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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일러두기 해국도지 원서 해국도지 후서 해국도지 권29 서남양 오인도 연혁 총설 북위 승려 혜생 『사서역기』 외 원나라 유욱 『서사기』 외 갠지스강 고찰 상 갠지스강 고찰 하 해국도지 권30 서남양 중인도 연혁 동인도 연혁 남인도 연혁 남인도양 스리랑카 연혁 부록 포탈라카산·몰디브제도 서인도 연혁 북인도 연혁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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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이 살펴보건대, 법현과 혜왕(惠王)은 서쪽으로 갈 때 모두 우전국에서 출발했는데, 유독 현장의 기행만은 진실로 의심되는 바가 있다. 현장이 쿠차국에 도착해서 만약 천산을 돌아 서쪽으로 갔다면, 곧 슐러국을 거쳐 파미르고원에 오를 수 있었을 텐데, 바로 또 무자트를 돌아 북쪽으로 오손국으로 나와서 소무구성(昭武九姓)의 여러 나라를 두루 유람한 후, 남쪽으로 계빈국에 도착한 것은 왜인가? 대저 무자트는 얼음 산이고 대청지(大淸地)는 지금 이리 서남쪽의 이식쿨호이다. 강국(康國)·조국(曹國)·하국(何國)·석국(石國)·사국(史國)·안국(安國)·미국(米國) 등의 9성은 고대의 강거(康居)·대완(大宛)·월지이며, 지금의 카자흐(Kazakh)·코칸트(Kokand)·부하라로, 모두 인도를 경유하는 길이 아닌데도 어찌 수천 리의 여정을 돌아갔단 말인가?
--- 「권29, 북위 승려 혜생 『사서역기』 외」 중에서 살펴보건대, 액눌특극국은 바로 중인도이다. 그 하류는 동인도에 이르러 또 대금사강과 합쳐지는데, 영국 지도에 그렇게 그려져 있다. 강가강과 대금사강이 합류하면 비로소 안일하(安日河), 또는 안시하(安市河)로 불리고, 이 강은 남해로 들어간다. 이에 『곤여도설』·『직방외기』의 여러 지도에는 모두 대금사강이 없는데, 아마도 안일하의 해구로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동인도는 마땅히 갠지스강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가? 아니면 갠지스강의 동쪽에 있어야 하는가? 대답하자면, 갠지스강 양안에 모두 걸쳐 있다. --- 「권29, 갠지스강 고찰 상」 중에서 위원이 살펴보건대,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촐라는 본래 소국 중 하나이고, 참파·태국·스리랑카·코친 등 대국의 왕은 옛날 기록에서 모두 촐라 출신이라 했기 때문에 특별히 기록해 둔다”라고 되어 있다. 이곳 촐라와 캘리컷은 모두 동인도 지역으로, 방위로 볼 때 남양에 해당하지 서양이 아니다. 『명사』에서 대개 서양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 위원이 살펴보건대, 『명사』에 따르면 또한 카일·코임바토르·클란탄(Kelantan)은 모두 영락·선덕 연간에 정화 가 사신으로 가서 그들을 초무하여, 캘리컷·코친·라무리 등의 국가와 함께 들어와 조공했다. 또한 그 접경지대에 위치한 소아란(小阿蘭)·발단(撥丹) 두 나라는 모두 동인도의 부락이다. --- 「권30, 동인도 연혁」 중에서 살펴보건대, 『양서』에서는 랑카수카 왕국과 싱할라를 두 나라로 분리해 서술하고 있다. 랑카수카 왕국은 간타리국(干?利國) 뒤에, 파리국(婆利國) 앞에 서술되어 있고, 싱할라는 파리국과 천축국 뒤에 서술되어 있어, 동서의 구분이 확실하고 서로가 확연하게 다르다. 그러니 어찌 랑카수카 왕국을 스리랑카로 생각하고, 용과 귀신이 함께 거주하는 싱할라로 둔 채 따져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우와 같이 『명사』의 외국 연혁 부분은 오류투성이이다. --- 「권30, 남인도양 스리랑카 연혁」 중에서 위원이 살펴보건대, [호르무즈는] 『명사』에는 홀로모사(忽魯謨斯)로, 또 페르비스트의 지도에는 아이모하(阿爾母河)로, 『직방외기(職方外紀)』에는 아이모해(阿爾謨海)로 되어 있는데, [호르무즈는] 홍해와 마주 보면서 양쪽 해협에 걸쳐 있는 반면, 아덴국은 두 해협 사이에 끼어 있다. 대개 유럽의 화물이 지중해를 거쳐 오는 경우, 대부분 이곳에서 물건을 옮겨 싣거나 뭍에 내려 다시 남양으로 가고, 아시아대륙과 남양의 화물 역시 이곳에서 내하로 들어가 두 대륙으로 나누어 보낸다. --- 「권30, 서인도 연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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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에서 해양으로, 중심에서 여럿 중 하나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저술하던 시기, 중국 아니 아시아와 세계는 새롭게 등장한 질서로 요동치고 있었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세계의 진출로가 대륙에서 해양으로 변화하면서 세계의 판도가 바뀐 결과였다. 대항해 시대의 막대한 부와 산업혁명은 서방 국가에 강력한 힘을 선물하였고, 그들은 그 부와 힘을 통해 세계 질서를 재편하였다.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어 오던 중국과, 중국이 세계의 질서라고 믿어 오던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세계는 그렇게 몰락을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서방 제국주의 중심의 새로운 질서가 동트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질서의 변화에 지식계는 혼란에 빠졌다. “과연 갑자기 다가온 새로운 세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한단 말인가.” 이것은 당대 지식인이라면 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질문이었다. 위원 역시 지식인으로서 답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해국도지』였던 셈이다. 위원은 임칙서로부터 『사주지』와 서양 관련 자료들을 전해 받고 『해국도지』를 편찬하였다. 『해국도지』는 당대 지식인들을 그때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 주었다. 위원은 『해국도지』를 저술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저술한 이유는 무엇인가?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을 공격하고(以夷攻夷), 서양의 힘을 빌려 서양과 화친하며(以夷款夷), 서양의 뛰어난 기술을 배워(爲師夷長技) 서양을 제압하기 위해서 저술한 것이다(以制夷而作).” 답은 언제나 이미 준비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상대를 알고 자신을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者, 百戰不殆). 상대는 알지 못하고 자신은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상대를 알지 못하고 자신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 이는 동양 사회에서는 아주 익숙한 말이다. 『순자』는 동양에서 전법의 경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에 “상대를 알” 수 없었다. 중화사상에 갇혀 자신의 병폐를 돌아보지 않았기에 “자신을 알” 수조차 없었다. 반면 서양은 선교사와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따라서 위원의 답은 어떻게 보면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서양을 극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서양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서양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중국은 결국 서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대처법을 알기 위해서는 한 가지 질문에 더 답해야 했다. 그 질문은 도대체 왜 “필리핀과 자와는 일본과 같은 섬나라이지만, 한쪽(필리핀과 자와)은 병합되고 한쪽(일본)은 강성함을 자랑”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위원은 단순 서양에 관해서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일본에 관해서도 서술하였다. 결국, 답은 언제나 이미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가였다.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자취를 살펴야 한다. “즐거운 저 동산에는(樂彼之園) 박달나무 심어져 있고(爰有樹檀)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其下維穀). 다른 산의 돌이라도(他山之石)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可以攻玉).” 이 시는 『시경』 「소아·학명」의 부분이다. 이 시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있겠지만, 이 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성어를 남겼다. 바로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이는 남의 하찮은 행동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또는 군자도 소인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구절이 도대체 『해국도지』와 무슨 상관인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이 타산지석이야말로, 위원이 『해국도지』를 집필한 정신 중 하나였다. 중화사상에 물들어 있던 중국에게, 중국은 군자요, 주변국은 소인과도 같았다. 그런데, 위원은 (물론 중국이 볼 때) 그 ‘소인에 불과한’ 주변국으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위원은 먼저 동남양의 국가들, 대체적으로 현재 동남아시아라고 부르는 국가들에 관해서 논하기 시작한다. 왜 위원은 하필 동남양의 국가들에 대해서 먼저 논하기 시작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서양을 알고 나를 알아 서양을 이기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먼저 논해야 할 것은 서양의 국가들이 아닌가? 해국도지 4권의 「동남양서설」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서양인들이 동쪽으로 상선을 몰고 온 것은 왜인가? 연안에 이르면 연안을 빼앗고, 섬을 만나면 그 섬을 점령하여 도시와 항구를 만들고 군대를 배치하여 방비하니, 무릇 동남아시아의 중요 항구가 모두 유럽의 도시로 변해 버렸다. … 베트남, 태국, 미얀마, 일본은 서양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은, 즉 해방 사실이 있어 이 편에 기록한다. 반면 조선과 류큐는 해방 사실과 무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즉, 위원은 중국에도 서양 제국주의의 마수가 손길을 뻗치고 있는 상황에서, 왜 서양인들은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였으며,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동남양의 국가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통해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은감불원(殷鑑不遠)”이라는 말이 있지만, 위원이 볼 때 당시 중국의 상황에는 그보다 더 가까운 거울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해국도지』 6권에서는 일본과 남태평양에 대해서 주로 서술하고 있다. 물론 오류도 적지 않으나, 가까운 바다의 정보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대양해군의 필요성을 점점 자각하고 있다. 해상무역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서 바다의 정보는 곧 국가의 안보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위원의 이러한 탐구 자세는 앞으로의 우리에게도 본받을 만한 자세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