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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와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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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주나라가 조선을 타고 우리에게 들어왔다

1. 우리 안의 주나라
*주나라가 멸망시킨 은상의 호칭과 연대 *주나라의 푸르고 투명한 하늘
*정도전, 이성계를 설득하다
2. 주나라의 탄생 그리고 천명사상
*주나라의 이주, 신의 한 수가 되다 *문왕이 기초를 닦은 주나라
*무왕이 중원을 장악하다 *묘당과 사직단에 숨은 사연
*약한 정복자의 묘수
3. 조선의 천명
*정도전의 조선 설계 모델은 주나라 *천명의 실현으로써의 개혁과 혁명
*역사의 수레바퀴에 뿌려진 피
4. 종법 탄생의 비밀
*봉건의 시작과 삼감의 난 *중원 통치의 두 가지 길
*종법, 제사의 법칙이 통치의 법칙으로 *봉건은 낡은 것이 아니다
*대종과 소종, 맏이에게 복종하라
5. 조선에 종법을 심어라
*조선 사대부들, 주희에 열광하다 *‘머리의 성리학’과 ‘몸의 습속’ 사이에서
*종법 정착의 난관들 *‘존존’은 사라지고 ‘친친’만 남다
*본말전도의 종법이 가져온 해악
6. 주나라의 예악은 무엇인가
*‘예’와 ‘악’이 근본이요 불가분인 이유 *‘예’와 ‘악’과 술
*예악의 만남이 가져온 변화들 *예악제도 부침의 역정
7. 조선의 예악을 만들자
*「용비어천가」와 예악 *‘신악’에 숨은 깊은 뜻
*‘주나라’라는 이상국가의 모티프는 중국 것이 아니다
8. 주나라는 은상보다 공평한 나라였다
*‘종법’의 공동체성과 ‘공평성’ *‘정전제’는 과연 실재했을까
*씨족국가, 성읍국가, 봉건국가 *낙읍 건설에 스며 있는 주나라의 이념
9. 백성을 위하는 것이 조선의 기반이다
*개국 핵심사업 세 가지 *과전법의 민본주의
*유학입국을 실현한 한양 건설 *태종의 최대 업적은 세종
*20년 넘는 시간을 들여 완성한 세제 ‘공법’
10. 조선은 과연 주나라라는 이상을 성취했는가
*천명과 예악의 조선, 종법의 사슬에 묶이다 *종법이 끼친 해악
*전환기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들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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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

성균관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중국미술사를 공부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다닐 때부터 출판일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해외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도록을 여러 권 만들었다. 그 후 출판사 뿌리깊은나무에서 근무했다. 1995년에 지호출판사를 설립해 여러 분야의 교양서를 출간했으며, 지금은 책 쓰는 일만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동양화는 어떻게 문인화가 되었을까』, 중국의 고대 제도와 조선의 건국을 조명한 『주나라와 조선』, 갑골문과 금문의 유래를 통해 한자를 해설하는 『한자본색』, 음식에 관해 인문학적 탐색을 한 『식전』 등이 있
성균관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교 역사연구소에서 중국미술사를 공부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에 다닐 때부터 출판일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해외 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문화재 도록을 여러 권 만들었다. 그 후 출판사 뿌리깊은나무에서 근무했다. 1995년에 지호출판사를 설립해 여러 분야의 교양서를 출간했으며, 지금은 책 쓰는 일만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동양화는 어떻게 문인화가 되었을까』, 중국의 고대 제도와 조선의 건국을 조명한 『주나라와 조선』, 갑골문과 금문의 유래를 통해 한자를 해설하는 『한자본색』, 음식에 관해 인문학적 탐색을 한 『식전』 등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중국미술사』, 『원세개』, 『그림으로 읽는 중국 신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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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92쪽 | 147*210*20mm
ISBN13
9788979190014

책 속으로

조선의 건국과 더불어 중심 이념으로 자리 잡은 유학과 성리학은 이때부터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 불교 국가에서 강제로 유교 국가로 탈바꿈하며, 공자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아 모든 습속과 예의범절을 이에 꿰맞추려 노력했다. 시작은 태조 때였지만 골격이 완성된 것은 세종·성종 대에 이르러서였고, 조선 중기부터는 이런 영향이 백성들 생활 전반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 지금 우리의 생활에까지 미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유학과 성리학에서 전범으로 내세우는 이상향으로서의 주나라에 대해 어렴풋이 알뿐, 역사적 실체로서의 주나라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 p.24∼25

정도전은 유학자이자 성리학자로서는 당시 손에 꼽힐 정도로 학식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과거에 급제한 뒤로는 학문과 강학이 연계된 성균박사나 태상박사 같은 관직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 …… (그는) 경서들에도 아주 정통했을 것이다. 그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두 권을 꼽으라면 『맹자』와 『주례』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일 것이다. 『맹자』는 그의 천명사상을 공고하게 해 주었으며, 『주례』에는 천명을 실천하기 위해 백성을 편안케 하는 기본 설계도가 들어 있었다. --- p.67

정도전은 단순한 개혁가나 유학자가 아니라 이 땅에 주나라와 같은 이상적인 국가를 세우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도덕성이 높은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대신 유학으로 철저히 무장한 사대부들이 다스리는 그런 유교의 전범적인 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그래서 하늘인 백성들이 잘 먹고 즐겁게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하늘의 명령을 받아 혁명을 이룬 것이다. 정도전은 이 천명이 진정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천명이 그 어느 종교보다 위대했을 것이다. --- p.82∼83

사대부들이 제사권을 강화한 데에는 아마도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을 법하다. 하나는 유교적 질서 체계 안에서 황제나 왕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낸다면, 이제 황제나 왕과는 실질적인 인척관계도 없는 사대부들이 이런 예절을 따라함으로써 유교적 습속을 공유하는 동질감을 갖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 또 하나는 사대부들이 예학적 지식을 갖추고 집권자의 의례에 조언토록 함으로써 통치행위에 직접 참여하는 통로를 하나 더 만든 것이다. --- p.129

사실 어떤 문명, 어떤 나라에서도 예절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대부분의 고도화된 문명은 까다로운 예절을 통해 나라의 질서를 구현했다. …… 주나라의 주공은 ‘예’와 ‘악’을 합쳐 전무후무한, 까다롭고 세련되고 정교한 의례를 만들어낸 뒤 이를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이 주나라의 ‘예악제도’는 정권의 질서 유지를 위한 뿌리이자 기둥이었으며, 유가들은 이를 통해 정권과 통치에 확고하게 발을 디디게 되었다. --- p.171

정도전, 세종, 세조가 꿈꾸던 주나라의 현현顯現으로서 조선은 결코 중국에 대한 사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주나라의 이상을 따르고자 했지만, 이는 조선의 천명이고 조선 방식대로의 종법과 예악을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주나라라는 이상국가의 모티프만을 취한 것이지, 우리 자신이 주인이라는 의식은 뚜렷했던 것이다. --- p.206

유가가 역사에 있어서 그 이념으로 실제 혁명에 성공한 사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유교국가인 송나라에서 왕안석의 신법조차 실패했다. 그만큼 보수기득권의 반혁명 공작이 치열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오로지 단 한 번의 성공사례가 태동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정도전과 이성계의 조선건국이다. --- p.267

이제 와서 새삼 아득한 시절의 주나라와 조선을 비교하는 뜻은 지금의 현실을 보고자 함이다. 은상과 주나라의 교체기에 여러 관념과 제도들이 생겨난 것은 당위성이 있어서였다. 그 당위성에는 과거의 모순과 새로운 사회가 나가야 할 방향이 담겨 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유가의 경전들이고, 거기에 들어 있는 해결책들은 그 정신만을 취하고 오늘에 맞게 고쳐 써야 할 것들이다.

--- p.276

출판사 리뷰

주나라와 조선이 처한 시대적 상황에서 태어난 제도들

작은 인구로 많은 인구를 다스려야 했던 주나라는 은상이 멸망하고 주나라가 흥기한 것에 대해 천명이라고 내세웠다. 그리고 전국토를 대상으로 봉건(封建)을 실행해, 왕실 인척들이 각 지역을 장악하도록 한다. 아울러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으로 나누는 종법을 내세움으로써 각 제후들은 모두 종가 중의 종가, 즉 주왕실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면 왕실과 제후국은 그저 종법을 지키기만 해도 왕가를 호위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를 예악 제도로 정착시켜 모든 주나라 사람을 이성적으로 규율하도록 위치 지었다. 아울러 정전법을 모티프로 삼은 토지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용함으로써 백성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것이 종법과 봉건과 예악을 한 묶음으로 진행한 주나라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런 조치를 주도적으로 행한 인물이 바로 주 무왕의 동생 주공이었다. 그는 왕이 될 만한 실권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소종으로서 대종을 모시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종실제도의 완성을 꾀한다. 유가를 창립한 공자는 이런 주나라와 주공을 이상적 모델로 삼았다. 이후 유학자들은 주나라와 주공 받들기에 신명을 바쳤고, 마침내 14세기 말 조선에서 이런 유가의 가르침으로 혁명을 실천한다. 그것이 곧 조선의 건국이다.

조선은 천명사상을 내세워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며, 토지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이후 세종이 예악을 마련하고, 세조와 성종 대에 이를 제도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소국이 대국을 통할해야 했던 주나라와 달리, 조선은 봉건과 종법을 시행할 상황이 아니었다. 조선의 경우 이민족도 없었고 중앙집권적인 국가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법과 봉건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에 토지개혁과 예악제도를 마련하고 종법제도 등을 한정적으로 도입해 사회적 안정을 꾀함으로써, 조선 500년의 기틀을 조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종법이란 사슬에 묶여 버린 조선

11∼12세기 동안 중앙집권 국가인 송나라에서 사대부들은 종법 및 봉건 문제와 관련해, 집안에 가묘를 세우고 왕가에 대한 충성을 가문에 대한 충성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것이 집안에 사당이 들어서게 된 근원적인 이유이다. 아울러 지난날 부모에게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던 사대부의 예를 ‘4대봉사’(4대조까지 모시는 제사)로 확대하여 권위를 높이려 들었다. 이런 사항들은 주희의 제자들이 펴낸 『주자가례』에 담겨 있는데, 조선의 사대부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도입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의 양난 속에서 사대부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를 만회하기 위해 ‘종법’과 ‘예학’을 철저히 내세워 사회적 신분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사대부 가문에서 혈연과 가문을 묶는 고리로써 힘을 발휘하게 되었고, 많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종갓집에는 가묘가 세워졌고, 제사의 권한은 문중의 대를 이은 대종에게만 주어졌다. 자연히 장자상속제가 도입됐고, 서자와 여자들은 지독한 차별을 받게 되었다. 아울러 왕가에 대한 의무는 뒤로 밀리고 가문에 대한 의무만이 강조되면서, 이제 벼슬살이는 가문을 떠받치는 사적 이익을 위해 기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족보가 발달했으며, 사회가 건강성을 잃고 집안의 내력만 따지고 들었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흐름이 혈연·지연·학연 따위가 횡행하는 퇴행사회를 불러왔고, 결국 ‘종법이 조선의 멸망에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제도들에 대해, 마치 수천 년간 이어져온 우리 고유의 전통이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만 하더라도 조선에 비해 여권이 잘 보장되고 있었음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의 퇴행적 유산 중 많은 것들이 기껏해야 수백 년 정도의 연한밖에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주나라의 흔적

경복궁의 좌우로 종묘와 사직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우리는 이를 왕실 조상을 모시는 종묘와 토지신과 곡식신을 모시는 사직단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수적으로 밀리는 주나라가 다수의 은상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낙읍에 주나라 조상의 묘당과 은상의 묘당을 함께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주공이 분봉 받은 노나라에서는 굳이 은상의 조상을 받들 일이 없었으므로 묘당이 하나였다는 것이다. 이는 춘추전국시대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러했다는 것이 이 책의 지적이다. 조선 왕조에서 그러한 주나라의 법식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우리 역시 두 개의 묘당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 밖에 종가 및 제사, 호주상속제, 성씨제도, 족보, 과부재가금지법이나 열녀문, 서얼의 차별 등과 관련된 문화 흔적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안들이다. 종법을 도입하여 남자·장남 중심의 사회구조가 만들어지고, 이를 호주제도 및 성씨제도로 정착시키는 한편 족보를 통해 공고화하고, 당연히 여자들의 삶을 집안의 가사노동에 한정시키고 청상수절을 강요하며, 서얼들을 차별함으로써 소수 기득권자들의 우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려 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모두가 양반이 되기 위해 전력질주한 것이 조선 사회였다고 총평할 수 있겠다. 조선 초기에 10퍼센트 미만이었던 양반의 숫자는 조선 후기 70퍼센트까지 치솟았다. 노비를 제외한 극소수의 양민이 군역을 담당했으므로, 이미 나라를 지킬 사람은 조선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상국가 주나라의 제도 도입은 조선 초기에만 해도 일정한 정도의 개혁적 기능을 수행해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으나, 중후기를 지나면서는 시대를 억누르는 퇴행적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저자는 시대적·역사적 전환기의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주나라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조선조의 역사를 훑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그런 면에서 주나라는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갖고 살펴봐야 할 역사임에 분명하다.

※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 사업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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