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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례 / 9
명유학안 권13, 절중왕문학안 3 明儒學案 卷十三, 浙中王門學案三 · 강중기 지부 팽산 계본 선생知府季彭山先生本 13 상서 구암 황관 선생尙書黃久菴先生? 42 명유학안 권14, 절중왕문학안 4 明儒學案 卷十四, 浙中王門學案四 · 강중기 포의 나석 동운 선생布衣董蘿石先生澐 75 주사 원정 육징 선생主事陸原靜先生澄 92 상서 약계 고응상 선생尙書顧?溪先生應祥 96 시랑 치재 황종명 선생侍?黃致齋先生宗明 100 중승 부봉 장원충 선생中丞張浮峰先生元? 110 시랑 송계 정문덕 선생侍?程松溪先生文德 113 태상 노원 서용검 선생太常徐魯源先生用檢 118 명유학안 권15, 절중왕문학안 5 明儒學案 卷十五, 浙中王門學案五 · 강중기 도독 녹원 만표 선생都督萬鹿園先生表 143 시랑 경소 왕종목 선생侍郞王敬所先生宗沐 155 시독 양화 장원변 선생侍讀張陽和先生元? 183 교유 금산 호한 선생?諭胡今山先生瀚 203 · 인명 · 개념어 · 서명/편명 색인_ 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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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본의 자字는 명덕明德이고, 호號는 팽산彭山으로, 월越 지역 회계會稽 사람이다. 정덕正德 12년(1517) 진사가 되어 건녕부建寧府 추관推官을 제수받았다. 주신호(朱宸濠, 1479- 1521)가 반란을 일으키자, 선생은 분수관分水關을 지켜 반군이 복건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았다.
--- p.13 황관은 자字가 숙현叔賢이고, 호號는 구암久菴이며, 절강성 태주台州의 황암현黃岩縣 사람이다. 조부의 음덕으로 관직에 올라 후군도사를 제수받았다. 질병이라 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집에서 10년을 머물렀다. 천거를 통해 남경도찰원 경력에 올랐다. 장총(張?, 1475- 1539)·계악(桂?, ?-1531)과 함께 소를 올려 대례를 행하자고 주장하여 남경공부원외랑으로 승진하였으나, 누차 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상서 석서(席書, 1461-1527)가 『명륜대전明倫大典』을 편찬할 때 선생을 천거하여 함께 작업하였다. 광록시 소경에 임명되었다가 대리시로 전임되었으며, 소첨사 겸 시강학사로 바뀌었다가 강관으로 임명되었다. 『명륜대전明倫大典』이 완성되자 첨사로 승진하고 시독학사를 겸임했다. 남경예부우시랑으로 나갔다가 예부좌시랑으로 전임되었다. 운중의 난이 일어나자 가서 평정하였다. 을미년 공거시를 주관하고,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상을 마친 후 예부상서에 기용되고 한림원 학사를 겸하였고, 안남정사로 임명되었으나 지연하면서 가지 않았다. 한가하게 머물면서 취병산으로 이사하였다. 추우나 더우나 책을 놓지 않았다. 향년 75세였다. --- p.42 이것이 시와 음악이 가르침이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인사가 아래에서 두루 미치면 천도가 위에서 갖추어져 모든 이치가 구비된다.”는 것이니, 옛 성왕들이 태자를 가르칠 때 필히 앞세우고 풍속을 변화시킬 때 반드시 일삼는 바이다. --- p.58 “나는 세속의 유자들이 지리하고 자질구레하며 겉모양이나 꾸며서 인형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 아래로는 부귀와 이욕의 마당에서 탐욕을 부리고 다투니, 이것이 어찌 진정한 성현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선생님의 양지설을 들으니 마치 큰 꿈에서 깨어난 듯하다. 내가 선생님의 문하에 들지 않는다면, 이 세상을 헛사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진을 통해 신하로서 섬기기를 구하자, 양명이 불가하다며 “어찌 선생보다 나이가 많은 제자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선생이 재삼 예물을 바치며 부탁했다. 평일에 시를 짓는 모임의 벗들을 초대하자 “그대는 늙었는데, 어찌 스스로 고난을 택하는가?”라고 했다. 선생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지금 이후로 비로소 고난의 바다에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를 것이다.”라고 하였다. --- p.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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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희는 명말청초의 혼란한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았던 실천적 사상가이자 사상사가思想史家이다. ‘경세를 위한 경사지학經史之學’을 지향했던 그는 망국의 한을 학문 탐구로 승화시켰다. 미래의 정치사상을 담은 『명이대방록』을 저술함과 아울러 과거 명대의 학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작업을 했다. 그 작업의 성과물이 바로 『명유학안』이다. 그것은 중국 최초의 학술사이자, 명대 유학 연구의 필독서로 평가받고 있다.
명대 유학의 주요 특징은 ‘내 마음[吾心]’에서의 ‘자득自得’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내 마음’의 공부이기 때문에 문호에 기대거나 남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의 고유한 형체와 정신을 발휘한다. 학문을 통해 일가一家를 이룬 이들이 자신이 터득한 공부법을 간명하게 요약한 것이 ‘종지宗旨’이다. 종지는 그의 공부가 힘을 얻은 득력처得力處이자, 후학을 학문의 세계로 이끄는 입문처入門處이기도 하다. 유학자들은 공자와 같은 성인이 되고자 한다. 명대 유학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인의 마음을 본래 지니고 있다고 여긴다. 그것이 바로 ‘본심本心’이다. 본심대로 살려고 몸과 마음을 다해 애쓰는 것이 ‘공부’이고, 공부를 통해 도달한 지평이 바로 ‘경지’이다. 그런데 공부를 통해 도달한 경지는 다름 아니라 본심이 실현된 것이다. 황종희는 이것을 가리켜 “마음에 본체가 없고, 공부가 도달한 곳이 바로 그 본체이다[心無本體, 功夫所至, 卽其本體.(明儒學案原序)]”라고 말한다. 공부법과 그 경로는 달라도 도달한 궁극적 지평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명대 유학을 바라보는 황종희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명대 유자들마다 그 학문 ‘종지’는 다르지만, 그들이 도달한 지평은 동일하다. 이런 시각에서 황종희는 명유들이 각자 힘을 써서 터득한 학문 종지를 밝히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종지’를 기준으로 문파를 구분하고, 동일 문파에서 그 근원과 지류를 구별하여 동일한 ‘종지’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드러낸다. 또 각 학자들의 사상이 담긴 주요 자료들을 뽑아 수록함으로써 독자들이 그 사상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황종희가 한 것은 여기까지다. 황종희는 『명유학안』을 사통팔달의 대로에 놓인 술동이에 비유한다. 그 안에 담긴 술을 맛보고 음미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명유들이 제시한 가르침을 음미하고 참조하여 자신에게 적절한 공부법을 찾아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할 일이다. 착실하게 자기를 가꾸는 공부를 하다 보면 자사自私와 물욕物欲이 탈각된 지점에서 자기 마음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_간행사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