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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자랑스러웠다. 외로움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특권처럼 보였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든 나이를 먹어갈수록 자신의 습관에 길들여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결국 쉽게 깨지지 않는 두꺼운 껍질을 쓰기 마련이다. 그러면 함께하는 삶은 보잘것없어지고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소모적인 참호전이 일어난다. 양보나 타협은 모두 골칫거리가 되고 무엇이든 예민하게 받아들여 이런저런 병이 생기기도 한다. 그렇게 점점 더 서로의 거리는 멀어진다. 퀴리나 부인은 혼자서도 잘 지냈고, 그거면 충분했다. --- p.14
얼마 후 퀴리나 부인이 후작 사위에게 두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사위는 한술 더 떠서 마르크스가 했던 비유까지 들먹였다. 마르크스도 언젠가 자신의 책에서 땅 위로 단번에 올라오는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빈틈없이 굴을 파는 늙은 두더지를 혁명과 비교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정확히 제목이 ‘두더지’라 붙은 별책 부록까지 있었으니 마르크스가 두더지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43 두더지는 꼭 필요한 시간 동안만 어미 노릇을 하고 그만둔다. 가정을 꾸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완벽한 전문가다. 강한 의지를 지닌 이 진정한 프로토 페미니스트는 주인에게 속박되기를 거부하고 사교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마다한다. 이것이 두더지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던 걸까? 물론 고독이 두더지에게 형벌과 같은 것은 아니다. --- p.52 세상일이 그렇다. 끝까지 해결되지 않으면 항상 창조주의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결국 원초적인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전쟁은 퀴리나 부인의 개인적인 불쾌함만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제 부인의 기분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 동물의 삶은 모두 포식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걸까? 왜 동물은 살생을 위한 지능을 발달시켰어야 했을까? 왜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고,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고, 가장 약한 벌레는 땅속에서조차 도망쳐 숨을 곳을 찾을 수 없는 걸까? --- p.72 두더지의 흙무덤들은 이제 밭의 생태에 중요한 부분이 돼 있었다. 결국 제비들까지 둥지 근처 여기저기에 계속 배설물을 뿌리고 다녀도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봄이 됐는데도 농약과 화학물 오염 때문에 개체 수가 격감해서 하늘을 나는 제비들이 너무 조금이라며 걱정했다. 점점 줄어드는 꿀벌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었다. --- p.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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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을 뒤흔드는 존재에 대한 고찰
가벼운 문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동화 ≪퀴리나 부인과 두더지 손님≫은 이탈리아 유명 출판사의 편집장이자 번역자, 토리노 국제도서전 책임자인 에르네스토 페레로가 쓴 어른을 위한 동화다. 짧고 간결한 글이라 쉽게 읽히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다. 여든이 넘은 부인이 자신의 정돈된 세상을 엉클어트린 적을 물리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련의 소동은 지적이면서 재미있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특히 노부인의 심경 변화를 알 수 있도록 풀어가는 글의 흐름이 무척 자연스러워서 읽는 사람도 그 변화에 동참하게 된다. “원래 거리를 두고 있을 때는 미워하기가 쉽지만, 그렇게 증오하던 적도 막상 맞닥뜨리면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도 우리와 똑같이 눈, 코, 입이 달렸고 거의 똑같은 습관을 가졌다. 다만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것이다.” - 본문에서 퀴리나 부인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통마늘과 기발한 덫, 히스테릭한 고양이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지만, 골칫거리였던 적을 알면 알수록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굳게 믿어왔던 무언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남들은 모르는 혼자만의 춤을 즐길 수 있는 리듬 같은 기쁨, 부인은 그 기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새는 하늘에서, 물고기는 물에서 자신이 축복을 받았다는 믿음을 얻는다. 두더지는 흙에서 그와 똑같은 믿음과 자신감을 얻는다.” - 본문에서 퀴리나 부인은 자신을 위협했던 적의 생활방식을 알아가면서 두더지뿐 아니라 닭, 지렁이 등 다른 동물들의 놀라운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퀴리나 부인과 두더지 손님≫은 지금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책이다. 두더지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퀴리나의 태도에서 체념이 아닌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삶을 뒤흔드는 존재를 미워하고 밀어내기보다 조화롭게 공존해야 하는, 우리와 같은 존재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