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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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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이 살펴보건대, 한나라·진나라 이래로 모두 지중해를 대서양으로 잘못 여겼기 때문에 몇 년 치 식량을 가지고 가야 대진에 도착할 수 있다는 황당한 말이 생겨났다. 다만 『위서』에서는 그 바다가 옆으로 나온 것이 발해와 같아 중국 발해처럼 동쪽과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고로 지중해에 대한 언급은 이 책보다 앞선 것이 없다. 해곡 1만 리를 건넜다는 말은 가로의 길이를 말한 것으로 남북의 세로로 건넌다면 사실 단지 3천여 리에 불과하다. 땅이 두 바다 사이에 위치한다는 말은 대진국의 북쪽에 또한 발트해가 있는데, 지중해 길이와 폭의 대략 반쯤 된다. 두 바다는 모두 발해와 비슷한 해역이지 대서양은 아니다. 그러므로 서역을 말할 때 『위서』만큼 정확한 것이 없다.
--- 「《해국도지》 권37, 〈대서양 각 나라 연혁〉」 중에서 포르투갈(Portugal)의 예전 국명은 루시타니아(Lusitania)로 스페인(Spain)과 인접한 지역이다. 서쪽과 남쪽은 모두 대서양을 경계로 하고 동쪽과 북쪽은 모두 스페인을 경계로 한다. 기원전 카르타고(Carthago)가 스페인을 침략했을 때는 아직 포르투갈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스페인이 아덴(Aden)의 공격을 받았을 때 포르투갈 땅을 분할해서 화의를 요청했으나, 얼마 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아덴을 몰아내고 포르투갈을 탈환했다. 1200년, 스페인의 카스티야(Castilla) 왕국에서 프랑스의 공작 앙리(Henri)에게 딸을 출가시키면서 포르투갈 땅 북쪽 변경의 몇몇 지역을 분할해서 혼수로 주었다. 이에 앙리는 북쪽 변경으로 이주해 나날이 강성해졌으며, 또한 군대를 일으켜 남쪽 변경인 리스보아(Lisboa)·세비야(Sevilla) 등지를 공격해서 취하고 마침내 리스보아에 수도를 건설해 나라를 세우고 왕을 칭했다. --- 「《해국도지》 권38, 〈포르투갈 총설〉」 중에서 스페인은 포르투갈(Portugal)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명대 이래로 마카오에 거주하던 대서양 국가 중 하나이다. 사방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은 넓고 평평하다. 기원전에 카르타고(Carthago)에 점령당했는데, 카르타고가 은광을 채굴하고 폭정을 일삼자 백성들은 이를 고달파했다. 당시 국력이 강성했던 로마(Roma)에 군사를 청해 이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로마에 귀속되면서 진심으로 기뻐하며 따랐다. 그래서 후에 로마의 국력이 기울어졌을 때도 여전히 차마 배신하지 못했다. 418년에 반달족(Vandal)과 고트족(Goth)이 무리를 이끌고 패권을 장악하며 막상막하로 여러 해 동안 혈전을 치렀다. 결국 고트족이 승리하면서 스페인을 차지한 뒤 수도를 마드리드(Madrid)에 세우고 관직을 두어 나누어 다스렸다. --- 「《해국도지》 권39, 〈스페인〉」 중에서 네덜란드·벨기에는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가문에 따로 예속되어 통치를 받았다. 부르고뉴 가문에서는 딸을 오스트리아 국왕에게 시집보내며 17개 지역을 떼어 혼수품으로 주었는데, 네덜란드·벨기에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이어 다시 스페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Felipe II)가 잔인무도해지자 네덜란드·벨기에는 통치에 불복하여 군대를 일으켜 50년 동안 혈전을 벌였다. 벨기에는 변방에 요해처가 없어 버틸 수 없었지만, 네덜란드는 여전히 항거했다. 스페인이 제방을 무너뜨려 침수되자 성에서 가라앉지 않은 것은 삼판선뿐으로, 성을 굳게 지켜 낼 수 없었다. 때마침 오스트리아 군대가 지원을 와서 스페인은 퇴각했고, 네덜란드는 마침내 비옥한 7개 지역을 차지하여 스스로 일국을 이루어 암스테르담(Amsterdam)에 도읍해서 성을 쌓고 군사훈련을 했다. --- 「《해국도지》 권40, 〈네덜란드·벨기에 양국 총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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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해양으로, 중심에서 여럿 중 하나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저술하던 시기, 중국 아니 아시아와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질서로 요동치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의 진출로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변화하면서 세계의 판도가 바뀐 결과였다. 대항해 시대의 막대한 부와 산업혁명은 서방 국가에 강력한 힘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그 부와 힘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였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어 오던 중국과, 중국이 세계의 질서라고 믿어 오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세계는 그렇게 몰락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서방 제국주의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동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서의 변화에 지식계는 혼란에 빠졌다. “과연 갑자기 다가온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당대 지식인이라면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질문이었다. 위원 역시 지식인으로서 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해국도지』였던 셈이다. 위원은 임칙서로부터 『사주지』와 서양 관련 자료들을 전해 받고 『해국도지』를 편찬하였다. 『해국도지』는 당대 지식인들을 그때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위원은 『해국도지』를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을 공격하고(以夷攻夷),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과 화친하며(以夷款夷),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爲師夷長技) 서양을 제압하기 위해서 저술한 것이다(以制夷而作).” 답은 언제나 이미 준비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者, 百戰不殆). 상대는 알지 못하고 자신은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이는 동양 사회에서는 아주 익숙한 말이다. 『순자』는 동양에서 전법의 경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상대를 알” 수 없었다. 중화사상에 갇혀 자신의 병폐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자신을 알” 수조차 없었다. 반면 서양은 선교사와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위원의 답은 어떻게 보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양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서양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서양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중국은 결국 서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처법을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더 답해야 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왜 “필리핀과 자와는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지만, 한쪽(필리핀과 자와)은 병합되고 한쪽(일본)은 강성함을 자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위원은 단순 서양에 관해서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에 관해서도 서술하였다. 결국, 답은 언제나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자취를 살펴야 한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樂彼之園) 박달나무 심어져 있고(爰有樹檀)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其下維穀). 다른 산의 돌이라도(他山之石)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可以攻玉).” 이 시는 『시경』 「소아·학명」의 부분이다. 이 시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겠지만, 이 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성어를 남겼다.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이는 남의 하찮은 행동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또는 군자도 소인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구절이 도대체 『해국도지』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 타산지석이야말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집필한 정신 중 하나였다.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중국에게, 중국은 군자요, 주변국은 소인과도 같았다. 그런데, 위원은 (물론 중국이 볼 때) 그 ‘소인에 불과한’ 주변국으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위원은 먼저 동남양의 국가들, 대체적으로 현재 동남아시아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관해서 논하기 시작한다. 왜 위원은 하필 동남양의 국가들에 대해서 먼저 논하기 시작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서양을 알고 나를 알아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서양의 국가들이 아닌가? 해국도지 4권의 「동남양서설」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이 동쪽으로 상선을 몰고 온 것은 왜인가? 연안에 이르면 연안을 빼앗고, 섬을 만나면 그 섬을 점령하여 도시와 항구를 만들고 군대를 배치하여 방비하니, 무릇 동남아시아의 중요 항구가 모두 유럽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 베트남, 태국, 미얀마, 일본은 서양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은, 즉 해방 사실이 있어 이 편에 기록한다. 반면 조선과 류큐는 해방 사실과 무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즉, 위원은 중국에도 서양 제국주의의 마수가 손길을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서양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였으며,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동남양의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통해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이 있지만, 위원이 볼 때 당시 중국의 상황에는 그보다 더 가까운 거울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해국도지』 6권에서는 일본과 남태평양에 대해서 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오류도 적지 않으나, 가까운 바다의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대양해군의 필요성을 점점 자각하고 있다. 해상무역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서 바다의 정보는 곧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위원의 이러한 탐구 자세는 앞으로의 우리에게도 본받을 만한 자세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