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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뵐, 권터 그라스 등과 함께 전후 독일문학을 대표하는 렌츠의 최근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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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칭 화자 한스의 회상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
이 소설은 아르네와 한방을 쓰며 우정을 나눈 한스가 아르네의 유품을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떠오르는 기억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나이답지 않게 세심하고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는 아르네의 유품에는 어느 것 하나 무심히 지나칠 수 없는 의미와 사연과 비밀이 숨어 있다. 한스는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르네가 바로 옆에 살아 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어느 날 작은 배를 타고 떠난 아르네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미 한 달이 넘도록 엘베 강을 샅샅이 뒤졌지만 시신조차 찾을 수 없다. 당혹함과 놀라움 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기다려 보았지만, 이제 그만 아르네의 유품을 정리하라는 어른들의 주문만이 한스의 의무처럼 다가온다. 한스는 아르네가 남긴 것들을 살펴보고 정리하면서 점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한방을 쓰면서도 아르네는 한 번도 한스의 물건을 몰래 뒤지거나 비밀을 엿보거나 은밀한 영역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를 어기고 있는 듯한 느낌. 한스는 아르네의 물건들을 건드리면서 자신이 마치 아르네의 세계, 아르네의 꿈, 아르네의 감춰진 희망 속으로 몰래 들어간 침입자가 된 것만 같아 괴롭다. 하지만 한스는 힘겹게 아르네에 대한 기억의 사다리를 끌어올린다. 아, 아르네! 내가 아니면 누가 네 진실을 이야기해 주겠니? 슬픈 이야기, 담담한 묘사 어느 날 겨울, 한스네 집으로 열두 살 소년 아르네가 찾아온다. 감당할 수 없는 빚에 못 이겨 온 가족이 자살을 시도하고 이웃 사람에 의해 아르네만이 홀로 살아남자 아버지의 옛 친구 집에 맡겨지게 된 것이다. 일찍부터 불행을 경험하고 두려움에 떠는 가냘픈 소년 아르네를 그보다 다섯 살 위인 한스가 따뜻하게 감싸 준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려 깊고 내면의 깊이를 지닌 한스와 말없고 조용한 성품에 뛰어난 언어 재능과 글솜씨, 예민한 감수성과 순수함을 지닌 아르네 사이에 정신적인 유대감이 싹튼다. 침착하고 듬직하게 아르네를 보살펴 주는 한스 아버지, 자상하고 따뜻한 한스 어머니, 말수 적고 무뚝뚝하지만 아르네에게만큼은 마음을 여는 칼룩 씨, 아르네의 언어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키워 주려는 룽비츠 선생, 아르네의 특이한 면모를 알아보는 올라프 돌츠의 아버지 등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보호를 받으며 아르네는 조금씩 불행하고 끔찍했던 과거의 아픔을 극복해 가는 듯하지만, 고집스럽고, 남에게 쉽게 자신을 열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머뭇거리는 성격으로 인해 현실 세계에 쉬이 다가가지 못한다. 때로 한스조차 아르네의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감수성과 감각적 인식으로 세상을 보는 특별한 방법이 이해하기 힘들다. 융통성도 없는데다 주사위놀이에서 연달아 돈을 잃어도 화를 낼 줄 모르며, 남의 요구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한스의 남동생 라르스와 여동생 비프케, 그리고 비프케의 남자 친구 페터 브룬스빅과 올라프 돌츠 등 또래 아이들은 아르네를 자기들 무리에 끼워 주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따돌림과 배타성은 점점 커져 가고, 더구나 아르네가 좋아하는 두 살 연상의 비프케는 아르네의 지극한 정성과 애정을 모른 척하며 페터 브룬스빅과 불장난 같은 사랑을 키워 나간다. 아르네는 비프케와 그 또래들과 어울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일은 점점 더 어긋나고, 아르네에 대한 다른 친구들의 오해와 편견은 더욱더 쌓여 간다. 친구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그들의 배타적 태도로 의해 점점 멀어지자 마침내 아르네는 나쁜 의도가 숨어 있는 줄 알면서도 친구들과 함께 행동하기로 약속한다. 보트를 사기 위해 한스 아버지가 관리 책임자로 있는 폐선 처리장 주물 공장에서 물건을 빼내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르네는 폐선 처리장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칼룩 씨의 순찰을 지체시키는 일을 맡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인간적 교감을 갖고 있던 칼룩 씨가 다치고, 아르네가 짐작했던 것보다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또래 아이들과 현실 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시도가 오히려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자 아르네는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용서를 구하는 아르네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 한스와 한스 아버지, 그리고 칼룩 씨의 묵묵부답, 공모 주범자인 페터 브룬스빅과 비프케, 라르스의 냉정한 태도와 거부의 몸짓……. 아르네는 작은 배를 타고 강물 속으로 사라진다.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했던 바다로 돌아갔으리라 한스는 짐작한다. 한스가 아르네와 함께 지낸 2년 여의 세월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추억과 아픔과 진실을 유품과 함께 정리하는 동안 아버지와 비프케, 라르스가 차례차례 아르네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리워한다. 라르스는 한스가 막 정리를 마친 아르네의 유품을 낡은 트렁크와 상자 속에서 하나하나 끄집어 내서 놀랍게도 아르네가 원래 두었던 곳에 고스란히 가져다 놓는다. 한스는 라르스에게 야단을 치지도,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라르스의 손길이 머뭇거릴 때는 내심 라르스가 그 일을 더 해 주기를 바라기까지 한다. 물건들을 원래 자리로 옮겨 놓음으로써 예기치 않은 소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말을 하지 않고도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한스와 라르스 중 누구도 아르네의 이름을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한스는 둘 다 아르네가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 아르네! 이 책을 읽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내내 새어나오는 탄식이다. 그러나 이 책의 작가 렌츠는 아르네의 등장에서부터 행방불명되기까지의 과정을 잔잔하고 세세하고 담담하게 그려 나간다. 함부르크 항구와 눈 덮인 쓸쓸한 폐선 처리장, 차고 눅눅한 기운이 감돌고 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은 겨울날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그 배경만큼이나 쓸쓸하고 슬프고 가슴 저민다. 그러나 렌츠는 이 음울한 배경 속에서도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을 정교하게 배치하여 신중하고 세심하게 묘사해 나간다. 성장기에 있는 아르네의내면 심리가 특징적으로 잘 드러나며 비프케를 비롯한 또래 아이들의 성격 또한 생생하게 살아 있어, 과장하거나 비약시키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게 한다. 렌츠는 '깊은 슬픔' 속에 우리가 아프게 건져올려야 할 진실 하나를 남겨 놓았다. 유럽에서 거장의 반열에 드는 개성적인 작가, 말년에 접어든 렌츠의 문학적 면모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격조 높은 작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