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청년패스 강력추천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푸른역사 2009.01.19.
베스트
역사 top20 1주
가격
16,000
10 14,400
YES포인트?
80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목차

책을 내면서

산림의 시대를 열다 - 김장생과 김집 부자
백성이 편안하면 국가에 근심이 없다 - 김육
비주류의 꿈을 꾼 주류인 - 장유
이상 실현과 이상의 억압 사이에서 - 송시열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 - 윤휴
조선의 새로운 길 삼대의 이상 - 유형원
유학의 본고장이 가졌던 긍지와 한계 - 이현일
공존의 묘리를 추구한 재상 - 남구만
철학과 시문을 넘나들며 이념의 지표를 새로 세우다 - 김창협, 김창흡 형제

참고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등에 재직하면서 17~19세기의 정치.사상.지식인에 대해 공부하고, 글을 썼다. 2018년 현재 한림대학교 인문한국HK 교수로서, 한림과학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는 『원문역주 각사수교各司受敎』(공역), 『조선후기 안동김문 연구』,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조선 후기 사상사의 미래를 위하여』, 『정조와 18세기』(공저),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공저) 등이 있다.

이경구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09년 01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279쪽 | 478g | 210*297*20mm
ISBN13
9788991510852

출판사 리뷰

위기와 재건, 변화를 고민한 지식인의 삶과 생각
17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사상과 그 영향을 촘촘하게 엮은 지형도!


한국사를 다루는 역사대중서가 넘어야 할 산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인터넷을 통해 웬만한 역사 정보는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에서 백과사전식 역사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역사가는 고급한 정보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제시해, 독자 스스로 역사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의 산은 찬란했던 과거, 흥미로운 인물과사건 소개에 치중하는 경향이다. 그 같은 서술은 민족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계몽 내지각성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자칫 한국사의 특수성에만 치우치거나 과도한 자부에 그칠 수 있다. 따라서 한국사에 대한 해석이 내려지는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역사적 안목과 비판 의식을 높이는 데 힘쓸 필요가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 출간된『17세기 조선 지식인지도』는 역사대중서의 한 방법과 지향점을 제시한다. 17세기 지식인들의 삶과 생각을 조망한 이 책은, 당대 조선 재건에 대한 고민과 타개책을 핍진하게 전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고민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여러 각도로 조명하여 당대 실정과 현재 ‘일정하게 굳어진 결론’의 차이를 살피는데, 이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및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독자들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울러 매 편의 앞뒤에 간략한 연보와 인맥,학맥도를 실어 해당 인물에 대한 주요 정보를 살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편 말미에 ‘조선 지식인의 키워드’를 둔 것도 인물과 관련한 사회적 이슈와 그 시대적 의미를 독자 스스로 음미하게끔 한 것이다.

학문 자체가 실천이었던 시대―왜 17세기 지식인인가
17세기는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과 함께 막이 올랐다. 중국은 명?청의 교체기를 겪고 있었고, 일본은 내전을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수립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 또한 제2의 창업이냐, 내리막길이냐의 기로에 서 있었다. 당시 광해군 정권은 비교적 빠르게 내외적 안정을 이루어 갔으나 무리한 정책 추진 등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반정으로 성립한 인조 정권은 사림(士林)의 정통을 계승했다고 자부한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이래 성장해온 사림의 정치 이상(理想)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 정책들이 미처 착근되기도 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와 사대(事大) 관계를 맺게 되었고, 뒤이어 유교 문화의 정통이라 여겨지던 명나라가 멸망하였다.

이렇듯 구질서가 마감되고 신질서가 성립하는 시기에 살았던 17세기 지식인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열쇠는 ‘절박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사회 질서 재건의 의무감’이다. 유교 문화의 정통이 아닌 청나라를 종주로 삼은 전도(顚倒)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존재 이유를 찾고, 유교 문화의 실현을 재구성하는 작업은 선택이 아닌 당위의 문제였다. 절박함과 의무감 속에서 지식인들은 여유로운 탐구의 길보다는 치열한 논쟁과 검증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국가 존립의 근거, 사회 재건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사대부 개개인의 삶의 의미 등을 ‘학자가 탐구해야 할 문제를 넘어 실천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로 보았다.
이제 학문은 학문을 넘어 사회와 개인을 두루 규정하는 지침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기는 이데올로기의 순·역기능을 잘 보여주는 흔치 않은 시대였던 것이다. 그에 비견되는 시대를 굳이 찾는다면 해방 이후 남·북한이 아닐까. 17세기는 현재의 한국 사회를 반추하는 또 하나의 거울이다.

조선의 재건과 변화를 이끈 논쟁과 새로운 통찰
17세기 지식인들이 선택한 귀결처는 결과적으로 본다면 주희의 사상, 즉 주자학(朱子學)이었다. 그러나 주자학이 국가 재건의 이데올로기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기까지는 수많은 사건과 논쟁을 거쳐야 했다. 그 점에서 17세기의 지성계는 나름의 독특함을 간직하고 있다.
주자의 의리 정신에 입각해 조선의 정체성을 찾는 방도, ‘예(禮)의 올바른 적용을 두고 벌어진 논쟁[禮訟]’ 등이 국시(國是) 설정과 사회 재건이라는 거시 목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동시에 주자 저술의 구체적 해석과 적용을 놓고 미시 이론을 정밀하게 다듬는 논쟁 또한 전개되었다. 조선을 통틀어 논쟁이 없던 시절은 없었지만, 이 시기 학문 논쟁의 정치, 사회적 파장은 어느 때보다 컸다. 예에 관한 해석을 두고 정권의 향배가 결정되거나, 사상 논쟁이 격화되어 이단 시비로 확대되는 과정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장면이다.

한편, 주자의 학문을 폭넓게 해석하거나, 유학의 또 다른 정신을 강조하는 흐름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주자의 정신을 자구(字句) 그대로가 아니라 그 정수(精髓)를 재해석하는 데서 찾았던 이가 있는가 하면, 유학의 근본정신을 의리보다는 안민(安民)의 실현에서 찾는 부류도 있었다. 또 고대 유학의 제도와 사상을 중시하는 고학파(古學派)가 있는가 하면, 이단시되던 양명학이나 도교, 불교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사 또한 없지 않았다. 그 영역에 있었던 지식인들은 주자 해석의 또 다른 가능성을 개척하거나 대안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주류의 위치에는 서지 못했기에 자칫 빈약해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는 당시 지식인의 고민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

17세기가 후반으로 접어들수록 지식인들은 미묘한 변화의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심의 국제 질서가 공고해진 가운데, 양난(兩亂)의 피해를 극복한 조선에서는 ‘사회 활력’과 ‘문물 흥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기운은 유교 문화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완화시켰다. 변화에는 물론 부정적 경향도 따르기 마련이어서, 활력 뒤란에서 자라난 서울 중심화라는 흐름은 지방 지식인의 소외를 불러왔다. 17세기 후반부터 감지되었던 이러한 현상이 뚜렷해진 시기는 18세기 이후였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대표하는 지식인들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학파를 이끌었던 산림(山林)(김장생·김집 부자), 안민을 중시한 관료(김육), 유ㆍ불ㆍ선의 통합을 꿈꾼 문학가(장유), 주자의 의리관에 투철하였거나 다른 입장에서 수정 가능성을 비친 사상가(송시열, 윤휴), 고대의 이상 사회를 염원한 처사(유형원),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보여주는 지방 학자(이현일), 긴장의 이완기를 고민하여 새로운 정치, 사회 질서를 모색한 인물(남구만, 김창협·김창흡 형제) 등이 그들이다.

대상이 된 인물들의 삶의 궤적은 제각기 달랐지만 모두가 학자이자 문학가, 정치가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 권의 책에 그들이 남긴 방대한 저서와 사고의 정수를 담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다만 그들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과 변화의 고민 한가운데서 유의미한 편린을 찾는다면, 2~3세기를 떨어져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경제 질서,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현재, 분열된 논쟁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이끌고, 각 사회적 기능을 변화의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을지 성찰해 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이 책의 구성과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림의 시대를 열다, 김장생과 김집 부자

김장생과 김집 부자는 서인 최초의 산림으로 율곡학파를 형성하여 17세기 최대 정파였던 서인의 이념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모태 역할을 했다. 그들이 학파를 형성하는 과정, 학파의 정치적 의미, 그리고 그들 학문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예학의 성과와 그 사회적 의미를 서술했다.

백성이 편안하면 국가에 근심이 없다, 김육
김육은 안민을 강조한 관료로 서인의 이념 그룹인 산당과 대립하며 대동법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또 보건·의학서 간행, 활자 주조, 새 달력 도입 등 각종 개혁책을 제시하고 일부 관철했다. 그의 사상은 경세를 중시하는 실용 사상과 가평에서의 농사 체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안민을 중시한 조선 지식인의 또 다른 흐름을 보여준다.

비주류의 꿈을 꾼 주류인, 장유
장유는 유불선 삼교 및 주자학과 양명학을 넘나들며 주자학을 비판하는 한편 주자학의 내용을 보완하려 했다. 그의 사유는 주자학이 여러 학문을 섭렵하고 자유스러운 토론 속에서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학에서 그가 제창한 천기의 강조와 고문 부흥 또한 그 사유에 바탕을 두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주자학의 틀 내에 있었으면서도 개인의 주체성에 기반해 자유스러운 사고를 전개했다.

이상 실현과 이상의 억압 사이에서, 송시열
송시열을 둘러싼 논쟁은 언제나 진행형이었다. 그는 수많은 논쟁의 중심에 있었고 지금도 상반된 평가가 내려진다. 본서는 그를 긍정, 부정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그가 어떤 자세로 논쟁에 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먼저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조선을 주자의 방식대로’ 건설하려는 소명 의식의 소유자였기에 타협하기 힘든 이데올로그가 될 수밖에 없었고 바로 그 점 때문에 18, 19세기에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다원화와 공존을 요구하는 지금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근본주의자를 위한 변명, 윤휴
윤휴는 주자의 경전 주석을 달리 해석하여 사문시비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인식된다. 그러나 이는 한 면만 본 것이다. 실제 그는 유교 고학정신의 주창자로서 근본주의자의 면모가 강했으며, 그가 주자학을 대하는 정신은 주자의 핵심을 계승하자는 것이었다. 이상질서를 향한 열망을 누구보다 강하게 지녔던 그는 현실에 맞지 않는 개혁과 강경한 북벌론을 구상했고 그것이 그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의 새로운 길 삼대의 이상, 유형원
‘실학자 유형원’이란 평가보다는 대명의리에 투철했던 유학자 유형원의 또 다른 면모를 서술했?. 유형원은 고대 유학의 이상 사회를 조선 재건의 새 기준으로 제시했다. 그것은 토지 공유에 기반한 국가 중심의 공공성 강화였다. 하지만 이 기준은 사대부 중심 사회로 진행하고 있던 당대 조선에서는 항상 책상에서만 논의될 수 있는 개혁이었다. 그러나 18세기 국왕이 개혁의 전면에 나섰을 때 그의 논의는 재조명되고 있다.

유학의 본고장이 가졌던 긍지와 한계, 이현일
이현일은 퇴계 학맥의 적자로 영남권 학술의 통합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가 서울 남인의 추대로 산림이 되었을 때 그의 정치적 처신은 신고를 거듭했다. 국왕과 관료들은 그의 진언을 외면했고 그는 끝내 명의 죄인이란 죄명을 쓰고 낙향했다. 그의 일생은 17세기 후반부터 심화되기 시작한 서울과 지방 학계의 격차와 분화 양상을 잘 보여준다.

공존의 묘리를 추구한 재상, 남구만
남구만은 붕당 정치가 극에 달하여 환국이란 경색된 정국이 펼쳐졌을 때 그 폐해를 지적하며 조정론과 은전론을 강조한 정치인이었다. 붕당 사이의 공존을 강조한 그의 논리는 이후 영조에게 영향을 미쳐 탕평 정국의 조성에 기여했다. 한편 그는 역사지리학에도 해박한 학자로서 당시 국경선 획정에도 기여했다.

철학과 시문을 넘나들며 이념의 지표를 새로 세우다, 김창협·김창흡 형제
김창협, 김창흡 형제는 서인-노론으로 이어지는 정파·학파의 서울 지역 적자이다. 그들은 정치 영역에서는 강경론을 고수했지만, 철학과 문학, 예술 방면에서는 유연하고 풍부한 해석 그리고 ‘조선적인 것’에 대한 긍정을 통해 변화된 현실에 걸맞은 새 기준을 세우려 했다. 그들의 다방면에 걸친 노력 속에서 18세기 진경문화의 풍미와 북학적 사유가 나오게 되었다.

리뷰/한줄평5

리뷰

9.2 리뷰 총점

한줄평

10.0 한줄평 총점

클린봇이 부적절한 글을 감지 중입니다.

설정

채널예스 기사1

  • 푸른역사,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성찰해야
    푸른역사, 그때 거기와 지금 여기를 성찰해야
    2014.08.27.
    기사 이동
14,400
1 14,4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