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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일러두기 서언 ?言 성공과 실패 成敗 [1] 비스마르크와 글래드스턴 ?士麥與格蘭斯頓 자유 조국의 선조 自由祖國之祖 세계 제일의 보수주의자 地球第一守舊黨 문명과 야만의 세 등급 文野三界之別 영웅과 시세 英雄與時勢 근인과 원인에 관하여 近因遠因之說 초야에서 올린 직언 草茅危言 양심 어록 養心語錄 이상과 기력 理想與氣力 자조론 自助論 위인 넬슨의 일화 偉人訥耳遜?事 자유를 방기하는 죄 放棄自由之罪 국권과 민권 國權與民權 파괴주의 破壞主義 자신력 自信力 잘 변신한 호걸 善變之豪傑 카부르와 제갈공명 加布兒與諸葛孔明 강권을 논함 論强權 호걸의 공공정신 豪傑之公腦 탄쓰퉁이 남긴 글 譚瀏陽遺墨 정신교육은 자유교육이다 精神敎育者自由敎育也 전사를 기원함 祈戰死 중국혼은 어디에 있는가 中國魂安在乎 비난에 답함 答客難 우국과 애국 憂國與愛國 중국을 보전함 保全支那 문명을 전파하는 세 가지 이기 傳播文明三利器 꼭두각시를 말함 傀儡說 동물 이야기 動物談 유심 惟心 혜관 慧觀 이름 없는 영웅 無名之英雄 지사 잠언 志士箴言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天下無無價之物 혀 아래 영웅 없고 붓 끝에 기사 없다 舌下無英雄筆底無奇士 세계에서 가장 작은 민주국가 世界最小之民主國 유신 도설 維新圖說 러시아인의 자유사상 俄人之自由思想 20세기의 새로운 귀신 二十世紀之新鬼 백성의 윗사람 되기 어려움 難乎爲民上者 영감 煙士披里純(INSPIRATION) 무욕과 다욕 無欲與多欲 후회에 관하여 說悔 괴테의 격언 機埃的格言 부국강병 富國强兵 세계 밖의 세계 世界外之世界 여론의 어머니와 여론의 노예 輿論之母與輿論之僕 문명과 영웅의 비례 文明與英雄之比例 간섭과 방임 干涉與放任 결혼하지 않은 위인 不婚之偉人 신문을 좋아하는 국민 嗜報之國民 노예학 奴?學 희망과 실망 希望與失望 국민의 자살 國民之自殺 성공과 실패 成敗 [2] 가토 박사의 『천칙 백화』 加藤博士天則百話 일본 헌법에 대한 스펜서의 비평 記斯賓塞論日本憲法語 중국의 사회주의 中國之社會主義 일본의 한 정당 영수의 말을 기록함 記日本一政黨領袖之言 월남 망명가의 말을 기록함 記越南亡人之言 장근과공 일화 張勤果公佚事 손문정공 식종지전 孫文正公飾終之典 수에즈 운하의 옛길 蘇?士運河故道 민병과 용병의 득실 民兵與傭兵之得失 다스림의 도구와 다스림의 도리 治具與治道 학문과 관료의 길 學問與祿利之路 학문을 좋아하지 않음의 폐해 不悅學之弊 구차함을 경계함 警偸 설랑 스님의 어록 두 단락 雪浪和尙語錄二則 법은 반드시 행해지는 법이 되어야 한다 使法必行之法 다스림을 다스리지, 어지러움을 다스리지 않는다 治治非治亂 군주는 책임이 없다는 학설 君主無責任之學說 명령과 바람 所令與所好 수양을 좋아함 好修 하늘을 원망하는 자는 뜻이 없는 것이다 怨天者無志 좋아하고 싫어함과 버리고 취함 欲惡取舍 원문 량치차오 연보 해제 근대 동서사상의 가교, 『음빙실자유서』_강중기 『음빙실자유서』의 일독법―한국사상사에서 보는 량치차오_노관범 찾아보기 |
梁啓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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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시대’
량치차오는 여섯 살에 오경五經을 완독하고, 열두 살에 수재가 되고, 열일곱에 거인擧人이 된 천재였다. 구학문의 천재였던 량치차오는 1890년 회시會試에 낙방했다. 낙담한 그가 새롭게 성장한 계기는 스승 캉유웨이와의 만남이었다. 신학문에 눈을 뜬 그는 1895년에 캉유웨이를 도와 『만국공보萬國公報』를 창간하고 본격적인 변법운동에 들어선다. 1898년에는 캉유웨이와 함께 이른바 ‘백일유신’을 시작했다. 그러나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에서 서양 사상을 직접 접하며 쓴 글들은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날로 명망이 커졌다.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량치차오는 1912년에 귀국했다.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치일선에서 활동하면서, 위안스카이 등이 주도한 복벽주의에 반대했다. 1919년부터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강연과 저술에 몰두하다 사망했다. 량치차오가 1895년 『만국공보』를 창간한 뒤 1929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35년 동안을 중국 100년 언론사에서는 ‘량치차오 시대’라고 부른다. 그의 막대한 영향력을 잘 보여주는 영예로운 호칭이다. 중국 언론계의 총아가 구상한 근대 문명과 동학東學 『자유서』는 구학문에 대한 탄탄한 기반을 지닌 량치차오가 망명지 일본에서 신학문을 왕성하게 섭취하며 동서 사상의 가교를 구상한 책이다. 중국 내외에서 ‘언론계의 총아’로 불렸던 그의 명성에 걸맞게, 문명 구상에서 일상의 단상까지, 중국의 고전과 불경에서 몽테스키외·홉스·스피노자·루소·다윈·스펜서 등 서양 사상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빠른 행마로 종횡했다. 제목처럼 ‘자유’롭고 분방하다. 『자유서』란 이름이 그 때문에 붙은 것은 아니다. 제목은 존 스튜어트 밀의 저술에서 따왔다. 량치차오는 「서언」 말미에서 존 스튜어트 밀의 “인간사회의 진화에서는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이 3대 자유는 모두 나에게 갖춰져 있다”라는 말을 인용하고, ‘자유서’라는 책 제목을 거기서 따왔음을 밝히고 있다. 『자유서』 중에 가장 많은 부분은 근대 문명과 국가 개혁에 관한 것이다. 문명,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민, 법과 법제, 여론과 신문, 개혁을 향한 의지, 개혁에 필요한 자세, 개혁의 방법과 이론 등이 그것이다. 또 영웅호걸과 위인, 부국강병, 군대, 무사도와 상무정신 등도 그 범주에 속한다. 이 글들을 통해 서양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의 장점을 직접 접하고 중국 또한 근대 국민국가로 발돋움하기를 바라는 량치차오의 기대를 읽을 수 있다. 한편 량치차오는, 일반적으로 근대 중국 지식체계의 전환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자유서』는 그렇다면 지식체계의 전환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 두 가지로 평가할 수 있다. 하나는 서양 개념의 소개다. 문명과 야만, 자유와 민주, 국권과 민권, 국가와 국민, 군대, 법, 신문, 여론 등 근대 문명에 관한 기본 개념들이 소개되고 있다. 서양 서적의 번역과 개념의 수입에는 당시 다른 학자들도 물론 기여했지만, 량치차오만큼 모든 영역에서 새로운 풍조를 연 인물은 드물었다. 둘째, 개념과 사상의 수입이 량치차오의 선택과 해석을 거쳤다는 점이다. 량치차오의 망명지에서의 단상을 통해 우리는, 무술정변 이후 새 학문에 대한 중국 지식인의 갈망과 서학을 소화시켜 중국인의 ‘동학東學’으로 만들려는 고민과 흔적을 풍부히 살필 수 있다. 한국에서 『자유서』의 소개 량치차오의 저술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다. 소개된 저술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었다. 하나는 량치차오의 역사 단행본 작품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현채 역, 1906),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신채호 역, 1907)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는 문집과 소품류다. 『황성신문』 1906년 11월에 『음빙실문집』과 『자유서』가 나란히 소개되었고, 이어 『중국혼中國魂』(장지연 역, 1908) 등이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자유서』는 1906년 말에 문집과 함께, 상당히 높은 지명도를 가지며 소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뒤에는 1907년까지 『자유서』에 속한 소품들이 『대한자강회월보』, 『태극학보』, 『서우』 등의 학회지에 여러 차례 소개되었다. 『자유서』에 대한 사회적인 수요가 어느 정도 충족되자 1908년 두 권의 책이 본격적으로 출판되었다. 하나는 ‘탑인사본 『자유서』’(현공렴 발간, 1908)이고 다른 하나는 ‘언해본 『자유서』’(전항기 역, 1908)다. 전자는 중국본을 영인한 것으로 총 66편이 수록되었고, 후자는 65편을 언해하여 수록했다. 언해본의 등장은 량치차오가 가졌던 대중적인 인기를 잘 보여준다. 신지식인의 환영과 구학문의 반발 한국의 근대 지식인 사이에서도 량치차오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먼저 소개된 역사·전기류는 변법과 애국, 자강을 지향하는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소개된 량치차오의 문집과 『자유서』 등의 소품은 서양 사상의 핵심 개념의 이해와 국가 개혁의 방향과 관련해서 많이 읽혔다. 그리고 대중화될수록 찬반양론이 있었다.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에서 『음빙실문집』을 한문 교과서로 사용한 일은 유명하다. 안창호와 같은 계열에 있던 신지식인들은 ‘(상류 사람들의) 심성 개량의 속성과速成科’로 소개하고 있다. 『자유서』에 실린 글들을 적극적으로 소개한 지식인은 박은식과 장지연이었다. 박은식은 자신이 주필로 있던 학회지 『서우』(1906.12.~1907.12.)에 연달아 소개했다. 장지연 또한 『대한자강회월보』와 『조양보』에 소개했다. 구학을 지지하는 유학자들의 반대는 격심했다. 대한제국기의 큰 유학자였던 전우, 곽종석, 유인석 등이 모두 량치차오를 비판했다. 그들은 량치차오를 불교와 기독교를 섞어 쓴 이단이고, 왕도와 패도를 혼용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유인석은 『자유서』에 대해 “한 고조, 명 태조를 큰 도적이라 비난하고, 예악을 강압적인 제도라고 비판하는 등 고금에 들어보지 못한 괴이하고 패륜한 책자이므로 다시는 읽지 않았다”고 혹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