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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전 4
무너진 왕실의 화려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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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

1장 흩어져버린 폐주의 기록-광해군
태생의 한계를 딛고 지엄한 왕세자로 | 끝내 회복하지 못한 부자관계 | 전쟁의 상흔을 감싸는 개혁 군주의 결단
역모에 이어지는 숙청의 칼날 | 명분이냐, 실리냐 | 폐주가 된 개혁 군주의 말로 | 승자의 입맛에 따라 지우고 고친 역사

2장 스님이 되려 한 왕-전륜성왕의 아들, 창
왕의 귀환 | 왕을 불러낸 29자의 사리함 명문 | 1400년 동안 주목받지 못한 왕 | 씻을 수 없는 상처, 아버지의 죽음
불국토를 세우고자 했던 아버지의 유지 | 아버지를 기리며 백제중흥을 다짐하다

3장 왕의 꿈, 왕의 눈물-위덕명왕, 백제왕 창
1400년 전 비운의 가족사 | 사리함의 비밀: 죽은 왕자는 누구일까 | 신화위삼의 비밀: 사리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일본에 불교 문화를 꽃피우다 | 그리운 아버지의 얼굴이 관음보살로 나타나다 | 왕흥사 사리탑은 불국토 프로젝트의 완성

4장 두 번 고구려의 왕후가 되다-우씨 왕후
한 몸으로 두 번 국모가 되다 | 고국천왕의 개혁과 우씨 집안의 몰락 | 남편이 죽은 그 밤, 시동생과 정혼하다
자유로운 여성이 살던 나라 | 우씨의 새로운 국정 파트너 | 스스로를 지키는 강한 국가를 세우다

5장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김교각
1200년간 썩지 않은 등신불의 비밀 | 아흔아홉 사찰을 품은 신비한 성지 | 본디 나는 신라의 왕자 | 당나라의 신라 스님들
유학생 신분으로 지장보살이 되기까지 | 지옥이 텅 비기까지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 | 아직도 끝나지 않은 스님의 서원

6장 춤을 사랑한 군주-효명세자
춤추는 왕세자 | 효명, 춤을 만들다 | 예악정치의 칼을 빼 든 왕세자 | 대신들은 왕 앞에 엎드리라!
북향 방에서 홀로 앉아 나라를 생각하니 | 3년 3개월의 짧은 대리청정

7장 신화가 된 사랑-공민왕과 노국공주
공주를 밤낮으로 생각하여… | 고려의 왕은 원나라 공주의 아들 | 반원주의자, 원나라 공주와 사랑에 빠지다
숙청의 칼끝은 원나라를 향했다 | 정신병에 걸린 개혁 군주 | 개혁과 사랑을 함께하다

8장 참고 참아 하늘만 부르짖었다-혜경궁 홍씨
궁중 여인의 피눈물을 담은 기록 | 아홉 살 홍씨, 임금님을 뵙다 | 남편에게는 마음의 병이 있었다
하늘을 탓할 따름이었다 | 모년 모일의 일을 내가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랴 | 내 목숨을 보전하여 세손을 보살피리라

9장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다-『한중록』
어미의 마음으로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 | 조금도 내 집이 다시 벼슬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 오늘날에야 임금인 아드님을 둔 보람이 있나 봅니다 |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빌 뿐이다 | 한 자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니

10장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흥선대원군
격랑의 한가운데 선 왕과 왕의 아버지 | 내 처지가 바로 뿌리를 드러낸 난초와 같다 | 아버지는 아들의 스승이었다
실질을 중시한 아들의 개화정책 | 아버지와 아들의 같은 뜻, 다른 길 | 돌이킬 수 없이 치달은 두 사람의 힘겨루기
미치광이가 돼서라도 아들을 만나리라

저자 소개

저자 : KBS 한국사傳 제작팀
책임 프로듀서: 장영주
프로듀서: 성준해, 고정훈, 김종석, 공용철, 손현철,윤한용, 김정균
작가: 정윤미, 정종숙, 고은희, 김윤양, 박민경, 지현주

품목정보

발행일
2008년 12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303쪽 | 584g | 153*224*30mm
ISBN13
9788984312975

책 속으로

광해군은 반정세력의 쿠데타로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불운한 왕이다. 죽은 후에도 ‘폭군’으로 낙인찍힌 채 임금이 받는 칭호조차 받지 못했다. 그런데 광해군이 폐위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러한 평가 뒤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광해군을 폐륜군주로 몰아세울 수밖에 없었던 정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과연 어떤 왕이었을까? --- p.20, 광해군 편

창왕은 사비시대를 이끈 백제 27대 임금이다. 죽어서는 위덕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낯선 이름만큼이나 백제사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7년 10월, 창왕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귀한 유물이 발굴됐다. 부여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1400년 전 사리함이 그것이다. 사리함에는 잃어버린 후기 백제사의 공백을 채워줄 명문(銘文) 기록이 남아 있었다. 창왕의 슬픔과 고뇌를 고스란히 담은 기록이었다. --- p.45, 백제왕 창 편

우씨는 한때 고국천왕의 부인이었다. 고구려 제9대 왕인 고국천왕과 결혼해 17년 동안 왕후로 살았던 그녀는 고국천왕이 사망하자, 차기 왕인 산상왕과 재혼했다. 우씨는 한 몸으로 두 번 왕후가 된 역사상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었다. 왕후가 차기 왕과 재혼을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사건의 배경엔 우리가 잘 몰랐던 초기 고구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 p.107, 우씨 왕후 편

구화산이 등신불의 성지가 된 것은 서기 794년, 한 스님이 열반하면서부터였다. 그의 이름은 김교각, 신라 왕자라고 중국의 역사서는 적고 있다. 열반 후 등신불이 돼서 자신의 서원을 이루고 구화산을 지장보살의 성지로 일군 김교각이 정말 신라 왕자였다면, 그는 왜 신라가 아닌 당나라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았을까? --- p.134, 김교각 편

춤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정치가이자 예술가였던 효명이 살다 간 19세기 초는 전 세계가 산업자본주의의 격랑에 휩쓸리던 시기였다. 이웃 일본은 이런 세계사의 흐름을 발 빠르게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 조선에는 무력해진 왕권과 부패한 관료사회를 바로잡고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왕세자 효명이 있었다. 3년여의 짧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뛰어난 정치력과 예술적 상상력으로 국정을 장악했던 효명세자.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효명이 급서하지 않고 계속 집권했다면 조선의 운명은 사뭇 달라지지 않았을까? --- p.185, 효명세자 편

공민왕은 노국공주의 지지를 힘입어 고려를 자주적인 독립 국가로 세우고, 기울어가던 역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그러나 조선은 아내를 잃은 공민왕의 말년을 강조함으로써, 공민왕을 부패하고 정신을 놓아버린 반쪽짜리 군주로 정의하고 있다. 고려의 왕을 폄훼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했다. 「고려사」 곳곳에는 이 두 사람의 든든한 파트너십과 변치 않는 신뢰에 대해 분명하게 새겨져 있다. 쇄락하고 있던 고려의 마지막 부흥기는 이들의 사랑이 있어 가능했고, 이 사실은 6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 p.213, 공민왕과 노국공주 편

비극의 역사를 견뎌 그것을 기록한 여인, 혜경궁 홍씨. 그녀의 책 「한중록」은, 시대의 약자였지만 역사의 불명예자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던 한 조선 여인의 처절한 삶의 기록이다. 혹자는 혜경궁이 친정 식구들의 정치적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한중만록」을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왕의 며느리이자, 어머니, 할머니로 궁궐에서 70년을 살았지만 아무런 주도권도 가질 수 없었던 조선의 여인이라는 점이다. 환갑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여유롭게 쓰기 시작한 회고록이 피눈물의 기록이 되도록, 혜경궁은 말년까지 평탄한 삶을 살지 못했다. --- p.271, 혜경궁 홍씨 편

흥선대원군과 고종이 살다 간 19세기 조선은 마치 뜨거운 불과 차디찬 물이 만나는 것과 같은 거대한 전환기였다. 두 사람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도 아들 고종도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 위기의 조선을 다시 일으켜세워 부국강병의 꿈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타협할 줄 몰랐던 흥선대원군은 결국 아들과 대립하며 갈등하는 사이, 그토록 이루고자 했던 부국강병의 길을 놓쳐버렸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비국은 아들의 능력을 믿지 못함으로써, 아들이 해야 할 국왕의 정치를 대신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p.303, 흥선대원군 편

출판사 리뷰

역사 다큐멘터리의 지존 KBS 「한국사傳」 왕실편!

화제를 몰고 왔던 역사 다큐멘터리 KBS 「한국사傳」이 61회의 방송을 통해 우리 역사 속 인물 55명을 다루고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중 44명을 선정해 책으로 묶은 「한국사傳」(전5권) 중 제4권은 ‘왕실편’으로서, 우리 왕실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바르게 평가되지 못한 인물들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담았다.

사대주의를 버리고 실리를 추구하다가 신하들에 의해 폐위된 ‘폐주’ 광해군, 14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유물과 일본 고대 기록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는 백제왕 창, 남편이 죽은 날 밤에 시동생과 정혼하여 두 번 왕후가 된 고구려 여인 우씨, 왕실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당나라의 지장보살이 된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 세도정치를 향해 예악정치의 칼을 빼들었던 춤추는 군주 효명세자, 원나라 공주를 사랑한 반원주의자 공민왕의 개혁 정치, 임금의 며느리이자 어머니, 할머니로 궁궐 안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던 혜경궁 홍씨의 기록, 죽음 앞에서도 아들과 화해하지 못한 흥선대원군 등 여덟 명의 인물이 새롭게 등장한다.

붓으로 가리지 못한 진실 속에 역사는 살아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명나라를 어버이처럼 섬긴 인조정권은 결국 삼전도비를 세우며 오랑캐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해군의 개혁적인 정책이 당시 시대에 필요한 행동이었음이 역사를 통해 검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광해군을 광종, 또는 광해왕이라는 임금의 호칭으로 부르지 못하고 있다. 승자의 입맛에 따라 고치고 지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다.

시동생과 재혼하여 정권 승계에 성공한 고구려 여인 우씨에 대한 조선 사대부들의 평가는 잔인하다. “완악하고 음탕하여 부끄러움 없기가 천하고금에 이 사람만한 이가 없다.” -「동사강목」 그러나 수많은 전쟁으로 세워진 국가인 고구려의 사회보장제도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형이 죽으면 형수와 결혼한다.)’를 따른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자신의 부족을 살리고 고구려를 강한 나라로 세우는 결과를 불렀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은 고구려의 여성의 당당한 위용이 두려워, 부끄러운 행실로 간주해버렸다.
고려 말기의 개혁 군주 공민왕에 대한 조선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아내를 잃고 정신병에 걸린 말년의 행적을 강조함으로써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우는 데 급급했고, 조선이 기록한 「고려사」를 여과 없이 받아들인 우리 역시 음란하고 패역한 군주라는 이미지를 먼저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수많은 단서와 역사적 기록들을 증거 삼아 흩어져버린 왕실의 기록을 다시금 불러내는 데 성공했다. 개혁의지를 가졌으나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펼쳐보지도 못하고 의문사한 군주에 대한 기록, 1400년이나 땅 속에 묻혀 있던 사리함에서 부활한 왕의 가족사, 중국 땅에 남아 있는 광대한 고구려의 성과 무덤 등 왕과 왕후, 왕자이기 이전에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는 무궁무진하다.

왜곡된 기록 속에 엄연히 살아 있는
진실의 실마리들!


정권과 함께 역사 교과서가 바뀌는 슬픈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안위와 실리를 추구하던 광해군이 양반 지주들에 의해 폐위된 후, 「광해군일기」는 실록이라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일기로 격하되었다. 그리고 양반들의 힘을 입어 등극한 인조정권은 「광해군일기」를 수정하여 광해군의 치적을 삭제하고 고쳤다. 그로 인해 광해군은 ‘폐주’, ‘혼주’로 낙인찍혀 오늘날까지 ‘임금’의 호칭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인조정권이 수정한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간기록본이 발견되어, 승자가 무엇을 고치고 또 무엇을 감추고 싶어 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명명한 증거에 따라서 광해군은 이제 개혁 군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비극은 조선 왕조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종신 왕권도 아닌 5년짜리 정권을 허락받은 승자의 입맛에 따라 교과서가 난도질당하는 현 세태는 가히 5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전근대적인 행태인 것이다.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광해군을 왕이라 부르지 못하고 군으로 칭하는 지금 우리의 한계가 이런 비극을 부른 것은 아닐까? 과거에 대한 바른 재평가야말로 우리의 현재를 진실한 역사로 쓰기 시작하는 첫걸음이다. 무력과 회유로 역사를 고치고 산 자의 입을 막아도,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
리뷰 총점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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