 중국에서 양식화되었던 간다라식 불상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조본(祖本)으로 하여 이후에 불상을 조성하였을 개연성이 매우 높아진다.
백제에도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짓고 승려 10인을 출가시켰다 하였으니 혹시 불상이 이들과 관련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뒷날 장수왕(413~491년)이 이곳을 점령하여 고구려 판도에 넣었으므로(475년) 이 불상이 고구려에서 흘러들어 왔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떻든 이 불상은 5호16국 시대에 유행하던 사자좌상(獅子座上)의 선정불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일찍이 중국제작설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사자상이 지나치게 양식화되어 본연의 면목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모작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한편 신라사회는 이제까지 어떤 외래 문화의 충격도 받아본 적이 없는 순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불교의 공인이라는 대사건에 이차돈의 순교가 있어야 했으나 그후 오히려 백지에 물감이 스며들듯 급속도로 불교화가 이루어져 나간다. 법흥왕 16년(529)에는 살생을 금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국왕은 스스로 출가하여 법공(法空)이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고 이 절에 주석할 정도로 불교는 신라사회를 이끄는 이념적 근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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