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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잘한 일이 하나 있다. 소피를 걷어찬 것이다. 불볕더위의 7월 12일, 오늘은 정말 멋진 날이다. 얼마나 훌륭한 결정이었는지! 늘 뒤죽박죽인 내 머리통에서 그렇게 멋진 발상이 떠오르는 건 결코 흔한 일이 아니다. 꼬박 한 달 나흘 동안 이 문제를 두고 고심하고, 분석하고, 온갖 여성지에 실린 연애테스트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체크해보았다. --- p.15
가여운 내 사랑, 너는 내가 정확하게 그로부터 한 달하고 나흘 뒤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 p.22) 솔로가 되고부터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섹스 파트너를 찾아 헤매는 것 같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건 사랑스런 여자와 다정하게 따뜻한 시간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날 그리워하는 여자가 없다는 확신이 들자 따끔거리는 검은 털외투 같은 절망감이 몰려온다. 나는 지금 뉴욕에 있다. 아무도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긴 누가 병적이고 발정난, 절망에 빠진 솔로를 만나고 싶어할까?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다. 조용한 내 원룸으로 돌아가 아무도 만나지 않는 거다. --- p.72 “따님이 이미 이 음반을 갖고 있으면 바꿔드리죠. 그런데 아마 그럴 리 없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아주 간단하죠. 만일 따님께서 파란색으로 염색한 짧은 머리라면 펑크스타일 비슷한 걸 드렸을 테지만 따님께서는 가정에서 귀염 받으며 곱게 자란 여학생으로 아직 반항기로 접어든 것 같지 않으니, 보이 밴드가 적격이죠.” --- p.112 섹스 없이 보낸 140일.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짓의 결과다. 결별도 어떻게 보면 사랑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다. 결코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 p.119 “아빠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어떻게 아는 걸까?” 솔직히 멋진 질문이다. 나는 빙산 위에 있는 아기 물개의 커다란 눈을 본다. 그는 정말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정말 힘든가 보다. 그가 내게 마지막으로 자문을 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라는 사람이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고, 아빠가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과는 한참 먼 모델이기 때문이다. 셀린 디옹이 슈퍼모델이 아닌 것처럼. --- p.130 “그런데 넌 괜찮은 거야?” 나는 내 고민을 애써 감추며 온순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내 문제가 아니라도 그는 충분히 골치 아파하고 있다. 우리는 진짜 사나이들이다. 사나이란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를 떠벌리지 않는 법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에서 유지해야 할 퇴화한 영장류의 절대적인 역할이 있다. 나는 그에게 권태로운 직장 얘기는 물론이고, 짓누르는 고독도,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으로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지독한 공허감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도 없고, 누군가 카페에서 책을 건성으로 읽으며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나이기를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자랑을 늘어놓으며 친구들을 화나게 할 사람도 없다고, 아무도 날 생각하지 않고, 그 말을 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사람도 없다고, 아무도 날 죽도록 사랑하지 않고, 날 만지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 p.133 영화 보러가기 전에 우리는 라파리스에 들러 소스가 흘러넘치는 커다란 햄버거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퀘벡 영화치고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영화를 만장일치로 선택한다. 사실 우리 셋 모두 퀘벡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먼저 연민을 자아내는 낙오자들은 TV뿐만 아니라 책과 퀘벡 영화에서 질리도록 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구 몬트리올이나 플라토 몽 루아얄의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에서 사는데, 그건 도저히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한마디로 그곳의 집세는 무지 비싸다. 그들은 대부분 초보 사진가나 초보 작가로 직업 자체는 쿨해도 다들 초보 수준이라 나처럼 별 볼일 없는 원룸 월세를 낼 정도의 월급을 겨우 받을 뿐이다. --- p.137 내가 매장 뒤쪽에서 소니의 카탈로그를 찾으려고 뒤적거리는데 갑자기 음악이 멈춘다. 자연재해가 다가오는 걸 감지한 동물의 이상한 침묵이 이어진다. 마리 앙드레의 침묵은 전혀 좋은 징조가 아니다. 나는 문 뒤에 숨어서 눈을 치켜뜨고 무슨 일인지 살핀다. 내 예감이 맞았다. 재해가 틀림없다. 내 옛 애인이다. --- p.144 그녀가 돌아온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녀의 차림새로 보아 내게 맛보이고 싶은 게 코스모폴리탄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스타킹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털 스웨터도 보이지 않는다. 폴 프랭크 브랜드의 옅은 파랑색 란제리에 몸에 딱 달라붙는 치마를 입고 있다. 그녀의 맨발이 나를 흥분시킨다. 내게 유리잔을 내밀려 던지는 눈길이 끈끈하다. 너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네 콘돔의 유통기한을 확인하게 될 거야. 틀림없다고. 전 애인과 헤어진 바로 다음날 이 혐오스러운 걸 구입했지만, 그 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갈아입은 애 웃옷 주머니에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내가 너무 낙관적이었나). --- pp.174~175 이제 에브에게 내 마음을 털어놓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녀도 눈치를 챈 것 같다. 우리 둘이 함께 있는 걸 단 1분이라도 목격한 니콜라나 알렉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다들 같은 소리였다. “아니, 뭘 기다리고 있어. 그냥 그녀를 안아버려. 편집증 환자에 겁 많은 늙은이 같으니라고. 왜 그녀가 결혼하자고 할까봐?” --- p.242 초인종이 울린다. 나는 기분 나쁜 안개 속에서 빠져나온다. 얼마 동안이나 침대 맡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셔츠 단추는 반쯤 풀어 제치고, 단추에 손가락을 올리고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결정했다. 벨을 누른 여자에게 날 바쳐야지. 만일 그게 에브면 잘된 일이지. 만일 낸시라면 그것도 괜찮아. 독서 클럽에 가입하라고 온 여자라도 좋다. 그녀를 사랑할 것이다. 그린피스의 비쩍 마른 여자도 받아들이리라. 네가 누구든지, 너와 함께 살리라. 나를 우연의 손에 맡기리라. 오, 우연이여! 무신론자들의 신이여! 오늘 내게 사랑할 여자를 주시길! 알렉스다. 제기랄. --- pp.244~2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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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몬트리올에 사는 다니엘 J는 ‘스크래치’라는 동네 음반가게에서 일하는 서른 살 문턱의 남자. 어느 날 여자친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별을 고한다. 6년 된 여자친구와 쿨하게 헤어지고, 모델 같은 여자들을 만날 완벽한 준비가 되었다. 하지만 쌓아놓은 콘돔은 써보지도 못하고, ‘독신 사이클’에 들어서고 만다.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저축한 돈도 없고, 미래 계획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우울해 한다. 다니엘의 친구들도 마찬가지. 사랑에 빠지는 것을 피하는 바람둥이 알렉스, 아버지가 되길 두려워하는 니콜라의 이야기와 함께 치기 어린 서른 살 소년들의 좌충우돌 성장기가 펼쳐진다.
서른 살 그 남자의 속마음이 궁금해! 다니엘의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여자를 꼬셔볼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고, 아직 결혼을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주류 사회가 말하는 진짜 직업을 갖고 싶지도 않고, 그냥 좋아하는 음악이나 들으며 레코드점 ‘스크래치’에서 손님들에게 적당한 음반을 골라 주는 것이 전부다. 약간은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면서 주류가 아닌 삶을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지도 않다. 빨래 해주는 애인과 결혼하고, 적당한 집을 사서, 적당한 시기에 아이를 낳는 것이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일까? 새로운 사랑 앞에서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하며 고백하지 못한 자신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것일까? 끊임없이 어른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문하면서도, 20대의 치기만큼은 버리지 못하는 애매모호한 나이 서른 살. 미성숙한 자신에 실망하면서도, 어린 소년 같은 감수성과 장난끼는 어쩔 수 없는 나이. 서른 살 남자들이라면 공감하고, 그 남자들의 속마음이 궁금했던 여자들에게 해답을 주는 재기발랄한 이야기가 바로 이 소설 『스크래치!』이다. 캐나다의 닉 혼비, 스테판 동피에르! 이 책은 캐나다 몬트리올 출신 작가 스테판 동피에르의 데뷔 소설이다. 2005년, 퀘벡 출신의 불어권 신인 작가들에게 주는 아르샹보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했다. 작가의 취향을 보여주는 작가들과 문학 작품들, 대중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들이 주인공 다니엘의 입을 빌려 소개되고 있다. 또한 음악을 전공했던 그의 경력을 짐작케 하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이 작가의 독특한 비평과 함께 중간중간 언급되어 소설의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영국 작가 닉 혼비만큼이나 다양한 음악적 취향을 뽐내고 있으면서도, 더 섹시하고 감각적인 문장들은 스테판 동피에르만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2006년 캐나다의 “북 배틀”이라는 행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캐나다 공영방송인 CBC에서 주관하는 이 행사는 매년 책 5권을 선정하여, 유명인사로 구성된 패널들이 각각의 책을 맡아 좋은 점을 설명하고, 논쟁을 하는 행사다. 『스크래치!』는 캐나다 젊은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캐나다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공감하는 대중문화 코드를 발견할 수 있으며, 사랑과 성숙에 대한 보편적인 고민은 동시대 한국 젊은이들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